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세계의 젊은 작가들, 평창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다> 국제인문포럼에서는 세계 문학의 미래를 맡게 될 젊은 유망 작가들을 초청하여 우정과 연대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국내외 참여 작가들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포함한 우리 삶의 전 방면에 걸친 다양한 종류의 억압과 분쟁, 그로 인한 고통을 문학을 매개로 조망한 후 이러한 시대에서 ‘평화’의 가치를 논합니다. 여성 분야 기고글로 소설가 김숨 작가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말]
1. 돌아오지 않는 여자들

이효재, 윤정옥, 신혜수 정대협 상임대표.
 이효재, 윤정옥, 신혜수 정대협 상임대표.
ⓒ 이명옥

관련사진보기


2017년 11월 3일 일본군'위안부' 연구회 주관으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윤정옥 교수가 깜짝 등장했다. 1988년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그녀는 1925년 생으로, 위안부 실체를 밝히고 평생을 위안부 문제 해결에 헌신했다(그녀는 1990년 11월 16일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남자들은 돌아왔는데 여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그녀가 말하는 여자들은 어떤 여자들인가.
여자들은 어째서 돌아오지 않았나.  

위의 두 질문보다 앞서, 그 여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떠난 걸까.

그녀도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하는 여자들 중 하나가 될 뻔했다.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학교 측의 강요로 정신대 자원서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권유로 학교를 자퇴하고 금강산으로 피신해 정신대로 동원되는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일제는 조선여성들을 강제징발,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로 삼았다. 일본 후생성은 1944년 8월 23일 <여자정신대근무령>을 공포하고 12세에서 40세까지의 조선여성을 강제징집했다. 노동력을 착취당한 근로대로 동원된 여성들 중 다수는 위안부가 되었다. 근로 정신대는 일본과 조선의 군수 공장과 방직 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렸다.)

문필기, 이효순, 최금선, 이기정. 그녀들의 공통점은 윤정옥 교수와 같은 1925년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들에게는 윤정옥 교수에게는 없는 그녀들만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녀들 모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윤정옥 교수는 해방 후 일본군'위안부'가 되었던 여성들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에 강제 연행된 남성들이 속속 귀환하던 당시, 여성들의 귀환 소식을 찾을 수 없었던 윤정옥은 스스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이후 거의 평생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운동에 헌신한다.

우리나라는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다. 1932년 상하이에 처음 위안소를 설치한 일본군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말부터는 대대적으로 위안부를 모집하고 점령지 곳곳에 위안소를 설치한다.

일본군대의 위안소가 세워진 지역은 '일본군이 주둔했던 모든 곳'이라고 말해진다. 본연구회에서 조사한 전위안부들이 있었던 지역도 일본본토와 대만, 조선 등의 식민지를 포함하여 중국, 만주, 남양군도 등 일본군의 점령지 구석구석에까지 퍼져 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한 지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군대의 이동에 따라, 또는 개인적 사정에 따라 여러 지역을 이동했다.

일본군'위안부'는 8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중 살아 돌아온 일본군'위안부'는 2만 명으로 추정된다. 6만 명에서 18만 명의 여자들은, 윤정옥 교수의 말처럼 돌아오지 못했다.

2. 그녀들은 누구의 딸들인가

"열세 살 때(1940년) 어린 여자와 처녀들을 또 잡으러 왔다는 소문이 들려 쌀뒤주 안에 숨기 시작했다. 마산 완월동에 있는 애들이 많이 잡혀서 만주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났다. 그때 아버지가 완월동과 자산동 친구들을 만나보니 딸들을 많이 시집보냈다고 하시면서 일본 사람들이 호적을 보고 시집만 갔다고 하면 안 잡아간다고 했다. 시집을 가면 안 잡아간다고 해서 당시에 여자들은 영감한테도 시집가고 병신한테도 시집갔다고 했다." - 일본군'위안부' 강무자 증언

"만 열다섯 살인 1939년, 추석을 지낸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엄마와 함께 목화를 따는데, 작은 군용차를 타고 빨간 완장을 찬 일본 헌병 4명이 나타났다. (…) 엄마가 헌병 다리를 붙들고 '우리 애기를 데리고 가려면 날 죽여 놓고 가라'고 하자, 헌병은 다리로 엄마를 내리찍었다. 엄마는 밭을 구르면서 휘뜩 자빠지셨고,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 일본군'위안부' 진경팽 증언

