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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쌀이 주식이라지만, 한국만큼 다양하게 볶음밥을 만드는 나라가 있을까 싶다. 어느 식당에 가든 마무리가 볶음밥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쭈꾸미, 소곱창, 떡볶이, 삼겹살, 해물찜 등등. 메인 요리를 다 먹고 남은 국물이나 양념에 밥과 김가루, 참기름을 넣고 달달 볶으면 고소한 볶음밥이 뚝딱 완성된다.

우리 집 식구들은 이 마무리 볶음밥의 원조가 엄마일 거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 김치찌개, 닭볶음탕은 물론 콩나물국까지. 애매하게 남은 음식은 엄마의 숙달된 손놀림으로 볶음밥으로 변신해 식탁 위에 올랐다. 유난히도 먹성 좋은 삼남매를 엄마는 그렇게 키웠다.

"넌 내가 밥으로 보이냐?"

그랬던 것도 같다. 엄마만 보면 배고프다고 칭얼대기 바빴다. 엄마에게 이런 핀잔을 들을 만큼 불평불만 없이 잘 먹었다. 그러다가 사춘기를 맞이할 때쯤, 엄마의 음식이 성의가 없다며 투정하기 시작했다. 볶음밥은 기분 나쁜 잔반 재활용이라며 강하게 거부하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결혼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맞벌이 부부로 살았음에도 살림은 당연하듯 오직 엄마 몫이었다는 걸. 볶음밥은 일분일초가 늘 바쁘고 마음이 급했던 엄마의 궁여지책이었음을.

<딸에게 차려주는 식탁> 책표지
 <딸에게 차려주는 식탁> 책표지
ⓒ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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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차려주는 식탁>을 보며, 나의 추억들을 한껏 소환했다. 글은 쉽게 읽히는데, 내 기억들이 떠올라 웃기도 하고, 눈물짓기도 하느라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은 계속 느려졌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던 그때, 어찌 추억이 없을 수 있겠나. 하하호호 웃어도 추억이고, 등짝 스매싱을 당해도 온통 추억이다.

저자는 자칭 '밥상 차리는 남자'다. 전업 주부는 아니지만 결혼을 하며 아내와 집안일을 나누었고, '밥상 차리기'는 그의 몫이 되었다고 한다. 직업은 식품 MD로, 상품을 만들며 재료, 방법, 포장까지의 모든 과정을 책임지고 진행한다고. 20년 넘게 식품 업계에 종사하며 좋은 재료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하니, 그가 차리는 식탁은 어떨까.

책을 통해 그의 음식 철학을 엿볼 수 있다. MSG는 가급적 쓰지 않는다. 재료만 좋으면 조미료가 필요 없다는 그의 원칙 앞에, MSG 유·무해 논쟁은 불필요하다. 과일은 친환경으로 자란 것을 고집하고, 쌀도 유기농 쌀을 고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품종과 도정 날짜까지 살핀다. 닭은 주로 토종닭을 이용한다. 그에 의하면, 토종닭이 질기다는 편견은 대부분 고기로서 가치가 떨어지는 폐계를 먹어서 생겨난 것이라 한다. 적당히 키운 토종닭은 질기기는커녕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란다.

이런 그가, 고추장과 케첩에 설탕까지 섞어 매콤달콤 자극적인 양념치킨 소스를 만들기도 한다. 물론 딸을 위해서다. 뿐인가. 밥에 든 콩이 싫다고 발라내는 딸을 보며, 먹지 않아도 젓가락질 연습에 효과만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긍정론을 펼치기도 한다. 구분하기 힘든 멸치와 솔치를 구분하며 솔치볶음을 거부하는 딸의 편식을 혼내기보다, 그 관찰력을 높이 사며 즐거워하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이 글은 우리 부부 품에 찾아와 준 외동딸 윤희를 키우며 조금씩 써내려간 아빠의 육아 일기이자, 윤희의 성장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근사한 식탁 이야기는 맛깔스러운 고명일 뿐, 이 한 권의 책은 딸을 향한 사랑을 가득 담은 아빠의 육아일기이자 아이의 성장일기이다. 또한, 육아를 하며 부모 또한 제자리에 있었을 리 없다. 이 책은 결국 가족 모두의 성장기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언젠가 성인이 된 딸과 술 한 잔 하는 날을 학수고대하기도 하고, 쑥쑥 커버리는 딸의 성장이 조금은 아쉬워 그 속도가 너무 빠르진 않기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딸은 쑥쑥 자란다. 아빠와 함께 처음 야구장에 갔던 딸은, 이제 아빠보다는 친구들과 야구장에 가길 좋아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내가 아버지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멀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면 안 된다고. 내가 해야 할 것은 그 사이사이의 추억을 만드는 것이라고. 아버지가 나에게 만들어주셨던 추억처럼. 아직 만들 추억도 많고 만들 밥도 많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니 저자의 딸인 윤희, 애칭 '김윤'은 마치 내가 아는 아이인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나이기도 하고, 동생이기도, 엄마이기도 하다. 이건 모든 가족, 아니 식구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매일 밥 같이 먹는 사이'라니, 이렇게 농밀한 사이가 또 어디 있을까.

친구들이 윤희에게 아빠랑 어떻게 그리 친하냐고 묻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그러자 윤희가 고민할 것도 없이 말했다.
"매일 밥 같이 먹는 사이라서 그래."


아련한 추억에 한껏 젖어드는 것도 기쁘지만, 책을 보며 실용적인 요리 팁을 건지는 재미도 쏠쏠하다.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참기름은 불포화지방산이 많은 기름이라 가능하면 열과 멀리하는 게 좋고, 카레를 할 때는 안심보다 지방의 고소하고 기름진 맛을 느낄 수 있는 항정살이 좋다고 한다. 김치를 볶거나 고기를 양념에 잴 때 멸치액젓으로 감칠맛을 더하는 것도 그의 한 수. 내게 생소한 굴비김치찌개는 밥도둑 계의 일인자라고 하니, 꼭 해 볼 일이다.

또한, 식품 MD로서 저자가 가장 판매하기 싫은 제품이 건강보조식품이고, 그 중 특히 싫은 것이 콜라겐 보조제라고 한다. 콜라겐은 체내에서 스스로 합성되므로 굳이 보조식품을 따로 먹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한다. 유용한 정보 같아서 공유하고 싶다.

저자는 '그러면 된 거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하루하루 딸에게 맛있는 밥상을 차려줄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그러면 된 거다, 라고. 매사에 안달복달하는 나로서는 입에 잘 붙지 않는 말이지만, 가끔은 따라해 봐야겠다. 특히 오랜만에 식구끼리 모여 북적북적 번잡할 명절에는 뭔가 못마땅한 일이 있어도, 그러면 된 거다, 라고. 이렇게 우리 모두 모여 식사한 끼 할 수 있으면, 그러면 된 거다, 라고.


딸에게 차려주는 식탁 - 어른이 되어서도 너를 지켜줄 가장 따뜻하고 든든한 기억

김진영 지음, 인플루엔셜(주)(2017)


태그:#딸에게 차려주는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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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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