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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감빵'과 인연이 깊습니다. 학창시절에는 학생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했고, 사회로 나와서는 인권활동가로서 구금시설 인권 향상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가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보고 느낀 점을 담은 '감빵'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서울구치소 앞(자료사진)
 서울구치소 앞(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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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만 알고 살던 내가 인권활동가가 된 것은 전적으로 '감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감방이 맞는 표현이나, 드라마에서 쓰이는 표기 방식대로 감빵이라고 씁니다). 2년 6개월 실형을 사는 동안 '출소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구금시설 처우개선과 수용자 인권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나를 천주교인권위원회로 이끈 계기였다.

인권활동가로 살면서 전국 30여 개 구금시설을 직접 찾아 실태조사를 통해 많은 개선점을 이끌어 냈다고 자부한다. 여전히 감빵은 인권의 사각지대이지만 인권활동가들이 열심히 싸워서 바꿔 내왔다.

그 결실의 혜택을 박근혜, 최순실, 김기춘, 이재용 등 '국정농단'의 주역들이 누리고 있다는 게 얄미울 수도 있지만 인권은 원래 그렇게 모든 사람을 위해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원칙이다.

드라마에서 꼭 못된 수용자들이 교도관을 향해 '인권'을 주장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자칫 '인권'을 오해하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박근혜와 최순실이 인권침해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닮아 있어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이전기사 : <슬빵>이 소름돋는 이유, 왕년 '빵잽이'가 알려드립니다]

사법권력에 맞서던 감빵 안 맹검사

드라마를 보다 보면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극 중에서 서부구치소 방장이었던 명교수(정재성)와 '코걸이' 고박사(정민성) 캐릭터를 합쳐 놓은 것만 같은 사람을 과거에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감빵 유명인사 '맹검사'가 바로 그다.

그는 죄질이 몹시 나쁜 '빵잽이(수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은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척이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아는 척하면서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감빵에서 책을 참 많이 읽었나보다 하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그는 늘 법전을 들고 다녔다. 법령 명칭이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로 바뀌기 전 이름이었던 '행형법'은 물론이고 '교정공무원 예절규정', '교정공무원 인사운영 규칙' 같은 법무부 예규들도 달달 외웠다.

<수감자를 위한 감옥법령집>, 천주교인권위원회 저
 <수감자를 위한 감옥법령집>, 천주교인권위원회 저
ⓒ 천주교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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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출간한 <수용자를 위한 감옥법령집>이 없었기 때문에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혹시나 맹검사가 요즘에도 감빵에 있다면 아마 이미 한 권 샀을 것 같지만, 초판이 매진되어 당분간은 구매할 수가 없다. 올해 상반기 출간을 목표로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으니 못 사신 분들은 그때 사시면 된다.

맹검사는 보고전, 민원, 진정, 고소, 고발의 제왕이었는데, 그가 제기한 문제제기가 수백 건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는 며칠 전 별것도 아닌 일로 직접 고소한 교도관과도 웃으며 인사를 하는 기묘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가 2건 정도 소송을 통해 실제 규정을 바꾸어내기도 했는데, 그 일이 기사로 실린 주간지를 늘 가지고 다니면서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는 했다(관련기사 : '맹검사'는 감옥 안에서 싸운다).

드라마 속 명 교수를 볼 때마다 그 시절의 맹검사가 떠올랐다. 그런 수용자가 있을 것 같다는 추측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는 캐릭터이기는 하나, 빵잽이와 교도관들밖에 모르는 맹검사를 염두에 두고 잡은 캐릭터라면 이 또한 깜짝 놀랄 일이다.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외부교통'에도 얽힌 추억이 있다. 서신수발과 접견 등의 외부교통 횟수는 가석방 심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수용자가 출소 후에 재범하지 않고 안정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예측을 서신수발과 접견 횟수 등을 고려해 판단하기 때문이다. 누가 접견을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접견 횟수만을 기본적 기준으로 본다. 동료 수용자가 출소 후 접견이 없는 다른 수용자를 만나러 오면 '감빵 의리'를 아는 멋진 사람으로 여겨지고는 했다.

사실 나한테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먼저 출소한 옛 동료 수용자들이 의정부 교도소까지 면회를 오고 그랬다. 나는 수용자 분류 등급 중 4급이었기 때문에 한 달에 4번밖에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굳이 급히 만나지 않아도 되고 만나서 딱히 나눌 말도 없는 형들이 와서 면회 횟수를 까먹으면 고마우면서도 찜찜하고... 묘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법에 따르면 수용자는 ①개방처우급, ②완화경비처우급, ③일반경비처우급, ④중경비처우급으로 분류된다. 수감시설 내부에서는 사실상 1~4급으로 나뉜다. 극 중에서 수감번호 앞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그게 급수를 나타내는 것이다. 급수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 1급은 접견이 매일 가능하고 전화는 월 5회 가능하다. 2급은 월 접견 6회, 전화 3회. 3급은 월 접견 5회. 4급은 월 접견 4회. 3급과 4급은 원칙적으로 전화사용 불가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족 건강문제 등)에만 소장 허락으로 할 수 있다. 급수를 올리려면 점수를 따야 한다. 수감시설 측은 수형생활 태도와 작업·교육 성적별로 수·우·미·양·가로 채점한다.

