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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같아 학살된 오월성의 아들 오운영
▲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있는 오월성 이름이 같아 학살된 오월성의 아들 오운영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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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울기도 전, 이른 새벽에 GMC 트럭에 탄 경찰들이 죽촌리 외함마을에 들이닥쳤다. 경찰들은 명부를 들고 다니며, 보도연맹원 이름을 불러댔다. 그런데 외함리에서 중대사고가 터졌다. 성을 부르지 않고 이름만 부른 것이다. "월성이 나와! 월성이!" 외함리 오월성은 이른 새벽에 영문도 모른 채 바지를 추어올리며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마을 고샅길을 뛰어 다니던 영동 경찰들은 오월성을 붙잡아, 대기하고 있던 GMC 트럭에 실었다. 외함마을 보도연맹원들이 모두 붙잡히자 윗마을인 중함과 내함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보도연맹원들을 트럭에 태웠다. 트럭은 영동경찰서로 향했다. 1950년 7월 18일 해뜨기 전이었다.

영동경찰서 유치장과 마당에 구금되었던 오월성 일행은 포승줄과 광목천, 삐삐선으로 묵인 채 트럭에 실려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로 끌려갔다. 미리 파 있던 커다란 구덩이 앞에 일렬로 세워진 채로 영동 경찰들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영동군 양강면 죽촌리 외함마을 오월성은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다. 그런데 죽촌리 중함마을 이월성을 잡으러 간 경찰이 외함에서 성을 부르지 않고, "월성이"라고 이름만을 불렀기에 이런 사단이 발생한 것이다.

"3미터 뒤에서 총을 쏴 피가 내 옷에 튀었어"

상급기관의 명령을 받은 CIC 영동분견대와 영동경찰서에서는 보도연맹원 명부를 들고 관내 각 지서로 향했다. 경찰들은 붙잡아 들인 보도연맹원들을 유치장에 며칠간 구금시켰다가 학살 장소로 이송했다. 긴급하게 '보도연맹 처단반'이 구성되었다. 이 처단반에는 주로 사찰과에서 모집되었으며, 다른 부서와 지서에서 차출된 병력도 일부 있었다.

권혁수(1925년생. 2009년 작고)는 용화지서에 근무하다, 영동경찰서로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얼떨결에 '처단반'에 편재되었다. 권혁수가 죽음의 구렁텅이 현장으로 동원된 곳은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이었다. 현장에는 커다란 구덩이 3개가 있었다. 보도연맹원들은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줄도 모르고 삽과 곡괭이로 구덩이를 하루 전날 팠다.

열 명씩 일렬횡대로 선 보도연맹원들과 처단반 간의 거리는 3미터에 불과했다. 특무대(CIC)원들이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라" 하지만 공포에 쌓인 보도연맹원들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후 특무대원들이 들었던 손을 내리자 처단반원의 총에 불이 붙었다. "탕", "탕탕탕" 쓰러진 주검 앞에는 다음 줄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탕탕탕" 힘없이 쓰러지는 육신에서 피가 솟았다. 피는 처단반원의 경찰제복을 붉게 물들였다. 이에 질겁한 경찰들이 뒤로 주춤거리자 특무대원의 호통소리가 이어졌다. "니들도 죽고 싶냐!" 이어서 현장지휘책임자인 특무대원이 권총을 뽑아 처단반원을 향해 들이댔다. 이러한 분위기에 기겁한 경찰들은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한 채 다음 줄의 흰 옷 입은 이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소총을 발사하던 권혁수의 눈에 핏줄이 세워졌다. 저승에 가기 위해 바로 앞에 서 있는 행렬 속에 영동초등학교 동창이 있었던 것이다. 영동읍 매천리와 봉현리에 살았던 친구들이고, 같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죽마고우였다. 죽음의 현장에서 마주한 초등학교 동창들의 얼굴은 그의 뇌리에서 평생 잊혀지지 않았다.