"열여섯 살 때였다. 1932년이었을 것이다. (…) 초가을쯤 되는 어느 날 물동이를 이고 집에서 떨어져 있는 동네 우물로 나갔다. 갑자기 누가 뒤에서 내 어깨를 낚아채었다. 물동이는 내동댕이쳐졌고 나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 일본군'위안부' 최일례 증언

위의 증언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의 절대 다수가 10대였으며, 강제연행의 형태로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군'위안부'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는 모두 19명의 증언이 실려 있다. 그녀들 대부분은 폭력(3명), 취업사기(13명,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 일본에 가면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유괴납치(2명), 팔림(1), 기타(1명)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두 명의 경우 각기 두 번의 다른 연행과정을 겪어 전체 합계가 21명이 되었다고 증언집 해설에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몸이 아파서 일을 못했기 때문에 경찰서 옆에서 어머니가 야채를 파는 작은 가게를 했다. 가정 상황이 어려워서 학교는 못 다녔다." - 일본군'위안부' 오오목 증언

"아버지는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었고 집안살림이 어려웠다. 학비를 낼 형편도 못 되어 학교 입학을 미루다가 열두 살에 보통 학교에 들어갔다." - 일본군'위안부' 하순녀 증언

"여덟 살부터 남의집살이를 했다." - 일본군'위안부' 이용녀 증언

영화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 스틸 이미지
 영화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 스틸 이미지
ⓒ 커넥트 픽쳐스

관련사진보기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여성 다수는 소작농이거나 잡역, 보따리 장사를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식모살이를 하거나, 공장에 다니거나 친척집에 얹혀사는 절대 빈곤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일본군'위안부'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이 담긴 <빨간 기와집>을 쓴 가와다 후미코. 어린 시절 자신의 집도 가난했지만 배봉기 할머니가 겪은 가난은 '질'이 달랐다는 고백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1945년생인 일본작가 가와다 후미코는 1977년부터, 1991년까지 배봉기 할머니와 교류하며 증언을 이끌어냈다).

배봉기 할머니는 1975년 10월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최초로 밝혔다. 1972년 오키나와가 미군 점령에서 벗어나 일본 영토로 복귀될 때 무국적자로 강제 퇴거 대상이 되었다. 특별체류허가서를 받기 위해 출입국사무소의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위안부'였음이 드러났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지 않고 계속 살아가기 위해 '위안부'였음을 밝혔다.

3. 여성의 성을 욕망하는 자들

당시에는 위안소라는 명칭만으로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 상상하지 못했다. 피해자들을 속인 말도 '군인을 위안한다, 위문한다'는 말이어서 그것이 많은 수의 남자를 상대로 성폭력을 당하는 일이라고 알아챈 여성은 없었다.

"여자 한 명이 하루에 일본 군인들을 20명에서 30명까지 상대해야 했다. 워낙 변변히 먹은 것이 없어 몸이 약할 대로 약해진 여자들이 그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나면 반쯤 죽은 상태가 되었다." - 일본군'위안부' 이옥분 증언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교대로 밥을 먹고 나면 아홉 시쯤부터 군인들이 줄을 서서 오기 시작했다. 저녁 여섯 시 이후부터는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왔고, 자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평균 30~40명이 와서 잠도 못 잘 정도로 바빴다." - 일본군'위안부' 김덕진 증언

전쟁시 성폭력은 계획적으로, 집단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일본군'위안부'의 경우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극단적이고 유례없는 성폭력의 예다. 피해자 대부분이 식민지 지배에 놓인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라는 점에서 '계급 문제'도 얽혀 있다. 8만에서 20만에 이르는 조선여성들이 군위안부가 되어 성폭력에 무방비하게 놓이는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그 여성들이 식민 지배를 받는 국가의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전쟁과 여성의 성, 전장에서의 성매매는 역사적으로 그 유래가 싶다. 매춘의 국가 통제는 유럽에서 프랑스혁명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성병이 군대 내에서 만연하자 국가가 매춘을 통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병사들에게 매춘부와 접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병'을 예방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798년 파리에서는 의사가 매춘부를 검진한 뒤 성병 감염 사실을 경찰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고, 1802년에는 진료소가 생겨났으며, 경찰은 모든 매춘부들의 등록을 개시했다.

