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

배우 윤여정이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으로 관객과 만난다. 극 중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엄마이지 우울할 때면 전인권의 노래를 듣는 감성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 CJ엔터테인먼트


근 3년 간 배우 윤여정이 연기한 '할머니'들이 관객들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황혼의 로맨스를 꿈꿨던 금님(<장수상회>), 혹은 몸 파는 일로 생계를 잇는 '박카스 할머니'(<죽여주는 여자>), 그것도 아니면 남자를 찾아 미지의 행성에서 날아온 '외계 할머니'까지(단편 <산나물 처녀>).

같은 할머니라도 사연과 감정의 폭이 달랐던 터라 늘 그의 다음 캐릭터가 궁금했다. 오는 17일 개봉할 <그것만이 내 세상>에선?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외아들(이병헌)이고 뭐고 혈혈단신 집을 뛰쳐나가 (또 다른 남자 사이에서 키우던) 자폐증 아이(박정민)와 함께 살고 있는 강인한 엄마 주인숙으로 분했다.

전형성을 깨다 

전직 복싱 챔피언 조하(이병헌)는 그래서 인숙에게 큰 원망을 품고 있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인숙의 제안으로 어찌하다 같은 집에서 살게 됐지만 자폐증, 정확히는 서번트 증후군이 있는 진태(박정민)도 꼴 보기 싫다. 영화는 이렇게 서로 다른 방향을 보는 유사 가족이 서로에게 진정한 사랑과 정을 느끼는 과정을 그렸다.

그래서 인숙 캐릭터 역시 다소 전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아들을 품으려는 엄마이면서 억척스럽게 삶을 살던 주인숙이 윤여정을 만나자 생명력을 얻었다. "시나리오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냐고? 이병헌과 박정민 덕 좀 보려했다"며 대수롭지 않은 듯 운을 뗐지만 윤여정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산사투리 연기와 주인숙의 내면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신파가 나쁜 건 아니잖나! 솔직히 시나리오를 한 30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 이병헌과 박정민이 캐스팅됐다고 하더라. 그래서 한다고 했지(웃음). 덕 좀 보려고. 병헌이야 잘 알고, 정민이는 <동주>에서 몽규 할 때 잘 봤다. 드라마 <너를 포위했다>? (기자: <너희들은 포위됐다>요) 때 '이승기 옆에 있는 애가 잘 하더라' 이랬는데 정민이가 '그게 저였어요!' 하더라.

사투리 연기야 뭐 원래 시나리오가 사투리였다. 부산 사투리였는데 선생과 석 달을 합숙하면서 연습했다. 진짜 어렵더라. 아침 먹고 연습, 점심 먹고 연습, 저녁 먹고 연습 그렇게 하는데 그 친구가 나가떨어졌어. 경북 사투리가 부산 보다 쉽다더라. 촬영 중반 때 너무 어려워서 괜히 한다고 했나 후회하기도 했는데 뭐 이미 늦었지(웃음)."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관련 사진.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은 형제와 엄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가족애를 그려나간다. ⓒ CJ엔터테인먼트


조하와 피아노 천재 진태와 달리 주인숙 캐릭터는 친절하진 않았다. 윤여정 역시 "인숙의 젊었을 시절이 좀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지 감독님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며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집을 나가 자살하려 했고, 그때 날 구출해 준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키우던 아이를 맡게 된 것"이라고 캐릭터의 전사를 설명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그래요 순간순간 순응하며 살지요. 장애가 있는 진태에겐 연민 같은 감정이 있었을 것이고, 조하에겐 죄의식이 있었겠지. 그래서 인숙이 조하의 눈치를 매번 보잖나. '널 버린 게 아니야' 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거다. 나도 사실 그 부분을 넣어 달라 요구했는데 안 고쳐주더라고(웃음). 내가 뭐 주인공도 아니고 부득불 우길 게 아니지. 사람이 죽어가면서 할 말 다하고 그럴 순 없겠더라. 아프면 할 말도 못해."

잘 늙는다는 것

인터뷰 중 상당 시간을 윤여정은 이병헌과 박정민의 연기를 언급하는 데 할애했다. 특히 피아노 연주 연기를 완벽히 소화한 박정민에 대해 "처음에 감독이 대역 없이 연주를 시킨다고 하기에 이 사람이 정신이 있는 건가 싶었다"며 "근데 그걸 정민이가 해냈다. 두 무모한 사람이 만나서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53년 차 배우의 겸손함일까. 그는 "그게 아니다! 이병헌도 그렇고 정민이도 그렇고 다 나보다 연기를 잘했다"며 "나이 들어서 내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면 이상한 사람이지! 진짜 그 둘이 잘했다"고 칭찬했다.  