'옥바라지' 사이트가 허구? 실제로 있었다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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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기억나는 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고 심지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신문 기사로도 실린 '옥바라지닷컴'이다. 많은 분들이 그 사이트의 실체를 궁금해 하시는 듯하다.

언론 기사들은 대부분 옥바라지닷컴이 실제 하지 않는 사이트라고 확인해줬다. 현재는 옥바라지닷컴이라는 명칭을 가진 사이트가 없는 모양이지만, 한때 비슷한 사이트가 존재했었다. 지금도 군대 간 자녀나 애인들이 이용하는 '군대바라지' 사이트들은 꽤 운영되고 있는 것처럼, 2000년대 중후반에 '옥바라지'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사이트 주소는 Okbaragi.co.kr로, 개그맨 출신 권영찬씨가 개설했다. 전국 40여 개 구금시설에 대한 정보들을 모아 놓고 영치품 반입, 서신발송, 면회대행 신청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관련기사: 개그맨 권영찬 "옥바라지 대신해 드립니다").

당시 사이트가 개설될 때 나는 아이디어를 빼앗긴(?)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내가 '옥바라지닷컴' 하나 차리면 돈 잘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주변에 농담처럼 자주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슬기로운 감빵생활> 작가가 마치 내 말을 들은 듯(?) 이름까지 동일하게 설정했다.

옥바라지닷컴의 시초는 각 구치소와 교도소 정문 근처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영치품 판매 상점들이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소위 '사제' 영치품 전달이 가능했다. 색이 요란하거나 가슴에 주머니가 달려있지 않은 라운드 면티, 내복, 모포, 속옷, 양말 등은 우편 접수나 방문 접수로 검색을 거쳐 반입이 가능했다. 마약사범들은 옷가지 등에 마약을 반입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금지돼 있었다.

당시에는 교도소나 구치소 앞 가게에 전화를 해서 수번을 알려주고 은행으로 돈을 부치면 가족들이나 친지 대신 구치소 민원실에 가서 영치품과 구매물품(주로 구매부에서 판매하는 음식들)을 사서 넣어주고는 했다. 물론 수용자들이 이용할 수는 없고 수용자 가족들이 주로 이용했다. 거리가 멀어 면회가 어려운 경우에는 아주 요긴하게 활용되고는 했다.

소측에서 지급하는 아주 기본적인 물품들도 있고 소 내에서 영치금으로 구매할 수 티셔츠나 모포, 속옷, 양말 등도 있었지만 질이 매우 떨어졌다. 또한 당시에는 '사제' 옷이나 속옷, 양말 등을 입고 다니는 것이 잘나가는 재소자의 상징이었다. 면티는 1인당 2벌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이 규정이었으나 빵잽이들은 여러 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기본이었다.

다른 브랜드 면티, 속옷, 양말은 아무 관심 없었고, 오로지 나이키와 휠라만 대접 받았다. 5천~6천 원짜리 흰색 휠라 티셔츠는 당시 3만 원 정도에 거래되고는 했다. 나이키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감빵 안 휠라 사랑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조직폭력배 출신(?) 중에서는 팬티도 꼭 휠라만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먹' 좀 써서 감빵에 들어왔다 하는 사람들은 나이키나 휠라 옷이 없으면 창피해서 운동장에 나오지도 못했다.

아쉽게도 사이트 '옥바라지'는 오래 운영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사이트가 개설되고 얼마 되지 않아 외부 물품 반입이 전면 금지된 게 아마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소 내에서 브랜드 옷이나 속옷 등이 갈취나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내부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는 이유 등으로 반입을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 전국적 옥바라지 대행 서비스는 실패로 끝났다. 이번 드라마 방영 이후, 비슷한 이름의 도메인들을 이미 누가 다 선점했을 것 같다.

옛날에는 수감자들이 발송하려는 서신을 개봉 상태로 제출하면 교도관들이 검열하고 도장을 찍은 뒤 교무과 출력재소자들이 봉합해 우표를 붙여 발송했다. 서신에 은밀한 내용을 쓰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이다. 지금은 내보내는 서신 대부분을 검열하지 않기 때문에 극 중 옥바라지닷컴 같은 심부름센터가 있다면 제법 인기가 있을 것 같다. 이미 암암리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덧붙이는 글 |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인권활동 16년 차.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집시법 위반 등으로 두 차례 구속돼 실형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빵생활'을 하던 중, 열악한 구금시설 인권상황에 분노하며 인권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출소 직후 유일하게 감옥인권활동을 하던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인권활동을 시작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자유권 전문위원으로 전국 30여 개 구금시설에 대한 방문조사와 실태조사를 진행하는 등 구금시설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해왔다. '감빵' 수용자들의 인권 보장이 사회 전체 인권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태그:#슬기로운감빵생활, #슬감, #명랑한감빵생활, #수용자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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