일본군'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여자들은 성폭력에만 노출된 것이 아니다. 그녀들은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여성의 일이라고 분류되어 온 일들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돌격하러 가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군인들의 군복을 빨았다. 군복에 말라붙은 핏자국은 계곡에서 손이 아플 정도로 문질러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 일본군'위안부' 배봉기 증언

"죽은 군인들의 장례식에 까만 모자와 기모노를 입고 참석했다. 전쟁터에서 상처입고 돌아온 부상병들의 피도 닦아주었다." - 일본군'위안부' 최일례 증언

4. 돌아온 여자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최초로 공개 증언에 나섰던 김학순 할머니. 할머니는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최초로 공개 증언에 나섰던 김학순 할머니. 할머니는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 MBC-TV <시사 2580>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1991년 8월 14일은 김학순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통해 (국내에서) 최초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국제 사회에 알렸다. 전쟁시 제국의 군인들로부터 당한 성폭력을 고발하며, 성폭력이 다수의 식민지 지배 여성을 대상으로 행해진 반인륜적 범죄이자 전쟁범죄임을 증언했다. 

그녀의 증언 이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음을 밝히며 등록한 이는 모두 238명이다. 나머지 다수의 피해자는 끝까지 숨긴 채 살 세상을 떠났거나, 숨긴 채 살아가고 있다. 돌아온 여자들, 살아 돌아온 여자들의 이후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녀들 대개는 위안소에서 얻은 성병을 앓거나, 자궁이 드러내져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불임의 몸이 되어 있었다. 남자라면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을 만큼 남성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과 혐오에 시달렸다.

유교 문화로부터 고착된 뿌리 깊은 순결이데올로기는 일본군'위안부'들에게 '더렵혀진 여자'라는 죄의식을 심어주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피해자임을 숨기고 수십 년 동안 침묵하게 했다. 수치심과 자격지심, 가까운 사람들의 몰이해는 위안소에서 왜곡된 그녀들의 삶을 또 한 번 왜곡했다.

"동네에서 다시 정신대를 모집한다는 소리를 듣고 놀래서 어머니가 옆집에서 하숙하고 있는 남자하고 결혼을 시켜버렸다. 치료가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결혼을 해버려 병이 다 낫지를 않았던 모양이었다. 몇 개월을 살았는데 내가 매독균을 옮겨줬다고 남편이 나를 때리며 내쫓았다." - 일본군'위안부' 최명순 증언

"제대로 시집가서 사는 건 생각도 못했다. 1․4후퇴 때 청주에서 17년 연상의 할아버지를 만나 동거인으로 살았다. 남자가 싫어서 별로 의가 좋지 않았다. 자식은 물론 낳을 수 없었다." - 일본군'위안부' 이용녀 증언

현재 생존해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33명이다. 그녀들의 평균 연령은 90.2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들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그녀들이 한 명도 남지 않는 이후에도 그녀들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구 어딘가에서.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명인 김복동 할머니가 베트남 여성들에게 보내는 사죄의 글 중 일부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여러분들 앞에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말이 생각이 안 나요. 각 나라에서 전쟁이 없어야 하는데 서로가 전쟁을 하는 사태에서 과거에 당했던 분들께 너무나 미안하고. (…) 우리들은 이미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지만, 앞으로 커가는 후손들과 어린아이들에겐 절대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니, 각 국 나라들도 전쟁 없는 나라가 되도록 열심히 힘을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작가 소개]
김숨 작가는 1974년에 태어났다.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가,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간과 쓸개> <국수>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 <당신의 신>, 장편소설 <철>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바느질하는 여자> <L의 운동화> <한 명> 등이 있다.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 이호철통일로문학상 특별상, 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이나영,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역사와 2015 한일 합의의 문제점', <2015 '위안부' 합의 이대로는 안 된다>, 경인문화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울, 1993년
번 벌로·보니 벌로, <매춘의 역사>, 서석연·박종만 옮김, 까치, 1992년
캐슬린 배리, <섹슈얼리티의 매춘화>, 정금나·김은정 옮김, 삼인, 2002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강정숙, <일본군'위안부' 알고 있나요?>



태그:#위안부, #일본군위안부, #김숨, #세계작가대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