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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건 다 뭐니?"
"응, 버릴 거."

어쩐 일로 방 청소를 한다 싶더니 아이는 꽤 많은 양의 책들을 방에서 들고 나왔다. 현관 문 안쪽에 수북이 쌓인 책들은 얼핏 보기에도 새 것이 많아 보였다.

"아니, 이건 아예 문제를 풀지도 않았네? 이건 앞에 달랑 몇 장만 연필 자국이 있고, 이건 또......."
"그건 개념만 본 거야. 그리고 그건 지난 거라 지금 볼 수도 없어. 나머지도 다 그래. 그러니까 그냥 버려도 돼."

다 풀지도 않은 문제집을, 그것도 한두 권도 아닌데, 대수롭지 않게 버리려는 아이의 태도에 내 목소리는 한 옥타브쯤 높아졌다.

"얘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제대로 풀지도 못할 문제집은 애초에 왜 사는 건데? 그리고 너한테 필요 없으면 주변에 필요한 친구들한테 주거나 아니면 기를 쓰고 풀어야지. 이런 문제집이 뭐 길거리에서 나누어 주는 전단지냐? 그렇게 버리면 끝이야?"
".......엄마는 또 돈이 아까운 거지? 알았어요. 안 버리면 되잖아."

아이는 금세 뾰로통해지더니 주섬주섬 책을 들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부 하느라 힘들어 하는 아이에게 괜한 말을 했나 싶어 염려가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책에 대한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짐짓 모른 척 하고 있었다.

문득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단발머리 깡충이며 아무 걱정 없던 그때, 아버지께서는 청계천 부근에서 작은 구둣방을 하고 계셨다. 그때만 해도 청계천은 위로는 고가도로가 도로 양쪽은 물론 구석구석까지 갖가지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로 북적거렸다.

그리고 양 옆으로는 헌책방들이 즐비했다. 구두를 만드느라 뭉툭해진 손만큼이나 무뚝뚝했던 아버지는 막내였던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셨다. 삐꺽이는 의자에 앉아 아버지는 구두를 만드셨고 나는 그 옆에 앉아 자투리 가죽으로 소꿉장난을 시간가는 줄 모르곤 했었다.

가끔 아버지는 한가한 오후 시간이면 나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셨다. 산책이라고 해봐야 청계천 주변을 걷는 것이었는데 굼벵이나 지네 같은 것을 파는 약장수를 비롯해 신기한 마술용품, 오래된 골동품을 볼 수 있어 무엇보다 눈이 즐거웠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먹을 것을 파는 가게도 있어 입도 즐거웠고 간혹 장난감 같은 것을 손에 쥘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들르는 곳이 형제책방이었다.

그곳은 무뚝뚝한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 분의 책방으로 가게 안은 물론 밖에까지 헌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곳에 가실 때면 아버지는 막걸리 한 병과 두부 부침 같은 것을 사들고 가셨는데 두 분이 가게 안에서 세상 이야기를 하며 막걸리를 드실 때면 나는 그 곳에 있는 뜻도 모를 책들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러면서 어쩌다 예쁜 공주 그림이나 맛있는 음식이 커다랗게 그려 있는 그림책이라도 찾게 되면 그 책은 내 차지가 되곤 했었다. 그러면 나는 그 책을 벗삼아 그림을 따라 그리기도 하고 나름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한동안 함께 하곤 했었다. 그렇게 해서 책과 나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글을 읽게 되고, 쓰게 되면서부터 형제책방의 출입이 낮아지고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 당시만 해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 넷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다 보니 책을 사는데 돈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교과서나 참고서는 오빠, 언니들의 쓰던 것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소설책은 엄두도 내지 못했었는데 다행히 형제책방에서는 마음대로 책을 볼 수 있었고 가끔씩은 아버지를 졸라 사고 싶은 책을 살 수도 있었다.

또 그때는 과외나 학원 같은 사교육은 제법 있는 집 아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대부분 학교 공부가 전부였기 때문에 시간도 충분했었다. 특히 방학 때가 되면 나는 나름대로 형제책방에 있는 책들을 모두 다 읽겠다는 목표를 정해 놓고 닥치는 대로 읽기도 했다.

아마 고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는 방학을 이용해 50권으로 된, 꽤 두툼한 분량의 한국문학 단편집을 읽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는 정말이지 그냥 닥치는 대로 읽었던 것 같다. 그래도 다 읽고 난 후에는 가슴이 뿌듯했고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그때 만난 이들이 이문열을 비롯해 황석영, 은희경, 박경리 등의 작가들이다. 3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는 지금도 그 때 읽은 글이 생각나는 걸 보면... 그러고 보면 형제책방은 나의 삶에 있어 오랜 세월동안 꽤 많은 부분을 함께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것들을 보이지 않게 채워주어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하지만 그 후로 형제책방에는 자주 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암에 걸려 수술을 하는 바람에 그나마 하던 구둣방을 변두리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 후,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혼자 남으신 아버지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아 구두 만드는 일을 그만두셨다. 그 후에도 가끔 형제책방을 찾아가곤 하셨는데 언젠가부터는 그 분도 가게를 그만 두셨다며 더 이상 찾으시지 않으셨다. 더불어 나도.

몇 년 전, 아이와 함께 청계천으로 나들이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옛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청계천은 서울 시민들의 후식처가 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마음이 허전해 내 눈길은 자꾸 형제책방이 있던 자리를 쫓고 있었다. 마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엄마, 아까 그 문제집들 우리학교 후배들한테 나누어 주기로 했어.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게 할 게. 그러니까 화 풀어요. 응? 아주 엄마가 원하는 대로 손때가 까맣게 묻을 때까지 보고 또 볼게. 응? 응?"
"참, 나. 원......."

어느 틈에 등에 붙어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아이를 보니 어이없는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언젠가 아이와 함께 다시 청계천으로 나들이를 다녀와야겠다. 그곳에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내 삶의 바탕이 되어 주었던 형제책방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내 아버지의 이야기도.


태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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