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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편집자말]
과거사 위원회의 활동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던 2010년 4월, 사무실 전화기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 사무실 아래에 도착했어요. 잠깐 내려와 주실래요?"

한통의 전화를 받고 사무실을 내려갔다. 80cc오토바이를 타고 온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변 조사관님? 전화 드린 김상원이라고 합니다."

그는 작은 종이상자를 들고 있었다.

"일단 어디라도 좀 들어가시죠."

나는 그를 위원회 휴게실로 안내했다. 자리를 안내하고 나서 커피를 가져왔다.

"잘 마실게요."

경상도 억양이 강한 그는 검은 피부에 짧은 목을 가졌다. 한 눈에도 힘이 좋을 것 같았다. 강한 경상도 억양은 그러한 인상을 더욱 짙게 했다.

"좀 전에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위원회는 아무 때나 사건을 신청 받지 않아요. 2005년 11월부터 딱 1년간만 신청을 받았어요. 그 기간 안에 신청하지 않은 사건은 제 아무리 누구라도 조사하지 못해요."

그는 더욱 굳은 표정으로 말을 했다.

"아니, 조사관님 생각해보세요. 매일같이 하루 벌어먹고 사는 우리 같은 시민이 과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압니까?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볼 여유도 없이 사는데 어떻게 아느냐고요. 알았으면 진작 신청을 했죠. 그리고 억울한 사람 구제한다고 해놓고서는 왜 신청기간에 제한을 두느냐 밀입니다. 억울한 일에 기한이 있냐구요. 이래놓고서 무슨 인권기관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흥분할수록 그의 경상도 억양은 더욱 강해졌다.

"네, 그러니까 조사접수는 안 되지만 선생님 사건을 살펴볼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단 조사기록을 두고 가세요. 어떻게든 살펴볼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럼, 조사관님만 믿고 갑니다."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래도 결과에 대해서는 단정하지 못하니 너무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는 마시고요."

그랬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최선'이라는 비겁한 말뿐이었다. 어떤 것도 책임질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가 돌아간 뒤 위원회 법을 다시 살펴보니 '직권조사' 규정이 있었다. 중대한 인권침해가 확인되고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큰 사건에 관해서 위원회의 결정으로 직권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중대한 인권침해',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만한 사건'이라는 단서이다. 이러한 중대함을 결정하는 데는 어떤 기준도 없다. 위원들의 자의적 판단만이 있을 뿐.

일단 조사개시를 결정해야 한다. 다행히 팀장, 국장의 이해와 협조로 조사개시를 상정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상임위원실을 찾아 사건의 전후를 설명하고 조사개시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위원회에 상정하였다.

위원회에서 위원들은 조사개시는 결정할 수 있으나 전원위원회에서의 결정은 무리라고 결론 냈다. 그래도 그것이 어디랴. 조사개시라도 할 수 있으면 모든 조사는 이뤄질 수 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조사개시가 결정되고 나서 신청인 조사를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는 서울 돈암동에 있는 '아주기획'이라는 상호의 간판 제작업체 사장이었다.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아크릴 간판을 제작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요즘은 각 지자체에서 규격화된 작은 간판을 만드는 추세라 동일한 모양으로 가게 간판들을 바꿔달라고 해서 정신없이 일이 밀려들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끝낼 테니."

그가 아크릴을 자르고 전선을 연결해 조명을 설치하는 모습을 보니 위원회에 찾아온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10여분 만에 작업을 끝내고 책상에 앉았다. 나는 그가 작업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한마디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간판 만드는 모습을 보니 사람이 달라 보이던데요. 멋지시네요."
"멋지긴 개뿔이 뭐가 멋집니까. 이 간판질 때문에 죽을 뻔 했는데'

"안기부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나 들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점심 때 짬뽕이 식사로 나왔는데 면만 먹고 국물을 남기면 더 맛있게 먹게 해 준다기에 저는 시키는 대로 국물은 남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때 짬뽕이 식사로 나왔는데 면만 먹고 국물을 남기면 더 맛있게 먹게 해 준다기에 저는 시키는 대로 국물은 남겼습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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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의 가난한 시골집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이 싫어 중학교 때 서울로 도망 왔다. 구두닦이에서부터 신문배달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던 그는 간판 집에서 일을 하며 광고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대인관계도 남달리 좋았던 그는 1982년 한국광고물제작협회 성북구 지회 조직부장을 맡게 되었다.

"1982년에 광고물제작업협회가 만들어지고 나서 간판 하는 사람들끼리 선진기술 배운다고 일본 연수를 간다는 거예요. 마침 일본에 친척도 있고 해서 나도 참가신청을 했죠. 일본 연수 일정 중에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등 외가 식구들을 만나고 귀국을 했어요."

그는 외가 쪽이 혹시나 친북 단체인 조총련 계열이 아닐까 불안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대사관에 연락해 함께 갈 수 있느냐는 부탁을 할 정도였다. 대사관 직원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고 자연스럽게 친척을 만났다. 그들로부터 선물도 받은 뒤 며칠 지나 귀국했다.

"일본 갔다 와서 한 달이나 됐나? 7월인데 남자 몇 명이 저를 데려가는 거예요. 조사할 것이 있다면서 가자고 하길래 순순히 따라갔죠. 남산으로 갔어요. 5국 지하실에 도착하자마자 군복으로 입으라고 하더니 '여기 어딘지 아냐. 지금부터 사실대로 말해야지 숨기면 넌 여기서 살아서 못 나간다'는 협박을 들었어요. 수사관들이 저더러 간첩이라면서, 잠실운동장 옆 한강변에서 찍었던 사진을 들고서는 올림픽경기장을 간첩질 하려고 찍었다고 하는 겁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는 김종○, 이한○, 안영○이라는 이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원하는 진술이 나올 때까지 군용야전침대 옆에 끼우는 각목을 빼서는 인정사정없이 구타를 했다고 한다. 안기부에 끌려간 지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시작된 구타는 9월 중순경 안기부를 나올 때까지 계속 되었다.

