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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면 보도연맹원 50명을 살려준 김노헌
 용산면 보도연맹원 50명을 살려준 김노헌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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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집집마다 다니며 닭 얻어 와라." 김노헌은 집에 오자마자 일꾼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집에서 키우던 닭과 마을을 다니며 빌려 온 닭이 모두 19마리였다. 김노헌 처 김춘옥(당시 26세)에게 "빨리 닭을 삶아 술안주로 갖고 오시오"라고 했다. 김춘옥은 당황해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만주에서 살다가 남편을 만나 해방되던 해 21세에 김노헌과 결혼했다. 그런데 김노헌은 초혼이 아니었다. 즉 후처로 들어온 것이다. 남편은 충북 영동군 용산면의 대표적인 유지로, 지주이면서 양조장을 경영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김춘옥은 결혼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았던 것이다. 밥이며 설거지, 빨래조차 자신의 손으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닭을 잡으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런데 하늘같은 남편이 경찰과 군인들을 우르르 데리고 와 다급한 목소리로 닭을 잡아 갖고 오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닭 모가지를 비틀었다. 그리고 식칼로 닭 목을 찔러 피를 뺐다. 일꾼들이 마을 집집마다 다니며 닭을 빌리러 간 사이에 가마솥에 물을 한가득 부어 장작불을 지폈다. 가마솥에서 기차소리가 나자 그녀는 닭을 가마솥에 넣었다. 잠시 후에 삶은 닭을 쟁반에 담아 안방으로 들어가자 군인과 경찰들은 벌써 김치로 몇 잔을 들이켜 얼굴이 불콰해졌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술판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술이야 주인 양반이 양조장을 하니 무궁무진했고, 안주는 김춘옥이 밤새 마련해 안방으로 들여보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닭 뿐 아니라 밥과 국수 등 식사도 준비했다. 새벽녘이 되자 경찰과 군인들은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 되었다. 하나 둘 잠이 들더니 모두가 잠에 흠뻑 빠졌다.

드라이버로 가마니창고 문을 열다

용산면 보도연맹원들이 구금되었던 가마니창고 터
 용산면 보도연맹원들이 구금되었던 가마니창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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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군인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한 김노헌(당시 39세)은 가마니창고로 뛰어갔다. 창고 열쇠는 군인들이 갖고 있어 드라이버로 자물통과 연결된 경첩을 분해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경첩을 분해한 그는 창고 문을 활짝 열었다. "모두들 빨리 도망가게. 여기 있다가는 모두 끌려가서 죽어. 개죽음을 당한단 말이야!"

가마니 창고 안에 갇혀 있던 용산면 보도연맹원 50명은 기겁을 했다. 전쟁 직후 보도연맹원 소집이 있어 아무런 의심 없이 지서로 왔었다. 그런데 용산지서 경찰들이 가마니창고에 밀어 넣었던 것이다. 창고 안은 깜깜했고 비좁은 공간에서 50명이 갇혀 있으려니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땀은 삐질삐질 흐르고 숨은 턱에 차고, 불안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창고 문이 열리더니 김노헌씨가 "빨리 도망가라"고 하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는 창고 창문을 뜯어 놓고 출입문은 다시 못으로 박았다. 보도연맹원들이 창문으로 탈출한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새벽이 되어 군인과 경찰들이 하나 둘 잠에 깨어 일어났다. 이들은 이윽고 가마니창고로 갔다. 연행책임자인 CIC 영동분견대원은 깜짝 놀랐다. 보도연맹원들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김노헌은 허겁지겁 뛰어 와 특무대원에게 "창문을 통해 모두 도망갔나 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용산면 보도연맹원들을 영동경찰서로 끌고 가려고 했던 이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도망간 보도연맹원들을 다시 잡아들일 수는 없었다. 군인과 경찰들은 지서별로 예비검속 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한 후 후퇴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이들은 "에잇!"하며 트럭에 올라 타 영동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동생,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살려야 하네"

6.25가 터진 후 영동경찰서는 1950년 7월 초부터 보도연맹원들을 지서로 연행해, 영동경찰서로 이송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예비검속 된 보도연맹원들은 유치장에 며칠 구금된 후 상촌면 고자리, 영동읍 어서실과 석쟁이재에서 학살되었다.

용산면에서는 모두 3차례의 예비검속이 실시되었다. 1차로 연행된 6명은 군인들에게 넘겨져 옥천군 청산면 샘티재에서 처형되었다. 2차로 연행된 10명은 어서실과 석쟁이재에서 처형되었다. 3차로 50명이 연행되어 가마니창고에 구금되었다. 연행된 보도연맹원들은 "아무 일 없겠거니" 하는 심정이었지만 마음은 초조했다. 먼저 소집되어 간 동료들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노헌은 지서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서장 옆으로 간 김노헌은 목소리를 낮춰 "동생,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살려야 하네"라고 이야기했다. 백남길 지서장은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다. 이미 두 차례 소집된 관내 보도연맹원들이 죽었을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의 부탁인가? 김노헌과는 평소에 '형님 동생' 하는 관계이고, 영동군에서 군수나 경찰서장이 용산면에 오면 대접을 도맡아하는 지역 유지였던 것이다. 지서장 또한 보도연맹원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있던 찰나에 김노헌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동생 이번에 보도연맹원들을 죽여서는 안 되네. 꼭 살려야 돼."
"알았습니다. 형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즉 김노헌이 어떻게 하더라도 눈감아주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밀약(密約)을 한 후 잠시 후 트럭이 들이닥쳤다. 1950년 7월 16~18일경이었다.

"영동사람 모두 알아요"

닭 19마리를 잡은 김춘옥
 닭 19마리를 잡은 김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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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과 경찰들이 지서로 들이 닥치자 김노헌은 책임자에게 다가갔다. "아 젊은 분들이 고생이 많은데, 저희 집으로 가서 목이나 시원하게 축이시죠" 평소에 안면이 있는 그가 이렇게 얘기하니,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들 일행은 김노헌을 따라가 그의 안방에서 밤새도록 술과 씨름했다.

당시 새댁이었던 김춘옥(영동군 용산면)은 2018년 현재 94세이다. 90대 중반의 나이에도 허리는 꼿꼿하고 기억력도 또렷했다. 당시 상황을 물으니, 어제 일처럼 술술 이야기했다.

"그때 닭 잡느라 혼났어요. 그때까지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았던 내가, 닭 19마리를 잡았어요."

그녀의 주름진 미소에는 당시 남편의 뜻에 따라 보도연맹원들을 살려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에 대한 자긍심이 있는 듯 했다. 용산면소재지에서 만난 김동화(90세. 영동군 용산면)씨도 김노헌씨가 한 의로운 일을 "영동 사람들 모두 알아요"라고 답변한다.

또한 당시 가마니창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재환(98세. 용산면 구촌리)옹은 "김노헌씨 때문에 모두 살아났어요. 전쟁 후에 많은 이들이 김노헌씨한테 고맙다고 인사했어요"라고 한다.

광기의 시대, 죽음의 시대에 생명의 빛이 영동군 용산면에 비쳤다. 상부의 명령이라는 명분으로 아무런 의문이나 주저함 없이 보도연맹원을 학살하는 분위기에서, 목숨을 걸고 이들을 살려주려고 한 이들이 있다. 역사가 이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영동군 용산면 김노헌과 김춘옥, 그리고 지서장 백남길.....

가마니창고에서 살아난 김재환
 가마니창고에서 살아난 김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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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노헌, #양조장, #용산면 보도연맹원, #감바니창고, #김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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