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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교사들에게 생활기록부는 겨울방학이 벌어지는 전투의 최종 고지다.
 담임 교사들에게 생활기록부는 겨울방학이 벌어지는 전투의 최종 고지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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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이다. 주변의 지인들에게 여전히 교사의 방학이란 '방학'의 사전적 의미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일 터이다. 보충수업을 제외하면, 수업과 생활지도 차원에서 방학은 그런 사전적 의미에 어느 정도 부합하지만, 다종다양 업무의 차원에서 교사들에게 겨울방학은 전혀 다른 전투의 현장으로 펼쳐진다.

특히, 담임 교사들에게 생활기록부는 이 전투의 최종 고지인데,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백병전'에 가까운 '시간의 순직'을 요구받는다. 아마도 백병전에서 병사들은 전략전술도 의미 없는 상황에서 그저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인, 심지어 살아남아 슬픔과 상처뿐인 누더기 깃발을 고지에 꽂으며 영혼 없는 자신을 만나지나 않았을까.

업무를 완수해낼 교사들을 그러한 느낌으로 묘사하는 것이 씁쓸하지만, 그 묘사가 현실의 풍경이 된 것은 단지 관료 체제 노동의 결과물과 목적이 전도되었기 때문일까? 생활기록부 입력 작업만큼이나 전도된 목적을 달성(?)하는 관료제 노동의 일상이야 교사의 일과에서 얼마든지 더 솎아낼 수 있으니, 차라리 생활기록부가 교사들의 학생들에 대한 극히 내면적이고 완전한 자유 서술로만 이루어진다면 어땠을까?

객관적 자료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진 법정 장부에 교사(라는 개인)들의 평가 척도를 덧대어 입력하라니, 거기에 지켜야할 원칙과 매뉴얼만해도 수십 수백 가지... 이쯤 되면 범국가적 '형용 모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둥근 사각형'쯤 되는 이 지극히 모순적인 생활기록부 체제가 목표로 만든 고지는 결국 어떤 무기와 탄약조차 쓸모없는 그야말로 '백병전'으로 치닿는 필연의 무대인 것이다.

이제 생활기록부가 왜 교사에게는 백병전이 되어버렸고, 그토록 치열한 전투의 결과물이 사회 구성원들에게는 어떻게 신뢰성을 잃고야마는지 따져보고자 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교사‧교육 정책가와 학부모들에 대한 양비론이나, 입시 중심의 교육제도를 원인으로 삼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교사들의 양심과 이를 관리‧감독하는 공적 기능에 호소하고 있는 바, 그런 논리들이 일정 부분 틀리지 않는 말이면서도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함은 왜일까?

그것은 학생과 학부모, 교사, 교육관료와 정치가들, 대학 등등 생활기록부를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이 무능하거나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생활기록부가 '레전드급 오디션 시스템'으로 편입되는 상황을 당연시 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생활에 대한 기록이 다른 누군가와 비교 대상으로 변질되어  평가(학종 등의 전형 요소) 시스템 안으로 편입된 것 자체가 문제의 뿌리일테지만, 이 '오디션 시스템'에서 누군가에겐 3분으로 주어진 경연 시간을 누군가는 10분의 경연 시간으로 늘릴 수 있도록 허용되고 있다는 것(셀프 생기부가 바로 그 것) 또한 문제일 것이다. 생활기록부를 대체할 다른 평가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한, 핵심은 결국 생활기록부 자체의 입력 방식에 있다고 생각된다.     

근무하던 학교에서 10년 전 졸업한 어느 졸업생의 생활기록부를 민원 처리 과정에서 열람했었던 기억에 따르면, 그 학생의 생활기록부는 총 4쪽이었다. 담임의 종합의견란에는 간략한 하나의 문장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학생의 '문장형' 생활 기록은 '종합의견' 단 한 줄로 그만이었다.

