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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내 삶의 한 축을 지탱했던 사람의 체온이 내 곁에서 스러지고 남은 공허함,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비애 속에 느끼는 분노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좌절감 등등. 상실의 경험은 아픈 감정을 동반하여 다가왔다. 아픈 감정은 상실 경험자의 몸을 점차적으로 잠식하며 우울증의 형태로 드러난다.

최근 정부는 인구 10만명당 25.6명(2016년 기준)인 자살률을 2022년까지 17.0명으로 낮춰, 연간 자살자 수를 1만명 이내로 줄일 계획임을 밝혔다. 주변의 자살 징후자를 파악하고 이들을 전문가와 연결해주는 '자살 예방 게이트 키퍼'를 100만명 양성하는 것과 동시에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경찰청이 보유한 자살 사건 수사기록 7만건을 전수 조사를 한다고 했다. 자살자의 특성을 파악해 정책의 토대를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물론 고 위험군의 자살 징후자들 대부분이 상실 경험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각박한 삶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음에도, 조각난 삶의 파편을 다독일 수 없는 상태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상황임을 염두해 둔다면, 상실에 대해 우리는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또한 자살을 현실에 대한 현실 도피나, 의지박약으로만 치부하는 우리의 편견 역시 자살에 관한 폭넓은 담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주된 이유였다. 그래서 '자살'에 대해 원론적 이야기만 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보편적 정서이기도 한 '상실'을 가지고 조금씩 이해의 범위를 넓혀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에노모토히로아키지음,박현숙 옮김. 『모친 상실』
 에노모토히로아키지음,박현숙 옮김. 『모친 상실』
ⓒ 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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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이라는 체험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심리학 박사인 에노모토 히로아키의 <모친상실>은 어머니로 대변되는 친근한 존재의 상실을 어떻게 딛고 일어서야 하는지에 대해 차분히 다루고 있다. '상실'에 관해 애도의 방법이 잘못되면 상처가 깊어진단다. 그래서 책은 9개의 챕터를 두고, 상실 대상자에 대한 정의, 애도 작업, 극복 방법 등에 대해 다뤘다. 자세히 살펴보자.

'제1장, 모친 상실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서는 상실(죽음) 이후 반응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분석했다. 예를 들어 상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사람,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 주위의 위로에 화를 내는 사람, 현실 도피를 생각하는 사람 등을 다루고 있었다.

방향을 잃은 분노와 삶의 무기력증은 이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 것이었다. 빛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어두운 터널 속에 영원히 걸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은 우리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정서였다. 하지만 모친의 사망 당시에는 혼란스럽지 않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 반응을 보이는 유형이 있기도 했다.

"관에 누워 있는 모친의 시신을 볼 때도 아무런 느낌이 없던 여성은 모친의 1주기가 될 무렵, 갑자기 기운이 없고 회사에 가는 것조차 귀찮아졌다고 한다. 모친이 사망한 지 3년이 지난 뒤에야 증상의 원인이 모친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29쪽)


이런 현상을, 저자는 비틀린 모자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제2장, 소중한 존재를 잃으면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에서는 슬픔에 대한 정서적, 신체적 반응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실과 준비된 상실 사이에서 맞이하는 유족의 스트레스 반응에 관해서는 주목할 만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있는데 유족에 대한 위로의 말이 자칫 잘못하면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로 곪는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말로, "왜 빨리 발견하지 못했냐", "생활상의 좋은 면을 화제로 삼은 말, 이제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네요", "당신만 힘든 게 아니라는 말", "애써 밝은 척하고 있는데, 이제 괜찮아졌네요라는 말", "금전적인 부분을 묻는 말"(51쪽)이 그렇다. 가장 좋은 위로는 말이 아닌 침묵이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제3장, 애도 작업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정서적 위기 상황에 부딪친 사람들의 심리적 변화에 대해 정리해 두었다. 워든의 과제설을 차용하기도 하였다.

"워든은 단계나 위상이 상실감으로 무너진 사람이 거쳐 가야만 하는 절차라는 점에서 수동적인 면이 있다고 보고, 좀 더 능동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과제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77쪽)


단계라는 것은 데켄의 주장으로 대상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몇 단계의 애도 과정을 거쳐 인격적으로 성장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반면에 워든의 과제설은 몇 가지 미션을 통과해야만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고 했다. 그 미션을 통과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데켄과는 차이가 있었다.