"수사관들이 기록을 정리하는 동안에는 원산폭격으로 대기시켜 놓고 이 사람, 저 사람 들어오면 발로 짓이기고 각목으로 구타를 해요. 뭐 그냥 샌드백이 된 기분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점심 때 짬뽕이 식사로 나왔는데 면만 먹고 국물을 남기면 더 맛있게 먹게 해 준다기에 저는 시키는 대로 국물은 남겼습니다. 밥이라도 말아주는 줄 알았죠.

먹으라면 먹고, 먹지 말라고 하면 먹지 않고, 살려주면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곳에 갇힌 사람의 처지입니다. 홍 계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와 '이제 시작하지'라고 하자, 수사관 김종○, 이한○, 안영○ 등이 들어왔어요.

그러고는 10리터짜리 주전자와 수건, 수갑을 가지고 와서 손목을 수건으로 감쌌어요. 그 위에 수갑을 채운 후에 야전침대 각목을 안쪽 팔꿈치와 무릎 사이로 끼워놓고 양쪽 책상에 걸쳐 놓은 후에 천장을 향해 있던 얼굴에 큰 수건을 덮더라고요. 물주전자에 짬뽕 국물을 섞어서 코 주위에 물을 부었어요."

물고문은 자백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끝없는 공포. 오직 상대방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그 고문의 공포를 그에게 심어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고문을 하면서 '니 놈이 살고 니 가족이 여기서 살아 나가려면 니 놈이 우리말을 순순히 듣고 따르는 길밖에 없어. 니가 계속 고집 부리면 차로 갈아서 한강대교 변에 변사체로 처리하면 그만이야. 경찰이 수사나 할 것 같으냐?'는 협박이 이어졌다. 그런 고문이 1시간 정도 이어졌다.

"그렇게 고문을 끝내고 나서 자기 전에 캔 맥주 1개를 갖다 주며 먹으라고 하더군요. 안기부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나들며 살아 나왔지만 나에게는 간첩이라는 단어와 신체 이상만 남았어요. 여기 보세요. 정수리 부분에 뼈가 튀어나왔잖아요."

정말 그의 정수리는 혹이 난 듯 뼈가 튀어 나왔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상처는 또렷하고 선명했다.

"이걸 직접 만들어 길에다 거신 거예요?"

 2013년 서울지법에서의 무죄선고 판결 후 눈물을 흘리는 김상원씨
 2013년 서울지법에서의 무죄선고 판결 후 눈물을 흘리는 김상원씨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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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진술을 토대로 조사를 벌였고, 조사 결과 그가 고문과 협박에 의해 허위 진술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직권조사결정은 기각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위원회의 조사결과보고서를 가지고 법원으로 달려갔다. 2011년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고, 2년 뒤인 2013년 그는 결국 법원으로부터 무죄를 받아냈다.

무죄를 받아내던 날 그는 법정을 나오며 한없이 울었다. 눈물과는 담쌓고 지낼 것 같은 그의 외모와 달리 그는 울고 또 울었다. 그의 형제들도 그를 얼싸안고 울었다.

"아버지가 이걸 보고 돌아가셨어야 하는데, 셋째 아들 죄 없는 거 보고 가셨어야 하는데. 흑흑."

그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어느 날 그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밥 시간도 다 됐는데 뭐해요? 밥이나 먹지. 갑시다. 밥먹으러."

그가 간 곳은 의외로 중국집이었다. 난 짜장면을 먹겠다고 하자 그는 '짬뽕'을 주문했다. 속으로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그는 내내 싱글벙글 하더니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나에게 사진 하나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예천 시골 마을 길가에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1983년 8월 안기부에 끌려가 불법구금과 온갖 구타 및 고문으로 조작하여 간첩으로 누명썼던 암천 김성환의 셋째 김상원이 2013년 12월 3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2형사부에서 재심하여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무죄선고 직후 마을 입구마다 걸었던 현수막. 그는 이렇게라도 자신의 무죄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무죄선고 직후 마을 입구마다 걸었던 현수막. 그는 이렇게라도 자신의 무죄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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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직접 만드셔서 길에다 거신 거예요?"
"그럼, 명색이 간판쟁인데 이 정도야 뭐, 원래는 더 큰 현수막을 걸려고 했는데 봐준 거야. 이런 걸 4군데 걸었어. 동네 들어오는 입구란 입구에는 몽땅 걸었다니까. 하하하."

그도 즐거웠지만 나 역시 통쾌했다.

때마침 텔레비전에 문화융성에 대한 뉴스가 흘러 나왔다.

"저런다고 문화융성이 되나. 나라는 더럽고 냄새나는 것 천지인데. 진짜로 민주주의 사회로 가려면 과거에 잘못된 것들을 싹 다 정리해야 하는데 박근혜는 너무 잘못한 게 많잖아. 그리고는 사과도 없고. 과거 시절에 국민들한테 뺏은 거 싹 다 돌려줘야 나라가 바로 서고 민주주의도 되지 않겠어요?"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때 짬뽕과 짜장면이 나왔다. 그는 식탁에 놓인 짬뽕을 잠깐 동안 바라보다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랑 바꿔 먹을래?"

그날 나는 짬뽕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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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피해자를 지원하는 "지금여기에"라는 단체에서 일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