학살 현장에서 아기를 낳은 고장수

영동군 상촌면 고자리는 산악지대로, 예로부터 나무를 벌채하고,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영동군 보도연맹원 1차 학살지가 이곳으로 선정된 것은 이곳이 민가와 워낙 떨어져 있고 급경사의 산악지대라 사람들의 왕래가 없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 곳으로 끌려 온 이들 중에 임신 9개월의 임산부가 있었다. 고장수라는 중년의 여인이다. 당시 38세로 주막을 운영하였고, 셋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학산면 아암리 여성동맹 부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고장수는 고자리로 끌려 와 경찰들의 총에 최후를 맞이했다. 그녀가 총을 맞는 순간 셋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돌보는 이 하나 없는 산골짝에서 그 아기 역시 엄마 따라 하늘나라로 갔다. 이 참상은 같은 마을에 살던 전우준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목격한 것이다.

"군수님 옷 갈아입고 오세요"

학산지서에 붙잡혀 온 보도연맹원 중에 여우현이 있었다. 여우현은 학산면 서산리 태생으로 1백석지기의 지주이자, 술도가를 운영했던 지역의 유지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영동에 유치원을 설립할 때에도 기부금을 납부하는 등 평소에 신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해방 후에는 좌익들에 의해 '영동군 초대인민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영동군 인민위원회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있어 미군정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여우현의 군수 생활은 몇 개월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은 이후에도 여우현을 '군수님'으로 불렀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영동군 인민위원장 감투를 썼던 여우현은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이 실시되어 그도 학산지서에 임시로 구금되었다. 학산지서장은 평소에 존경하던 여우현을 보자 "군수님! 댁에 가서 옷 좀 갈아입고 오시죠"라고 했다. 살려 주고 싶은 생각에 임기응변으로 옷 핑계를 댄 것이다. 하지만 여우현은 그런 줄도 모르고 집에 가서 깨끗한 중의적삼과 맥고모자를 쓰고 지서로 돌아왔다. 결국 지서장의 여우현 구명을 위한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조직부장이 경찰들이랑 같이 심사했어요"

영동군 보도연맹 사무실이 있던 곳(오른쪽 건물)
▲ 영동군 보도연맹 사무실 터 영동군 보도연맹 사무실이 있던 곳(오른쪽 건물)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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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농협은행 영동지부 맞은편 삼천리자전거포 자리에 보도연맹 사무실이 있었어요"

68년 전 이 사무실에 근무했던 손윤택(93세. 영동읍 설계리)옹은 어제 일처럼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영동군 보도연맹은 상급기관의 명령으로 조직되었고, 간사장 아래에 여러 부서장을 두었다. 김기원은 총무부장, 박주범은 홍보부장, 김인숙은 조직부장을 맡았고, 손윤택은 연락과장을 맡았다. 사무실에는 영동경찰서 사찰과 형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6.25가 발발하자 영동경찰서 사찰과 형사들은 사무실로 와 조직부장 김인숙과 함께 맹원(盟員) 처단 여부를 심사했다. 조직부장이 손윤택을 잘 보았는지, 처형자 명부에서 박주범과 함께 빠졌다. 손윤택은 박주범과 함께 몸을 피했다.

하지만 친형 손영택이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영동읍 설계리에 거주하던 손영택(1922년생)은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실시되자, 불안함을 느끼고 처가가 있는 심천면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심천지서 경찰들이 그의 처갓집으로 새벽에 들이닥쳤다. 심천지서 순경들이 손영택을 살릴 요량으로 "손영택씨! 집에서 옷 갈아입고 오시오"라고 했다. 하지만 손영택은 앞에 언급한 학산면 서산리의 여우현처럼 옷을 갈아  입고 다시 지서로 발걸음을 향했다.

영동 보도연맹 연락과장을 역임한 손윤택
▲ 손윤택 영동 보도연맹 연락과장을 역임한 손윤택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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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충북 영동군에서 한국전쟁 직후에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429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이중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된 이는 56명에 불과하다.

우연찮게 이름이 같아 학살된 오월성의 아들 오운영(74세. 양강면 죽촌리)은 "기가 막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겪은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라고 한다. 남들보다 두 배 이상 힘들게 살아 왔다는 그는 나이에 비해 이마의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



태그:#보도연맹 처단반, #영동경찰서, #고장수, #어서실, #인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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