'제4장, 어떤 사람이 모친의 죽음에 타격을 입기 쉬운가'에서는 밀착 모자와 갈등 모자라는 타이틀 속에서 불안정한 애착 유형들이 슬픔 반응에도 취약한 것임을 밝혔다. 불안/집착형 애착(만성적인 슬픔), 불안/양가형 애착(노골적 분노성향), 회피/경시형 애착(애정 희박), 회피/공포형 애착(은둔형 외톨이)으로 분류하였다. 또한, 저자는 과잉 보호내지는 양육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듯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뚜렷한 반항기 없이 모자 일체감을 계속해서 편안하게 받아들일 경우, 모친으로부터 독립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고 유아나 아동처럼 모친과 연결된 자아, 모친과 일체화된 자아를 가진 채로 살아가게 된다.…… 모친을 잃게 되면 자아가 붕괴된다.……보통은 사춘기에 반항기를 거치면서 모친과 심리적인 일체화 상태를 벗어나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것이 자녀의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며, 부모의 자녀로부터의 독립이다." (100~101쪽)


'제5장, 슬픔이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 갈 때'에서는 사별 후 나타나는 일반적인 슬픔이 아닌 병적인 슬픔으로 진행되었을 경우, 본인 스스로의 인지가 중요하고 특히 미해결된 슬픔의 단서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병적인 슬픔의 유형으로는 만성 슬픔 반응, 지연된 슬픔 반응, 악화된 슬픔 반응, 가면형 슬픔 반응으로 분류한 워든의 '복잡성 슬픔'이라고 명명한 이론을 소개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슬픔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행동 리스트를 정리하여 가능한 많은 대처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적극형일 경우 쇼핑이나 외식으로 기분 전환하기, 산책처럼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할 것, 회피형일 경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숙면을 취할 것, 자력형일 경우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할 것, 조언 요청형일 경우, 책이나 잡지에서 지혜를 구할 것, 속마음을 친구나 가까운 지인과 나눌 것 등이 그렇다.

'제6장, 슬픔을 어떻게 딛고 일어서는가'에서는 고인이 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익숙해지기 위한 방법론과 더불어 상담자의 원칙에 대해 설명했다. 혼자서 극복할 수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었다. 상실 경험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함께 있는 공동체의 일원들이 서로 도와가며 아픔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방안이기도 했다. 가령, 상실자는 같은 처지의 상실 경험자를 도움으로써 자신의 슬픔을 딛고 일어설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덧붙여 상담자는 대상 상실이 현실이라는 인식을 돕도록, 상실 경험자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어준다든지, 상실 경험자가 자신의 감정을 음미하도록 차분히 지켜봐 준다든지, 냉정한 판단력을 잃은 상실 경험자의 현실적, 경제적 삶을 지원해준다든지, 가장 중요한 것 중에 대상 상실에 대한 긍정적 의미 부여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을 돕는 것도 있다고 했다. 자선활동, 구명활동, 정치 활동을 저자는 사례로 들었다. 사람의 생김새가 다르듯, 저자는 거듭하여 슬픔에도 개인차가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다르게 대상을 봐야 하고 차이가 있는 슬픔에 대한 대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7장, 고인은 마음속에 살아있다'의 경우에는 고인을 자신의 마음에 수용하는 여러 사례들을 보여주었다. 망자와 함께 사는 일본인의 문화라든지, 고인이 살아 생전에는 뜨개질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상실 뒤 고인의 모습이 떠올라 뜨개질을 시작한 사람들의 사례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후회와 원망의 삶이 아닌 소중한 사람의 상실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삶의 자세의 변화가 있어야만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거듭 이야기 했다.

'제8장, 쉽게 해볼 수 있는 슬픔 회복의 방법'의 경우에는 고인의 전환기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는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몇 살에 입학, 몇 살에 졸업...... 몇 살에 큰 수술을 받았다. 몇 살에 전직, 몇 살에 자녀의 수험, 몇 살에 여행 등, 아는 범위 내에서 전환기가 되는 사건을 기록한다."(193쪽)


또한 여행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일종의 리프레이밍(reframing)이라 할 수 있다. 일상생활 공간의 프레임(frame)으로는 견딜 수 없는 사건이던 대상 상실도 더 넓은 프레임 속에 들어와서 보면, 인생에서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시련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196쪽)


마지막인 '제9장, 모친 상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유념할 점'의 경우에는, 예감 슬픔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는 경우에 대해 애착 대상과 더 깊이 있게 교류할 것을 권유하며 특히 슬픔에 깊숙이 빠지지 않기 위해서 정서적인 체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책은 두껍지 않았다. 그럼에도 보폭이 큰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자살=상실'이라 함축할 수는 없지만, 상실의 그릇된 힘이 자살이라는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는 점에서 상실을 터부시할 수는 없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상실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대상을 한정하지만은 않았다. 비록 제목은 <모친 상실>이라고 했지만, 모친은 그저 하나의 비유일 뿐이었다. 지금 이 시대는 상실이 흔한 시대이다. 상실의 사전적 정의가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됨을 일컫는다. 또는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을 뜻하기도 한다.

건실하게 노력한 삶에 대한 배반은 늘 있어왔고, 우상으로 존재했던 톱 스타의 자살 사건이 흔해졌고, 참사라 부르는 사건은 낯설지가 않다. 이제 이러한 상실의 시대에 우리 삶에 가이드라인을 해줄 지침서 역할을 해줄 한 권의 책도 필요할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에노모토히로아키 지음, 박현숙 옮김. <모친 상실>(청미/2017), 전체 230쪽, 값 14,500원.



모친상실 - 슬픔을 어떻게 딛고 일어서는가

에노모토 히로아키 지음, 박현숙 옮김, 청미(2017)


태그:#모친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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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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