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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김장철을 맞아 우리 집 냉장고엔 김치가 풍년이었다. 친정 엄마가 담가 주시는 서울식 김치, 친구들로부터 공수한 경상도 김치, 전라도 김치. 어릴 적 엄마가 내 눈엔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는 김치를 이웃들과 주고받을 때마다 '대체 왜들 그러시는 걸까' 싶었는데, 내가 딱 그러고 있다.

물론, 아직은 직접 담그지 않고 얻어먹고 있으니 이런 호사가 따로 없다. 총각김치, 갓김치, 파김치 등등 김치 종류가 무궁무진한 거야 말할 것도 없지만, 배추김치 하나만도 지역에 따라 맛이 판이하게 다르다. 딱히 김치를 연구해본 바는 없으니 장담할 수는 없지만, 순전히 내가 맛본 바에 의하면 이런 식이다.

서울김치는 비교적 염도가 낮아 부담이 없고, 보기에도 먹기에도 정갈하다. 이번에 경북 울진에서 공수한 김치에는 토막 낸 임연수, 갈치, 대구 등의 생선이 들어있어 정말 별미다. 전남 완도에서 올라온 김치에는 해조류 청각이 들어 있는데, 갓 담근 김치라곤 믿겨지지 않는 깊은 맛이 일품이다.

김치 이야기만 해도 신이 나는데, 음식 이야기를 하라면 천일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다. 자칭 입맛이 까다롭다는 사람도,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도, 각자의 섬세한 기호가 존재한다. 음식은 우리를 수다스럽게 만든다.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도 음식 이야기만큼 무난한 화제가 없을 것이다. 자칫 민감할 수 있는 정치·경제·문화적인 소재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대화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음식만큼 정치·경제·문화적 요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게 또 있을까.

<스파이시 인도> 책표지
 <스파이시 인도> 책표지
ⓒ 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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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엄숙한 역사책을 펼치는 것보다 절로 호기심이 동하는 그 나라 음식에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인도 음식에 빠져 들어 인도에 관한 책까지 쓰게 된 <스파이시 인도>의 저자 홍지은씨처럼 말이다.
"아무리 애써도 손에 잡히지 않고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인도라는 사회가, 음식을 통해 다가가니 그 결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많은 유적지를 돌아보고 영적인 아우라로 가득한 성지도 가보았지만, 나를 인도라는 '이상한 나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음식이었다."
음식을 주된 소재로 하지만, 이야기는 정치·역사·문화 등 실로 방대하게 뻗쳐 나간다. 덕분에 인도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은 더 높아진 기분이 들고, 아직 가보지 못한 인도지만 친근감마저 든다. 이 흥미진진한 인도 이야기를 다 옮길 순 없지만, 몇 가지 예만 들어볼까 한다. 

인도 요리라고 하면 첫 번째로 '커리'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 의하면, 커리는 식민 통치 시기에 인도에 거주하던 영국인들 사이에서 쓰이기 시작한 단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대개 '소스'를 뜻하는 따밀어 '까리kari'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하는데, 정작 따밀어를 쓰는 남인도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따밀어 사전에 의하면 까리는 고기를 뜻하며, 동시에 채소를 뜻한다고 한다. 어떻게 고기와 채소를 동시에 지칭하는 단어가 있을 수 있을까. 이는 카스트 계층에 따라 먹는 음식이 다르고, 그 때문에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꼬리, 아뚜, 민 등의 말이 까리 앞에 붙어 각각 닭고기, 염소고기, 생선 등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채식을 해 고기를 살 일이 없는 브라만에게는 까리가 곧 채소를 뜻한다고.

어찌됐든 까리에는 소스라는 뜻이 없다고 한다. 즉, 영국인들은 까리를 넣어 끓인 국물 음식을 커리라고 불렀던 것이고, 그 개념이 전세계로 퍼져나간 것은 물론, 인도에도 역수입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인도 전역에서도 커리라는 말이 일상적이지만,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어떤 양념, 부재료, 조리법, 농도 등에 따라 완전히 다른 요리가 된다는 것.

놀라운 것은, 커리 이야기는 이 책의 머리글 정도에 해당할 뿐이라는 사실. 사방팔방으로 펼쳐나가는 이야기도 근사하지만, 본문 내내 함께 하는 훌륭한 사진들은 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군침을 흘리게도 하고, 때로는 생뚱맞게도 내 지나간 추억을 소환하기까지 한다. 덕분인지 460쪽이 넘어가는 책이 단숨에 읽힌다.

책에 실린 모든 음식을 맛보고 싶다. 인도식 생치즈 빠니르, 달콤한 간식 라두, 아니면 우리네 '백반 정식'과도 같다는 탈리! 기분 같아선 지금 당장 인도로 미식 여행을 떠날 판이다. 누군가에게는 끊임없는 탐식이 경계의 대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내게 미식이란 하루도 빠짐없이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하다시피 한 도락이고, 지치기 쉬운 일상에 생기를 더해주는 기꺼운 행위이다.

전세계 모든 이들을 자연스럽게 이어주기도 하고,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우리 몸의 피와 살을 구성하기도 하는 음식. 책에 소개된, 음식이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하게 활용된 예 하나를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바로 짜빠띠(chapati) 이야기다. 우리의 쌀밥처럼 북인도에서 가장 흔히 먹는 빵인 짜빠띠.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1857년, 북인도 전역에서 짜빠띠 수천 장이 마을에서 마을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괴이한 일이 발생한다. 짜빠띠는 매일 밤 300km 떨어진 곳까지도 이동했다고 한다. 영국인 관료들은 이 기현상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어 패닉에 빠졌다고.

이 기묘한 짜빠띠의 이동은 바로 인도의 독립 운동가들이 의도한 것이었다고 한다. 바로 이 미스터리한 불안감을 조장하기 위한 것. 짜빠띠를 퍼뜨렸던 대다수 민중들도 짜빠띠의 역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으나, 이 행위를 하며 암묵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독립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인도의 혁명 운동 지도자들이 5월 항쟁의 첫 포탄을 터뜨리게 되었다고.

결국, 음식의 의미는 단순히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도와 조금 더 친근해지고 싶은 사람, 인도 음식이 주는 맛의 향연에 심취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당장에 인도로 떠날 순 없어 국내의 인도 식당을 찾게 되더라도, 또는 집에서 직접 어설픈 난을 구워가며 맛을 흉내내면서도, 내 식도락의 기쁨은 배가 될 듯하다.


스파이시 인도 - 향, 색, 맛의 향연, 역사와 문화로 맛보는 인도 음식 이야기

홍지은 지음, 조선희 사진, 따비(2017)


태그:#스파이시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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