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라 모임이 잦다. 평소 성실하게 집밥을 먹는 처지라 어쩌다 외식할 일이 생기면 마음이 설렌다. 맛도 맛이지만, 집에선 내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는 한 밥 한 공기 먹을 수 없다. 턱밑까지 차도록 배불리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배가 고파지니, 최소 하루 두 번은 몸을 움직여 음식을 하거나 밥을 차려야 한다. 즐거운 마음이 드는 건 드문 일. 대체로 귀찮다. 이런 내게 '남이 해준 음식'을 먹는다는 건 신의 은총과 자비를 받는 거나 마찬가지다.
요 며칠 은혜로운 날이 이어졌다. 밥솥도 꽤 오랜 기간 텅 빈 채 쉬었다. 모임 이외의 끼니는 식빵이나 냉동실에 굴러다니는 떡, 순대로 대충 때웠다. 냉동실도 비우고 음식 하는 번거로움도 덜고 일석이조라며 흐뭇해했다.
며칠 전 목 근처가 근질근질해 거울을 보니 손톱만 한 습진이 나 있었다. 그날 저녁 이제 막 서른이 된, 나보다 열 살 정도 어린 친구들과 신년회를 했다. 이들과 간 곳은 시카고 피자집. 젊은 친구들을 만난 김에 좀 색다른 곳에 가고 싶었던, 내 의견이 반영된 결과다. 갈비, 삼겹살, 전골, 회는 나이든 나에겐 너무 흔하니까.
시카고 피자는 도우에 비해 토핑이 많이 올라가 두툼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치즈를 아낌없이 넣어 '치즈성애자'들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나는 느끼함 때문에 치즈를 많이 먹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은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기다리던 피자가 나왔다. 역시 비주얼이 끝내준다. 치즈가 옆으로 줄줄 흘러내려 접시에 옮겨 담기도 힘들다. 한 입 베어 무니 부드럽고 쫄깃한 치즈가 입안을 가득 채운다. 토마토소스가 느끼함을 잡아준다.
오로지 혀를 만족시키기 위한 미식의 결정타. 오랜만에 느끼는 사치스러운 맛에 감동하며 순식간에 한 조각을 먹어치웠다. 두 번째 조각을 먹을 땐 피클이 많이 필요했다. 맥주도 몇 모금 마셨다. 웃고 떠드는 사이 모든 피자가 사라졌다. 가볍게 2차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속이 좋지 않았다. 온종일 체기와 몸살기로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목에 난 습진은 더 번져 있었고 가려움도 심해졌다. 어제 알아차렸어야 했다. 내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걸.
평소 집밥을 열심히 챙겨 먹는 이유는 부지런해서도,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도 아니다. 며칠 외식을 하거나, 빵이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 어김없이 몸에 탈이 난다. 연속으로 고기를 먹어도 마찬가지다. 소화가 안 되고 배탈이 나고 몸살 기운이 돌다가 결국엔 앓아눕는다.
20대 중반 첫 직장생활을 할 때 생긴 목의 습진은 몸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경고음 같은 것이다. 이럴 때 현미밥과 채소, 과일을 챙겨 먹으면 며칠 지나지 않아 습진이 사라지고 몸도 회복된다.
나에게 무엇이 좋고 나쁜지,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대로 지키긴 어렵다. 나는 인간의 의지를 그리 믿는 편이 아니라서, 내 의지가 약한 탓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엔 나를 유혹하는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고, 그 맛을 이미 알아버린 난 외식과 집밥 사이에서 가끔 외식의 유혹에 이끌릴 뿐이다. 유혹에 이끌린 대가로 얻은 건 습진과 몸살. 당장 밥솥에 현미를 안쳤다.
비행기마다 정해진 항로가 있지만 항로 위를 그대로 지나는 비행기는 단 한 대도 없다고 한다. 대부분의 비행시간 동안 항로를 벗어난 상태로 이동한다. 이정표 없는 하늘 길에서 그래도 길을 잃지 않는 건, 비록 대부분 벗어날지언정 항로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몇 번 이탈했다고 실망해서 비행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다. 이탈했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것은 예측 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한 하늘 길을 달리는 비행기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내게도 여러 항로가 있다. '집밥을 먹는다' '날마다 글을 쓴다' '운동을 한다' 같은 것들이다. '스쿼트로 하체 단련하기'는 최근 새로 만든 항로이다. 유혹에 약한 난 자주 이탈할 것이다. 하지만 되돌아올 것이다. 죽을 때까지 반복할, 나의 여정일 테니까. 새해, 익숙한, 때론 새로운 항로에서의 멋진 비행과 이탈을 함께 응원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