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잘못 찾아온 작품들이 있다. 분명 같은 겨울이지만 작년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다르다. 그런데 그 시절이 무색하게 새해 극장가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생뚱맞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친다. 바로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와 <코코>가 그 주인공이다. 뒤늦게 찾아온 크리스마스 영화. 그러나 시절을 놓친 크리스마스 대신 각자 다른 매력으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그중에서 11일 개봉한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는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진부한 옛날 이야기 같은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1843)에 작가 찰스 디킨스의 인생이라는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초등 6학년 2학기 국어 '나' 교과서에 실려있다. 아니 교과서에 실리기 이전부터 동화의 세계에 입문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통과 의례'처럼 한 번쯤은 읽어보았던 작품이다. '자린고비'보다 '스크루지'가 더 익숙한 게 사실이었다.

익숙한 <크리스마스 캐럴>, 거기에 투영된 찰스 디킨스의 삶

ⓒ (주)이수C&E


하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이 익숙하다 해서 그 작품의 저자인 찰스 디킨스가 익숙한 건 아니다. 어린 시절 흥부 놀부만큼이나, 개과천선의 대명사로 익숙한 스크루지를 탄생시킨 찰스 디킨스가 그와는 전혀 다른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 <두 도시 이야기>의 작가라는 걸 연관 지어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작가의 생애는 더더욱. 바로 그 지점에서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작품이다.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우리에겐 낯선 인물인 찰스 디킨스의 삶을 거기에 투영시키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작가가 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승화시키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이를 작품으로 만드는 것 역시 역시 생소하지 않다. 그러나 굴곡진 어린 시절을 겪은 찰스 디킨스가 희대의 명작 <크리스마스 캐럴>을 쓰면서 작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영화적 상상력은 그 자체로 작품이 된다. 스크루지를 찾아온 말리의 유령처럼 그의 비밀 서재는 작중 인물들과의 '모의 장소'로, 찰스 디킨스의 '심리 치료 연극 무대'로 바뀐다.

영화는 찰스 디킨스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 등으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그는 미국에서도 환대 받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의 부에 어울리게 끊임없이 더 많은 공사비를 부르는 그의 저택과 그에게 손을 내미는 가계 경제, <올리버 트위스트> 이후 부진했던 그에게 얹힌 새로운 작품에 대한 요구뿐이다. 하지만 서재에 앉은 그는 새로운 작품을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새로 온 하녀의 아일랜드의 옛날 이야기를 듣게 되고 거기서부터 힌트를 얻어 그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착안해 낸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이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크리스마스'에 대한 새로운 시사점을 제시한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겠다고 자신과 이전 작품을 출간했던 출판사에 공표한 찰스 디킨스, 하지만 출판사 관계자들은 부정적이다. 이역만리의 대한민국까지 흥청거리며 축제를 즐기는 크리스마스, 그러나 정작 19세기의 크리스마스는 그저 종교 행사일 뿐이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첫 번째 반전이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새 작품에 대한 열의로 가득찬 찰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꺼리는 출판사와의 계약 대신 빚까지 얻어가며 스스로 작품을 출간하려 한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니까 당연히 크리스마스 시즌 전에 출간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남은 일정은 너무도 빠듯하다. 그때부터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 원맨쇼에 가까운 '산고'를 펼치는 찰스 디킨스의 고난이 시작된다.

찰스 디킨스,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 스크루지와 갈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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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2005), 팀 버튼 감독의 영화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의 이야기>(2007)의 배경과 같은 19세기 영국이다. 영국 제국주의의 자본과 문화를 향유하는 '신사' 계급들이 클럽 등 그들만의 세계를 누리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이제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잔재가 상흔처럼 남아있는 잔혹한 소년 노동의 역사가 항존하는 시대다. 그리고 바로 이 극과 극의 세계에 바로 주인공 찰스 디킨스가 있다.

베스트 셀러 작품으로 인해 프랑스풍의 최신 인테리어로 공사 중인 그의 집이 말해주듯, 그는 영국의 신사가 됐다. 그러나 새로운 작품에 대한 불안함과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축적되지 않은 부로 인해 찰스 디킨스는 '신기루'처럼 흔들린다. 어쩌면 위태로운 현실보다 더 불안한 건, 신사인 척하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 파산한 아버지로 인해 구두약 공장에서 죽은 쥐와 폭력적인 노동을 버텨야 했던 소년 시절의 트라우마다. 그로 인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는 작품을 쓰고 싶었던 찰스 디킨스는 새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촉박한 출간 날짜에 시달리게 된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에게 돈을 주는 대신, 엄청난 고리대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뜯어내는 변호사를 모티브로 스크루지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너그러운 그의 친구와 아픈 아이를 아낌없이 사랑하는 여동생 내외, 우연히 마주친 인색한 부호의 장례식 등 찰스 디킨스는 현실에서 조우한 인물과 상황을 빚어내 <크리스마스 캐럴>을 써내려 간다. 그 과정은 그 자체로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의 한 관전 포인트가 된다.

이에 덧붙여, 흔히 작가들이 "작품을 쓰는 순간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창작의 비밀'은 이 영화의 주된 갈등 요소이자 매력으로 작용한다. 찰스 디킨스는 쓰려고 하지만, 정작 작품 속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그의 엔딩을 방해한다. 조만간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나이에도 여전히 평행선을 긋는 찰스 디킨스와 그의 아버지의 불화가 소설을 방해한다. 좀 더 솔직하게는, 하루 아침에 신사였던 아버지가 범죄자가 되고 평온한 가정의 맏아들이었던 그가 소년 노동자가 돼야 했던 신분하락의 트라우마가 스크루지에 대한 입체적 서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구두쇠라는 찰스 디킨스의 예단과 그런 작가를 냉소하는 소설 속 주인공 스크루지의 갈등은, 곧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직시하지 못하는, 그래서 그 아픔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찰스의 한계로 귀결된다.

물론 영화는 흔한 가족 영화의 공식, 성장 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불화했던 아버지와 아들은 화해하고 훈훈한 가족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함께한다. 거기엔 자신의 트라우마를 성숙하게 극복해낸 아들이 있다. 당연히 그 화해와 극복에는 작가 찰스 디킨스의 성공적인 작품 <크리스마스 캐럴>이 있다.

찰스 디킨스란 작가의 영업 비밀을 다룬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의 배경은 인터넷을 통해 문화 콘텐츠를 향유하는 21세기와 전혀 다른, 글자 문화의 현장이다. 단 한 편의 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돼 일약 스타덤에 오른 작가, 신상 구두도 아이돌 그룹 팬미팅도 아닌 작가의 새 소설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사람들 그리고 그 작품으로 인해 크리스마스를 전 세계인의 축제로 변모시킨 위대한 예술의 '간증'이다. 물론 그 간증의 일등 공신은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인 찰스 디킨스 역의 배우 댄 스티븐스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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