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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있을 때였습니다. 어두운 밤인데 친구의 아들인 시영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무 살 청년이니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니었지만 여행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지라 지리도 잘 모를 텐데 싶어 약간 염려가 되었습니다. 과일을 좋아하니 열대 과일을 사러 간 걸까, 아니면 혼자서 달랏의 야경을 보러 간 것일까요.

왁자하니 환호성이 울렸습니다. 옆집에서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밖에서도 환히 다 들여다보이는 그 집 거실에 시영이가 있지 뭡니까. 옆집 식구들과 어울려 천연덕스럽게 축구를 보고 있었습니다.

축구로 하나된 동서양 젊은이들

축구를 좋아하는 시영이는 축구에 대해서는 다 꿰고 있습니다. 달랏에 도착한 그 날 밤에 혼자 달랏 야시장에 놀러갔다가 유럽에서 온 젊은이들과 축구로 뭉쳤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포도주까지 얻어마셨다니, 도대체 축구가 뭐기에 동서양의 젊은이들을 하나로 묶었을까요.

카타르와의 경기가 있었던 지난 1월 23일 밤의 호치민 시티 거리 모습입니다.
 카타르와의 경기가 있었던 지난 1월 23일 밤의 호치민 시티 거리 모습입니다.
ⓒ 김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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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축구 열기는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짱(나트랑)에 있을 때였는데, 텔레비전을 틀면 박항서 감독의 모습이 자주 보였습니다. 훈련을 하는 선수들을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박항서 감독을 보며 신기하기도 했고 또 뿌듯한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이 연전연승해서 결승에까지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그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베트남이 결승에 올라가다니,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빈 말로 했던 베트남의 결승 진출은 진짜가 되었고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우즈베키스탄에게 1-2로 져서 최종 승자는 될 수 없었지만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던 지난 AFC U-23 축구대회였습니다.

하이스쿨 부라더, 박항서 감독님

박항서 감독은 제 남편의 고등학교 선배님입니다. 서울 경신고등학교는 우리나라 축구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선수를 여럿 배출했는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분으로는 차범근 감독과 박항서 감독을 꼽을 수 있습니다. 남편의 고교 동창들은 지금도 만나기만 하면 두 분 선배님들의 활약을 이야기하며 동문임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베트남이 시리아와 맞붙었던 지난 1월 17일이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가니 밥 먹는 사람들의 눈길이 텔레비전 화면에서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날 우리나라도 8강 진출을 두고 호주와 시합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와 호주의 경기 내용이 궁금하여 스마트폰으로 이리저리 검색하고 있는데 우리 뒷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우리 자리로 왔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박항서 감독 덕분에 베트남 사람에게 술대접을 받았습니다.
 박항서 감독 덕분에 베트남 사람에게 술대접을 받았습니다.
ⓒ 김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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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우리나라 모 건설회사의 이름이 새겨진 작업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한국 회사에 다녔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면서 한국이 지금 호주에게 2:0으로 이기고 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베트남은 이번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8강에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한국도 또 베트남도 경기에서 이기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때마침 화면에서는 박항서 감독이 보였습니다. 우리에게 왔던 베트남 남자가 엄지 손가락을 척 세워들면서 '박항서 감독 최고'라는 뜻을 표했습니다. 우리도 따라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최고라고 연신 말했습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진 남편이 "박항서 캡틴, 마이 하이스쿨 부라더!"라고 연거푸 말하지 뭡니까.

박항서 감독이 남편의 고등학교 선배님이니 하이스쿨 브라더가 맞긴 맞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트남 남자가 황급히 술을 따라서 남편에게 권했습니다. 베트남의 영웅인 박항서 감독과 아는 사람이라니, 이 어찌 신기하지 않았겠습니까.

남편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서울 경신고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1학년 일 때 박항서 감독은 3학년이었고, 축구부의 주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입학한 1학년생들에게 3학년 선배들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주장임을 알리는 노란색 완장을 차고 운동장을 누비는 박항서 감독을 경외감으로 바라봤다고 합니다. 

박항서 감독은 키가 그리 크지 않은 편입니다. 그것은 고등학교를 다닐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부지고 단단해서 키 큰 선수들 속에 있어도 전혀 작아보이지가 않았고 오히려 작은 거인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시합이라도 있는 날이면 학생들은 효창운동장에 가서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고 합니다. 함성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주장인 박항서 선수는 회오리처럼 공을 몰고 갔다고 합니다.


베트남이 카타르와 경기를 했던 1월 17일 밤, 동서양이 축구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베트남이 카타르와 경기를 했던 1월 17일 밤, 동서양이 축구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 김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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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안은 한국과 베트남의 우의를 다지는 소리로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연신 건배를 외치며 술잔을 높이 들었습니다. 유럽에서 온 여행자도 합석을 했습니다. 그날 밤, 달랏의 작은 식당은 호의가 넘쳐 흘렀고 우리나라도 또 베트남도 우리들의 바람대로 경기에 이겨 준결승전에 올라갔습니다.
 
여행 일정이 끝나서 우리는 1월 22일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오니 베트남 축구의 신기원을 연 박항서 감독에 대한 뉴스들이 우리나라의 신문지면을 온통 다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 주었던 히딩크 감독처럼 박항서 감독도 베트남을 활활 타오르게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인 게 자랑스러웠다

준결승전이 벌어졌던 그날(1월 23일) 호치민 시티에 있었던 남편의 친구는 "완전 난리 났다" 하면서 베트남의 승전보를 알려왔습니다. 붉은 깃발을 든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축하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 하나 본 것만으로도 베트남 여행의 본전을 뽑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에는 호치민에 있는 오토바이란 오토바이는 다 거리로 나왔는지 도로가 꽉 찼다고 했습니다. 모두 축제처럼 신나게 즐기는 모습이었다고 했습니다.

준결승전이 있었던 지난 1월 23일 밤의 호치민 시티, 붉은 머리띠를 두른 젊은 부부가 길거리 응원을 하고 있습니다.
 준결승전이 있었던 지난 1월 23일 밤의 호치민 시티, 붉은 머리띠를 두른 젊은 부부가 길거리 응원을 하고 있습니다.
ⓒ 김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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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죽지세처럼 승승장구하던 베트남은 마침내 결승까지 올라갔습니다. 결승전은 눈이 펑펑 내리는 가운데 치러졌습니다. 운동장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지만 선수들의 투지와 응원단의 뜨거운 함성에 오히려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아쉽게도 베트남은 우즈베키스탄에 지고 말았습니다. 베트남 축구의 신화도 멈췄습니다. 베트남 전역에서는 아쉬운 한탄이 터져 나왔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펄펄 날았던 선수들의 투지와 박항서 감독의 지략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은 패배의 아쉬움보다는 내일의 희망을 꿈꾸었을 것 같습니다.
 
베트남을 여행했던 두 달 동안 박항서 감독 덕분에 좋았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술대접도 받았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베트남 사람들의 눈길이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국 사람인 게 자랑스러웠던 베트남 여행이었습니다.


태그:#베트남여행, #달랏 , #베트남 축구, #박항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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