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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일이었을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 얼굴에 축구공을 맞았다. 고개는 갑작스레 옆으로 젖혀졌고 귀에서는 이명이 들렸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하던 때, 멀리서 한 무리의 남자 아이들이 다가왔다. 미안하다고 실수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친구의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마치 재밌는 놀이라도 본 것처럼 낄낄거렸다. 사과를 하는 사람도 수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일말의 죄책감도 읽어낼 수 없었다. 오히려 웃음을 참는듯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했겠는가. 의도한 게 아니라고 하는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하는데. 실수라고 하는데.

사실 그 친구의 실수는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내 책상을 넘어뜨려 서랍 속 물건이 모두 쏟아졌을 때도, 내 셔츠를 잡아당겨 찢었을 때도, 지우개로 얼굴을 맞추거나 뒤에서 갑자기 머리채를 휘어 잡았을 때도, 그 애는 그렇게 말했다. 실수라고. 몰랐다고.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고.

물론 그 당시 나는 학교에서 공공연한 따돌림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아이들은 그런 말조차 없이 무작정 나를 괴롭히곤 했다. 하지만 더 기억에 남는 피해의 경험은 전자의 것들이었다. 아니 피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때린 사람이 가해가 아니라고 하는데. 고의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애와의 관계에서 나는 무엇이어야 할까? 희생자? 아니면 그저 운이 없었던 애?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는 가해와 피해의 구도

강화길 <호수-다른 사람>
 강화길 <호수-다른 사람>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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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사연이긴 하지만 아마 보편적인 상황이기도 할 것이다. 그게 가해자이건 누구이건 간에 고통을 준 사람은 질문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이 무엇이었는지는 명백하기 때문이다. 오직 고통을 받는 사람만이 의문을 가진다. 이것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놓이게 되는 불평등한 구도다.

가해자는 항상 자신의 행동을 여러가지 부연을 붙여(실수, 어쩌다 보니, 의도치 않게) 교묘하게 은폐한다. 아니 사실은 그냥 침묵만 해도 된다. 그러면 피해자는 혼란에 빠진다.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 비난을 할 것인지를 아는 게 불가능하다. 일단 복구의 방식도 정할 수 없다. 그냥 털어 넘기고 지나가야 하나? 아니면 사과든 보상이든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요구해야 하나? 여기서 화를 내면 지나치게 과민한 사람이 되고 웃으면 바보가 될까?

사람들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피해/가해의 구도는 항상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고통 받은 사람은 자신이 가진 피해자 정체성을 놓고 분열을 반복한다. 내가 피해자라는 걸 남들 이전에 스스로에게도 설득시켜야 한다. 이 과정이 쉽지가 않다. 당장 가해자와 매일매일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나만 조용히 하면 아무런 소란 없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나는 네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힘들다. 입증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피해자들의 말에는 모순과 충돌이 가득하다. 의도적인 가해임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정말 피해자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그 다음은 보통 이런 식이다. 진짜 피해자라면 저렇게 당당하지 못할리가 없다고

사람들은 함부로 실수를 저지른다

강화길의 단편 소설 <호수-다른 사람>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그래. 모두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함부로 실수를 저지르곤 하지.' 언뜻 들어서는 말이 안 되는 문장이다. '함부로'의 사전적 의미는 '조심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이다. 실수는 그런 게 아니다. 의도하거나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이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한 일이 될수 있겠는가.

하지만 피해자에게는 다르다. 그 두 가지가 모호하게 섞여 자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는 사람에게는 저 문장이 진실이다. 너무도 자주 상처를 입지만 정작 함부로 해를 가한 사람은 없다. 비극적이지만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소설 속에서 저 대사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등장한다. 주인공 진영의 친구 민영은 두 사람이 함께 자주 가던 호수 근처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호수에 무언가를 두고 왔다는 것 뿐이다. 민영의 남자 친구는 진영에게 그녀가 찾으려 한 것을 발견했다며 호수에 함께 가주길 요청한다. 하지만 그도 믿을 수 없다. 민영은 남자 친구와 함께 있거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위축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팔에서 멍자국을 발견한 날, 민영은 진영에게 말한다. 실수였던 것 같다고. 호수를 향해 앞질러 가던 진영의 팔을 거세게 잡은 민영의 남자 친구도 똑같이 말한다. 실수라고. 뒤에서 계속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하길래 쫓아와 붙잡는다는 게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진영은 질문한다. 정말 실수일까. 진짜 불렀는데 내가 못 들은 것일까. 그런데 부르긴 한 걸까.

모든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다

소설을 읽은 지인은 내게 말했다. 자신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나도 그렇다고. 그리고 그게 핵심이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사건의 의미를 모른 채 살아간다. 정작 그 일이 자신의 몸에서 벌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함부로 실수한다'는 말처럼 피해자의 증언은 사회가 정상이라 간주하는 논리 구조에서 자주 이탈한다.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보편적이지 않은 인식의 조건을 부여 받게 된다는 의미다(그래서 피해자는 그냥 약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다). 누군가에게 세상은 자신이 상정한 보통의 범주에서 손쉽게 이탈한다. 문자 그대로 '이 세상의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요청하곤 한다. 자신의 언어가 사회와 충돌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면 스스로가 지닌 기득권을 한번쯤 돌아보라고.

법과 제도, 혹은 공동체의 도움으로 자신이 겪은 일이 명백하게 정의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하지만 이 경우에도 피해자는 끊임없이 회의할 가능성이 높다). 피해자가 헤매는 의문의 미로가 끔찍한 지옥인 이유는 출구의 열쇠를 오직 가해자만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자리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다소 위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소설 속 상황과 같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고 더 두려움에 떨고 혼란스러워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던지는 질문. 나에게 그날 공을 찼던 아이는 정말 실수로 나를 맞힌 걸까? 아니면 친구들에게 저기 좋은 과녁이 지나간다며 호기롭게 공을 날렸던 걸까. 나는 모른다. 그리고 아마 평생을 모른 채 살아갈 것이다.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문학동네(2018)


태그:#강화길, #괜찮은 사람, #피해자, #실수, #호수-다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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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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