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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물리적 공간을 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이 침식해 들어간다. 분명 어제까지 문을 열고 영업하던 가게가, 오가며 인사하던 이웃이 오늘은 없다. 누군가의 삶을 터전을 앗아가는 '젠트리피케이션'은 서울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사회 현상이자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자본의 물리적 침범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삶과 추억을 앗아간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와 <대리사회>를 쓴 김민섭 작가가 작년 9월에 펴낸 <아무튼, 망원동>은 보이지 않는 괴물, '젠트리피케이션'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이렇게 싸워보면 어떨까?'라고 작은 희망을 주는 책이다.

김민섭 작가 <아무튼, 망원동> 표지
 김민섭 작가 <아무튼, 망원동> 표지
ⓒ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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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로 분류된 이 책은 한 사람의 추억과 경험이라는 개인 서사가 주를 이루지만 도시의 기록물로서도, 문화인류학의 측면에서도 매우 가치 있는 책이다. 한 공간의 사라져버린 풍경과 그 변화의 과정 그리고 그 원인 등을 한 개인의 기억을 통해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망원동이라는 명칭보다 '망리단길'로 불리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김 작가는 젠트리피케이션이 한창인 현재의 망원동에서 큰 수해가 났던 1984년의 망원동까지 시간의 역순으로 공간의 역사를 재생해 낸다.  

이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프롤로그로 시작해 2017년, 2016년, 2010년...1984년까지 작가가 태어난 이듬해까지 특정 연도별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작가 개인에게, 혹은 도시의 일부인 망원동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예를 들면 1984년은 망원동이 침수 피해를 입은 해이고 2016년은 진학과 취업으로 망원동을 떠났던 저자가 다시 고향인 망원동으로 돌아온 해이다.

<아무튼, 망원동>은 한 개인의 서사를 통해 망원동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일어난 사건과 현상이 한 개인의 삶과 동네라는 물리적 공간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1990년대 초반, 성산동과 망원동의 여름은 평범하지 않았다. 봄이 지나고 초여름만 돼도 거리에 마치 새떼처럼 날아다니는 것이 있었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을 점령한 그것은 다름 아닌 '파리'였다. 초파리, 쇠파리, 청파리, 왕파리 등 정말이지 온갖 종류의 파리를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랐다. 아마 난지도에서 날아왔을 것이다." - <아무튼, 망원동>, 69쪽

지금이야 수많은 맛집들이 포진한 망원동의 옛 풍경이 이랬을 거라고는 이곳을 찾는 요즘 세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1993년, 난지도는 제 몸집보다 많은 서울의 모든 쓰레기를 받아들이고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그 후 월드컵을 개최한다며 쓰레기를 덮어 공원을 만들고, 축구장과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한참을 방치되어 있었다. 난지도는 잊힌, 어쩌면 잊혀야 할 공간이었다. 연기, 냄새, 파리, 그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증폭된 혐오감이었다." - <아무튼, 망원동>, 75쪽

1978년부터 15년 동안 서울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모두 난지도에 파묻혔다. 난지도는 하늘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세탁을 한 후 젊은 세대한테 인기 있는 여가의 장으로 거듭났다. 텐트를 치고 고기를 굽는 당신의 발아래에 '8톤 트럭 1300만대' 분의 쓰레기가 묻혀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김 작가는 기존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 속에 어떤 부조리가 있었는지도 깨닫게 해준다.

"90년대의 국민학교는 직원을 뽑아 인건비를 지급하며 진행해야 할 일들을, 학교 예산으로 마련해야 할 물품의 구매를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상당 부분 전가했다. 이러한 헌신의 착취가 오랫동안 이루어져 왔다. 지금도 여전히 초등학교에서는 어머니들이 순번을 정해 배식을 하고, 신호등 앞에서 교통지도를 하는 데 동원된다." - <아무튼, 망원동>, 98쪽

"국민학교는 그 이름처럼, 그 시절 '국민 동원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학생과 학부모를 크고 작은 노동에 동원하고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정의 자원을 여러 방식으로 수거하기도 했다. 매달 '폐품의 날'이 정해져 있었는데 그날이 되면 학생들은 신문이나 박스 같은 폐를 들고 학교에 갔다. 적어도 2kg 이상 가져와야 한다는 매뉴얼이 있었다." - <아무튼, 망원동>, 100쪽

이와 같은 부조리는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이유에 대해 유려한 언변으로 풀어놓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내 능력은 너무 부족하다. 대신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내비쳤던 저자의 바람에 응하는 것으로 이 글의 끝을 맺고자 한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이 누군가에게 당신만의 소중한 공간에 관한 서사를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당신은 도시를 온전한 자신의 고향으로 기억하는 1세대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과 추억들은 모두 하나의 기록과 역사가 되고, 그 공간을 조금 더 연속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가 그랬듯 당신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마을과 도시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아무튼, 망원동> 122쪽, 123쪽

누군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고작 십년 밖에 살지 않은 서울 외곽의 한 동네 이름을 댈 것이다. 정확히 열한 살부터 스무 살까지 나의 십대를 보냈던 그 동네는 내 삶에서 큰 비중으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 그곳은 '도시재생' 사업으로 여러 의미에서 뜨겁다고 한다. 훗날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작별의 안녕'이 아닌 '반가움의 안녕'으로 동네를 마주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아무튼, 망원동 - 어린 나는 그곳을 여권도 없이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김민섭 지음, 제철소(2017)


태그:#망원동, #젠트리피케이션, #김민섭, #아무튼 망원동,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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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차 영상번역작가. 인터뷰를 번역하는 것도 쓰는 것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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