"50년 넘게 연기한 게 대단한 게 아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지. 우리 땐 배우 일 조금 하다가 좋은 데 시집가는 게 아카데미 수상보다 나은 거였다(웃음). 그래서 나도 시집가야 하나보다 해서 간 거지. 그러다가 어찌해서 잘못돼서 영영 일 못할 줄 알았는데 또 하게 된 것이다(윤여정은 1975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하며 잠정 은퇴했으나 이혼 후 1985년 극적으로 복귀했다-기자 주) . 

그때부터가 내 배우 인생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 연기를 못한다는 걸 그때 알았고, 일을 주는 사람이 감사했다. 그렇게 여기까지 온 것이다. 환갑 때 결심했다. 아이를 키우며 싫은 역이든 좋은 역이든 다 했는데 애들도 다 컸고, 이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기며 일하리라! 난 프리랜서니까 마음대로 하면 되잖나. 

근데 돈 욕심이 날 순 있지. 살아보니 난 돈이 많이 안 따르는 사람이더라. 일한 만큼 버는 타입이었다. 요행수 그런 게 없어. 지인 말 듣고 주식 투자했다가 다 날렸으니(웃음). 열심히 일해서 번 돈만 내 것이더라. 빌딩 이런 거 있으면 또 관리하는 데 골치 아프고 그래! 좋은 사람과 일하는 게 최고의 사치라고 생각한다."

 배우 윤여정.

ⓒ CJ엔터테인먼트


잘 늙는다는 것. 윤여정은 이미 자신의 삶으로 증명 중이었다. 연기에서도 그는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 '나이듦'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그 고민 많이 하지. 엄마가 95세인데 우리 엄마를 보면서 더 많이 하지.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건 결심해서 되는 건 아니더라. 나이 들수록 의지도 없어지고. 어떤 하버드 교수가 쓴 책에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생전에 하던 일을 하면서 죽고 싶어 한다'고 돼 있더라. 음대 교수였는데 죽기 직전 수업을 하고 싶어 하더라고. 그게 정상적인 수업은 아니었겠지. 제자들이 와 준 것이지.

하여튼 사람은 존재 이유를 찾는 게 중요해 보인다. 문제는 배우는 또 그 교수처럼 할 순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니까. 몸 불편한 배우가 현장에 있으면 또 얼마나 민폐일까. 그래서 후배들에게 얘기했다. 내가 몸이 불편한데 현장에 나가겠다고 우기면 문 잠가버리고 못나오게 해달라고. 사람들 괴롭히고 싶지 않다(웃음)."

즐기는 자세

여전히 윤여정은 와인을 즐기며 줄담배를 피운다. 건강 걱정에 "오래 살면 뭐해? 정신 잃고 사느니 빨리 죽는 게 낫다"며 받아치는 모습도 여전했다. 한때 '생계형 배우'임을 자처했던 그는 어느새 환갑 당시 다짐대로 '즐기는 배우'가 돼 있었다. 예산의 높고 낮음, 역할의 비중과 상관없이 본인이 재밌으면 도전하는 자세. 여기에서 나이를 잊게 하는 열정이 느껴졌다. 지난해 출연한 단편 <산나물 처녀>와 미국 드라마 <하이랜드> 파일럿 분량에 출연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특별히 해보고 싶은 캐릭터는 없다. 배우가 주어지면 하는 거지 뭐. 그건 예전부터 그랬어. 이룰 수 없는 꿈은 안 꾸는 사람이다 내가. 지금 와서 송혜교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하면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웃음). 적당히 알아서들 내게 역할을 주겠지. 그리고 난 최선을 다하면 되지. 일상의 즐거움? 요즘엔 뉴스를 끊었다. 끔찍한 일이 너무 많아서. 대신 책을 좀 읽으려 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을 잡았다. 근데 너무 어렵더라. 잘못 잡은 거 같아!

<산나물 처녀>야 3일만 나오면 된다고 하더라. 내가 소속사도 없고, 이미지 걱정 그런 거 할 필요가 없잖나. 가서 자유롭게 한 거지. 미국 드라마는 처음엔 안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잊고 살다가 마가렛 조가 딸 역할인데 내가 엄마 맡지않으면 안 한다고 했다더라. 이 나이에 할리우드 나가서 뭐해? 근데 그쪽에서 여건을 만들어줘서 안 갈 수가 없어서 가서 오디션을 봤지. 이 얘기는 안 하려 했는데 누가 기자에게 말해서 기사가 났더라고."

과거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시금 연예계에 복귀했을 때 그는 "이혼한 여자가 TV에 나오는 게 흉이 되는 때였다"며 "너무 마르고 목소리도 이상해서 비선호도 1위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젠? 명실상부 그는 관객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1순위 배우다.

 배우 윤여정.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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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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