그런데 2017년 현재 학생 한 명의 생활기록부는(필자가 근무하는 중학교의 경우) 보통 15쪽 이상 20쪽을 상회하는 경우조차 허다해졌다. 그리고 '문장형' 기록으로 채워지는 항목은 '진로희망사항', '교과학습발달상황 중 과목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자유학기활동상황', '창의적체험활동상황',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등이며, 각각의 큰 항목 안에서 세세한 영역별로 기록되는 내용들을 모두 합치면 거의 '단편 소설급'이라 할 만하다.(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아이의 생활기록부를 '나이스 대국민 서비스'에서 열람했더니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역시 만만치 않은 양적 팽창을-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보여주고 있었다.)

최근 대학 입시 전형에서 이른바 '학종'이라 불리우는 수시 전형의 절대적 증가 추세에 발 맞추어 전형 요소로서의 변별력과 객관성을 확보하려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학생의 생활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사관의 역할을 교사들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수 많은 보고와 언론에 오르락내리락하며 공문으로도 시달되는 부정적 사례에서 접하는 '셀프 생활기록부' 논란과 일부 교사 등의 생활기록부 조작, 그리고 수저계급론에 근거한 생활기록부 무용론까지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다. 오히려 그러한 문제 상황에 맞서는 교육 당국의 관료적 셈법은 생활기록부를 더욱 골병들게 하고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에 기록된 역대급 '주절주절 묘사(소설)들'이 객관타당성을 획득하게 되도록 이제는 아예 분기별, 월별 '누가 기록'을 요구하는 새로운 생활기록부 매뉴얼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일회성의 주관적 기록을 방지하기 위하여 층층이 누적된 주관적 기록들로 '주관을 객관화'하라는 매뉴얼 되시겠다. 'A군은 성실함'이라는 기록을 일년에 총 12번 '월마다 1회씩 성실함'으로 기록한다면 A군의 '성실'은 완전한 '성실' 그 자체가 되는가?

여기서 나는 더 근원적으로 묻는다. 기록은 주관인가 객관인가? 역사(기록)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그 유명한 말이 아니더라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에 대한 '미셀 푸코' 식의 해석이 아니더라도,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기록이란 아주 완전한 의미에서의 기록일지라도(심지어는 Full HD급으로 인화된 사진일지라도) 기록된 그 자체의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최소한의 단어나 음절조차 입 밖으로 표출된 순간 유기적으로 다른 시공간과 함께 '파생' 되어갈진대, 하물며 문장은 오죽하겠는가? 다시,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자.

"국어 수업의 활동 전반에 걸쳐 학교 수업계획에 따라 자신의 학습계획을 세우는 등, 자기 주도적인 태도로 참여하였으며, 특히 건의하는 글쓰기 활동에서 '급식 문제'에 대한 요구 사항을 설득력 있게 발표하여 친구들의 호응을 얻음. 소설의 장르적 특성을 이해하고, '학교 수업 공개의 날'의 경험을 소설로 표현함. 특히 엄마와 외모가 닮지 않아 괴로워하는 인물을 설정하고, 고민이 해결되는 과정을 소설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적 성장 과정을 보여줌."

이 문장은 어떤 학생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것일까, 가치가 담긴 '의견'을 서술한 것일까? 조금 더 세세하게 따져 묻겠다. 이 문장 중에서 '수업 활동 전반에 걸쳐', '자기주도적인 태도로 참여', '설득력 있게 발표하여', '친구들의 호응을 얻음' 등등의 거의 모든 구절들은 사실을 확증한 것인가, 아니면 교사 한 사람의 가치 판단인가. 만일 그것이 일개 교사의 주관적 가치 판단에 머문 것일 경우에도 생활기록부 시스템이 추구하는 '공정성'과 '신뢰성'의 목표에 부합하는 것일까? 사실 이 문장은 일선 학교에 보급된 생활기록부 기재 예시의 한 부분으로, 말하자면 생활 기록의 모범 답안 쯤 되는 문장이라 제시된 것이다.

