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기생, 꽃의 고백> VIP 시사회에 다녀왔다. 직접 출연한 영상이라서 애착이 갔다. 배역은 권번 출신 기생들의 현재 삶을 추적하는 지역 기자이다. 국악방송국 프로에 나온다고 해서 응했는데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놀라웠다. 시사회에 다녀온 소감을 소개한다. - 기자말

기생, 그들은 왜 자신의 정체성을 감출까

 <기생, 꽃의 고백> 스틸 컷

<기생, 꽃의 고백> 스틸 컷 ⓒ 필름에이픽쳐스


20세기 초 '모던의 꽃'으로 문화예술계를 주름잡았던 여성 예술가들이 있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 감시 속에서도 화려하게 피었다가 왜곡된 시선과 무관심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간 기생(妓生)들이다. 그들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解語花)'라 불리기도 하였다.

극장을 처음 접한 예술인도 기생이었다. 1902년 협률사가 개관했을 때도 기생들이 처음 무대에 올라 춤을 췄다. 서양의 포크댄스, 소셜댄스, 레뷰춤 등이 들어오면 사람들은 기생에게 가서 배우라 하였다. 대중 앞에서 가무(歌舞)를 행하는 게 본업이었던 기생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새로운 춤을 습득하고, 공연도 했다. 춤뿐 아니라 가요나 영화 제작을 앞두고 제일 먼저 섭외가 들어가는 게 기생이었다.

그들은 외면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연기(演技), 무용, 노래, 악기 연주 등 예술에 대한 식견까지 두루 갖춘 문화 엘리트이자,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양의 신문물을 누구보다 일찍 받아들인 선구자들이었다. 새로운 춤과 연기, 노래 모두가 당시 대중스타였던 그녀들 몫이었던 것.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숨겨야 했다.

 동래권번 출신 할머니들 인터뷰 장면

동래권번 출신 할머니들 인터뷰 장면 ⓒ 조종안


"공개는 절대 안 되는 거죠? 이거 방송 나가면 큰일 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애들 때문에 안돼요. 애들이 알면 큰일 납니다. 애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전혀 몰라요. 옛날에 기생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알려줘도 이해를 못 해요. 옛날에 할머니가 아무리 유명하고 대한민국을 휘젓고 다녔다고 해도 아이들은 이해를 못 하죠. 요즘 애들은 그때를 모르기 때문에···. 권번(券番)조차도 뭐 하는 곳이었는지 모르는데요. 모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기생, 꽃의 고백>에 얼굴을 가리고 인터뷰에 응한 동래권번 출신 할머니들의 하소연이다. 그들은 예술인으로 활동했음에도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살아야 했다. 손자 손녀가 무서웠고, 아들 며느리 눈길이 두려웠고, 세상의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이다. 세상은 무관심으로 일관하였고, 오랫동안 그들을 잊었다. 아니 외면하고 천시했다.

군산 소화권번 출신으로 국내 유일의 민살풀이(수건 없이 추는 살풀이춤) 전승자인 장금도(91) 명인은 "지금이나 허니께 춤을 예술이라고 허지, 그때는 예술이라고 혔간디. 아무리 좋은 춤도 뭔가 풍류를 좀 아는 사람이나 예술이라고 혔지... 사람들이 '기생 출신'이라고 천시허든 시절이었응께..."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한다.

지난했던 기생들의 삶, 영화로 제작

 <기생, 꽃의 고백> 포스터

<기생, 꽃의 고백> 포스터 ⓒ 필름에이픽쳐스


장금도 명인은 이 시대 마지막 '생짜 기생'이다. 그는 지난 2016년 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20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기생이라는 과거는 숨기고 싶은 꼬리표일 뿐이었다. 왜 세상은 그들을 음지로 숨어들게 했을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졌다. <기생, 꽃의 고백>(감독 : 홍태선, 임혁)이 그것이다.

<기생, 꽃의 고백>(상영시간 77분)은 한국영상대 산학협력단과 (재)국악방송 공동 투자로 제작됐다. 제작 기간은 2년여. 촬영은 전북 군산, 부산 동래, 일본 동경 등에서 진행했으며, 주연으로 등장하는 장금도 명인을 중심으로 그동안 감춰지고 왜곡된 기생들의 삶을 추적해간다.

카메라는 권번 출신 기생들의 과거와 현재 생활상을 취재하는 기자와 기생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일본을 찾아가는 학자, 전직 기생으로부터 전통 무용을 전수받고 있는 예술인 등 사회 곳곳에서 한국 기생문화 유산의 흔적을 찾아가는 문화 추적자들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구 군산 소화권번 앞에서 장금도 명인과 인터뷰하는 장면

구 군산 소화권번 앞에서 장금도 명인과 인터뷰하는 장면 ⓒ 필름에이픽쳐스


홍태선 감독은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이 영화는 1920~50년대 활동했던 기생분들 이야기가 주된 소재"라며 "과거 대중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예인으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당당히 나서지 못하고 음지 속으로 들어가고 그런 게 현실이다. 여러분에게도 혹시 있을지 모를 잘못된 편견과 선입견의 굴레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홍 감독은 "우리 문화사에서 기생을 대중예술인으로 복권시키고, 아름다웠던 그녀들의 참다운 모습을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해주고 싶어 작품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전통문화의 한 자락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흔적이 남아있는 일본까지 오가는 긴 여정을 거치면서 대중예술인으로 존재했던 그녀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라고 덧붙였다.

임혁 감독은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다. 하나 아쉬운 점은 주인공이신 장금도 선생님을 모시지 못한 게 참 안타깝다. 연세가 워낙 많으시고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 모시지 못했다. 죄송할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회가 되면 군산에서 장금도 선생님을 모시고 특별 상영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라고 앞으로 계획을 밝혔다.

<기생, 꽃의 고백>은 오는 25일 서울 시내 주요 상영관에서 개봉될 예정이다.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고, 어딘가 결기와 한이 느껴지는 그녀들 모습은 외면적 아름다움과 내면의 신비로움을 뿜어내며 우리가 미처 몰랐던 기생의 재발견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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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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