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십자가 세워진 광화문광장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석한 가운데 오는 16일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미사'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13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무대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십자가 ⓒ 권우성


상당히 오랜 시간 과격한 무신론자로 살아왔다. 종교에 별다른 감정이 없는 지금과 달리 지나가다 십자가만 보아도 눈을 흘길 정도로 반발심이 강하던 때였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낡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성경 속 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이 끔찍해 견딜 수 없을 지경인데 하나님만 믿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들이 꼴사나웠다.

선한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이 쓰러져 가는 시대에 도대체 신이 신앙의 대가로 무엇을 주었단 말인가. 어린 시절 친한 친구의 손에 붙들려 교회에 나가곤 했다. 나는 신이 인간에게 들게 했다는 시험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돈이 필요하다고 기도했다. 나는 돈이 좋다고 그랬다. 그러자 하루는 유복해 보이는 중년의 신자가 내게 만원을 쥐어주며 다음주에도 나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길로 나는 다시는 그 곳을 찾지 않았다.

내가 종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와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군대에 있던 시절이었다. 녹록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최악인 때였다. 입대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문제가 터졌다. 나 같은 사람들이 으레 거치듯 온갖 상담과 재활 캠프를 돌아다녔다.

그러던 하루는 군종 목사와 면담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어이가 없었다. 나는 초반부터 대놓고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년 시절에 따돌림을 겪었던 일이나 경제난으로 집안이 휘청했던 일, 군대라는 폭력적인 공간에서 수난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아마 내가 성소수자라는 것도 밝혔던 것 같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신은 어딨냐고. 이렇게 끔찍한 순간이 이어지는 동안 뭘 했냐고. 솔직히 나는 그가 욕이라도 하거나 상담을 포기하길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목사의 입에선 내 예상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 이곳을 나가면 너는 만나야 할 사람도 많을 거고 해야 할 일도 많을 거야, 이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야."

그리고 오랜 시간, 나는 그 목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진 십자가

 영화 <아뉴스 데이>

영화 <아뉴스 데이> ⓒ 찬란


사람들을 보살펴야 할 절대자가 존재도 하지 않거나 혹은 우리를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을 종교인들도 때로는 받는 모양이다. 다만 나의 경우 분노를 하지만 그들은 회의를 한다.

영화 <아뉴스 데이>에서 수녀인 마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을 가지면 처음에는 아버지의 손을 잡은 어린 아이처럼 안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아버지의 손을 놓치는 순간은 분명 온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긿을 잃고 소리쳐 울지만 누구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대비를 해도 가슴을 정통으로 맞게 되는 때가 틀림없이 다가온다. 마리아 수녀는 그것이 우리들이 진 십자가라고 설명한다. 종교의 언어로 삶을 이렇게 간결하지만 아름답게 표현한 말을 나는 만나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질문도 들었다. 고행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영화의 초반 장면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아뉴스 데이>는 1945년 폴란드의 한 수녀원을 배경으로 한다.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독일군이 물러난 이 시기, 그 틈을 노린 소련군은 바르샤바로 침투하고 수녀원을 발견한 이들은 집단 성폭행을 저지르고 만다. 그 결과 많은 수의 수녀들이 임신을 하게 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아무런 의료적 지원을 요청하지 못하고 결국 누군가 목숨을 잃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다. 영화는 이런 상황을 견디다 못한 이레나 수녀가 폴란드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의사를 찾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결국 프랑스 적십자에 이르게 되고, 그 곳에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의사 마틸드를 만나게 된다.

기도는 누구에게 응답받는가

처음 마틸드는 도움을 요청하는 이레나를 돌려보낸다. 폴란드 적십자가 있는데 굳이 프랑스인인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는다. 창문 너머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이레나를 본 직후다.

사실 <아뉴스 데이>를 포함해 대부분의 종교를 다룬 영화에선 보통 한 인물이 기도를 하는 장면 직후에는 미동도 않는 십자가나 예수상을 비추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레나 수녀의 기도는 마틸다에 의해 발견되고 이는 그녀가 마음을 고쳐먹는 계기가 된다. 이후로 마틸다는 소련군에게 성폭력을 당할 위기를 겪고 상관으로 부터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협박을 받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수녀들을 진료하고 또 다른 외부의 위협으로 부터 그들을 지켜내기도 한다.

마틸다가 신을 대신해 인간의 손으로 수녀들을 돌보는 존재라면 또 다른 중심 인물인 수녀원장은 대척점에 서있는 캐릭터라고 할 만하다. 그녀는 수녀원을 지켜야 한다며 막중한 책임감을 보이지만 알 수 없는 신의 뜻에 따르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만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 수녀는 아이를 가져선 안 되기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하나님의 의지에 맡기겠다며 한 겨울의 벌판에 내버려 둔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원장 수녀는 수녀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가능성을 막은 것도, 갓난 아이들을 사실상 죽음 속에 방치한 것도 모두 자신의 손이 한 일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그녀는 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또다른 고난에 빠트리며 신처럼 행동했을 뿐이었다.

 영화 <아뉴스 데이>

ⓒ 찬란


신의 얼굴을 한 사람들

가끔 생각하곤 한다. 예수는 왜 굳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야 했을까. 신이 전지전능 하다면 굳이 육체를 빌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스스로가 생각하는 옳은 바는 얼마든지 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다 나는 문득 어쩌면 그런 방법을 통해 신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채찍을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못이 박히면 피가 나는 몸을 가진 인간이 지상에서 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고난과 고행 속에서도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천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뉴스 데이>에서 마틸다가 했던 일이다. 또한 원장 수녀가 끝끝내 하지 못한 행동이기도 하다.

종교가 생긴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신의 뜻을 참칭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이를 통해 혐오를 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수 민족, 성소수자, 정치적 약자와 같은 소수자들을 박해하고 존재를 지우려고 한다. 반면 그 맞은 편에는 가뜩이나 더 어려운 삶 속에서 풍파에 휩쓸린 약자들을 보듬고, 다독이고,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나는 이 세상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신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작고 고운 손으로 세상을 점진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사람들. 순간순간의 선행으로 누군가가 무너지려는 때마다 그들을 붙드는 사람들. 혐오 받는 이들을 보듬고, 사랑으로 감싸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드는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의 얼굴에서 신의 흔적을 느낀다. 구원은 인간인 그들의 손으로 부터 나온다.

<아뉴스 데이>의 마지막, 마리아 수녀는 마틸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는다. '난 주님이 당신을 보낸 거라 믿어요'. 나는 그렇게 신의 선한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의존해 왔고 그래서 견딜 수 있었다. 어쩌면 군대에 있던 시절, 군종 목사는 내가 그런 인간이 되기를 요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뉴스 데이 종교 소수자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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