이러한 문장들이 생활기록부 작성의 표준으로 못 박힌 이유는, '공정‧신뢰성' 확보가 '생활을 기록하는 장부 시스템'의 요체라 설정하고, 위의 문장을 보다 더 학생에 대한 공정성과 신뢰성 있는 사실에 부합하도록 만들기 위해 더욱 구체적인 사실을 서술하는 문장들로 증거를 채택하도록 만들자는 것이 당국의 방향-공정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접근에 대한 응답-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학생 1명의 특정 영역에 대한 생활 기록을 다수의 교사가 교차 서술하거나, 여타의 물적 증거(사진 등)들을 동반한 입력도 불사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저 문장을 1000자 원고 쯤으로 증‧개축해놓은 '문장의 층층 향연'은 과연 학생의 국어과 수업 시간에서의 성과를 완전히-사실 그대로-기술한 것이 되어줄까?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의식 속에 문장이 의도한 사실을 완전히 전달하는 것이 될까? 

우리의 생활기록부 체제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거대 조형물'의 운명을 향하고 있다. 폐허가 된 섬에 남은 거대한 유물(흉물?)로 유명한 모아이 섬의 석상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섬의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결국 인간이 더는 살 수 없는 섬을 만들었던가는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역사이다. 부족 간의 경쟁으로 석상을 더 크게, 더 크게 만들려는 욕망은 석상 제작에 지나친 벌목과 자원의 출혈로 섬 전체의 생태계를 파괴하게 되어, 결국 인간이 살 수 없는 폐허의 섬만을 만들었다는 우울한 결말 말이다. 

공교육을 복원하겠다는 취지로 대학 입시 전형에서 생활기록부를 중시하겠다는 정책적 당위야 백 번을 이해해도, 이 지경은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이, 더 상세히 기록하는 것만이 한 학생의 생활(혹은 역사)을 판단하는 최선이라 믿는 '크기의 주술', '규모의 경제'에 매몰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결국 공교육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집단적 미개신앙에 불과하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생활기록부 적폐 세력'으로 불리워도 마땅할 교육 체제의 정책 입안가들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현장의 목소리를 '사변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게으른 교사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쯤으로 치부하기).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들이 생활기록부 문제에 대한 이 글의 진단에 동의한다면? 그렇다면 실행 가능한 오직 하나의 일은 생활기록부의 다이어트 뿐이라는 사실도 동의할 것이다.
 
다이어트에 대한 많은 미신 중에 가장 본질적인 오류는 '지금처럼 먹으면서 뺀다'는 논리적 모순이라고 한다. 생활기록부를 다이어트하자는데 동의한다면, 그러한 미신적 문장을 반복하지는 말기 바란다. "지금처럼 기록하면서 뺀다"는 말을 타파해야한다. 즉 '기록하지 않는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생활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면, '생활기록부'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학생의 학교 생활을 '확인'하는 기능만을 남겨놓는 것이다. 즉 학교에서의 모든 생활에 대한 입력은 문장형,이 아닌 '정보확인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할까? 물론이다. 학교는 학생의 생활에 대한 객관적 정보만을 확인해주는 것이다(지금도 생활기록부에서 교과성적 영역은, 개인의 성취 수준을 정량적 정보로만 드러내는 '정보확인형'의 기록이다). 말하자면 '다이어트 생활기록부'란 학생들의 확정적인 정보(성적 등의 계량화된 정보)만을 담는 것이 핵심이다. 출석일수, 교과 성적, 각종 학교 행사나 진로, 봉사, 동아리, 독서, 체험 활동 등의 영역에서 계량화된 데이터(주제, 일시, 횟수 등)만을 제시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교사의 역할도 그러한 정보를 모으고 확인하기, 딱 거기까지이다.

아울러 그러한 다이어트에 총량적 기준선의 도입도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한 학생의 생활은 정해진 시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영역이든 무한한 기록을 허용한다는 것은 과장과 거짓의 습격 앞에서 객관성이라는 울타리를 허물어버리는 첫 출발일 뿐이며 심지어는 국가 교육 체제의 폭력을 확증하는 기록일 뿐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 봉사활동 영역에서 1년간 수 백 시간의 봉사 활동을 수행했다면 그것이 긍정적인 기록일까? 오히려 울트라 스펙의 목적으로 학생의 생활을 '혹사'시키는 원인자로써 생활기록부가 기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생활을 위한‧생활에 의한‧생활의 기록'이 되어야할 과정이, '기록을 위한‧기록에 의한‧기록의 생활'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생활기록 총량제'와 같은 기준선을 영역 별로 마련하고 학생의 모든 활동을 스스로 취사선택하고 제한된 분량 내에서 기록하도록 하는 것을 주장한다. 예를 들면 독서 부문의 경우 어느 학생이 한 해 동안 수백 권을 읽었다 하더라도 그 중에 스스로 가장 유의미한 독서 경험을 제한된 수 이내로 입력하도록 설정하는 것은 어떤가.

지난 시기 우리 교육의 최전선에서 생활기록부는 그 소명을 증식해왔다. '생활'이라는 '사실'을 '기록'한다는 시스템 자체는 마치 '가치'를 능숙하게 배제할 듯이 보인다. 그러나 현상을 외부에 표현하고 드러내는 일이란, '가치와 사실'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날 수 없다. 여기 성적이 우수한 학생 A와 성적이 우수하지 못한 학생 B가 있다, 라고 서술한 문장이 있다. 이 기술에서 '성적이 우수하거나 우수하지 못하다'는 표현이 가치를 배제하고 완전한 사실만으로 구분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가? 더 이상 교사들에게 가치를 사실과 분리하라고 주술을 걸지 마시길.

전근대적이기 짝이 없던 국민교육헌장을 꼬아서 말하면, 우리가 기록하는 모든 문장은 '다양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문장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치 또는 다양성을 배제한 완전한 사실의 기록(문장)을 솔직히 모른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 방법을 알고 싶지도 않다. 따라서 우리 교사들은 가치와 사실의 갈림길 사이에서 우리들이 가는 길이 어딘지도 모르기에-세상의 눈흘김과, 관리 체제의 지적질이라는 벌에 대하여 항소하자면-거의 조건반사적으로 'Ctrl+C와 Ctrl+V'라는 맨주먹 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백병전에서는 어떤 전략전술과 무기체제도 소용없음을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이제 결론이다. 그리고 결론은 아이들이다. 우리들의 척박한 학교에서,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단 하나뿐인 '각자의 꽃'이 되어 생활하는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길거리에 핀 아무런 꽃이라도 찾아가서 그 꽃의 단 하루의 생활만이라도 기록해보기를(단, 이 때 당신은 국가 기관인 '교꽃부'가 각종 법으로 꽃에 관한 기록은 반드시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신뢰성을 획득하여야 한다는 규범을 적용하는 나라에 산다). 자, 그 지침과 규범에 근거하여 당신의 문장 기록은 과연 얼마나 신뢰성과 공정성을 획득한 정보들로 꽃의 생활들을 입력할 수 있을는지? 당신은 꽃에 대한 '꽃기록 매뉴얼' 따위의 가이드라인에 충실한 '복붙(복사-붙여넣기)'의 세계에서 헤매는 전사가 되어있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아이들이 무한한 각자의 꽃으로 피어가는 모습을 온전히 기록하여 공정하고 신뢰받는 '기록의 천국'에 도달할 궁극의 매뉴얼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미신에 불과한 이상, 그 미개한 신앙에 따라 기록한다는 행위는 요식이거나 피상에 그칠 것임을 인정하시길. 이제는 생활기록부 체제의 식탁에서 '공정', '신뢰' 따위의 블라블라 레시피들을 얹어왔던 교육 관련 주체들(나를 포함한 교사‧교육 당국‧대학의 입학 당국자들‧학부모들까지)이, 사실 지금껏 만든 레시피들이란 기록이 목적이 아니었고 그저 생계를 유지하거나, 심지어는 그것으로 아이들이 저마다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과는 상관 없이 각자의 배만 채우기 위해 필요했었음을 고백하시길.



태그:#생활기록부, #생활기록부, #생기부, #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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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학교 교사, 아이들을 통해 앞날을 꿈 꾸고, 소소한 일상 예술들을 통해 세계와 세계 속의 사람들과 함께 하길 원합니다.

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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