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무실역행이란 공리공론을 배척하며 참되고 성실하도록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민족의 정신적 지표로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강조했다.
▲ 務實力行 무실역행이란 공리공론을 배척하며 참되고 성실하도록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민족의 정신적 지표로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강조했다.
ⓒ 이명수

관련사진보기


새해 첫날 아침, 붓을 들어 '務實力行(무실역행)'을 정성껏 썼다. 새해의 다짐이다. 붓글씨를 쓰면서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힘'이라고 생각했다. 뜻했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면 진한 후회가 남는다. '내일 하지' 하면서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훌쩍 가버렸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았더라면 작은 성취라도 있었을 것이다. 몰라서 안 한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했다. 게으름 탓이고 정성이 부족한 탓이다.

무실역행은 공리공론을 배척하며 참되고 성실하도록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핵심 사상이다. 무릇 열매는 거짓이 없고 참되며 실속 있다. 단단하고 옹골찬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망국의 시대를 살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은 비통하고 치욕적인 온갖 일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의식 있는 사람들은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통탄했다. 나라를 되찾겠다며 목숨을 내건 애국지사들이 생겨났다. 도산도 개혁을 이끌고 힘을 길러 독립을 쟁취할 선비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조직한 단체가 '선비를 일으키는 모임', 즉 흥사단(興士團)이다. 흥사단의 설립 목적은 건전 인격과 단결을 위한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4대 정신인데, 이 정신은 흥사단 단기에도 그대로 상징되어 있다.

흥사단의 깃발에 '선비 사(士)' 자를 형상화한 기러기가 그려져 있다. 알고 보면 기러기는 참 모범적인 새이다. 기러기는 구만리 하늘길을 날아도 방향 감각이 확고하며 질서정연하다. 규율과 질서의 정신이 강하다. 앞의 새를 뒤의 새가 질서 있게 따라간다.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법이 없고 혼자 멋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무리를 이루면 놀랍도록 행동을 통일하고, 협동 정신이 강하다.

기러기와 같이 정연한 순서가 안서(雁序)이고, 기러기와 같은 규율을 가지고 날아가는 것을 안행(雁行)이라고 한다. 기러기가 땅에 내리거나 날거나 할 때마다 '기럭끼럭' 하면서 내는 소리는 열성적으로 서로를 응원하는 소리라고 한다. 신용과 신의, 죽는 날까지 일부일부(一夫一婦)를 지키는 것 또한 기러기의 특성이다.

부부 사랑의 상징인 기러기는 새끼 사랑도 각별하다. 기러기는 산에 불이나 둥지가 탈 위기에 처했을 때 품에 품은 새끼와 함께 타죽을지언정 새끼를 내버려 두고 도망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기에 도산은 기러기의 정신을 본받자고 흥사단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도산을 흠모했던 출판사 사장

젊은 시절에 나는 도산을 뜨겁게 흠모하여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람을 만났다. 어느 출판사에 취직했는데, 사장이 '신념대학'이라는 이름의 잠재능력개발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잠재능력개발원은 정신혁명을 기치로 내세우고 원장의 강의를 바탕으로 일종의 정신훈련을 했다. 대인기피증, 말더듬증, 우울증, 강박장애, 나태, 무기력, 불면증 등 정신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사람들의 고민거리를 정신력 강화에 의한 성격 개조로 개선하겠다는 목표로 훈련 프로그램을 짰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강연의 힘을 절실히 느꼈다. 뜨겁고 힘찬 강연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원장은 전국의 교도소, 소록도병원, 논산훈련소, 기업체 및 단체 등을 다니며 특강을 자주 했다. 일거에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는 원장의 웅변력은 언제 보아도 부러운 능력이었다.

내 임무는 원장의 강연 원고를 쓰는 것이었다. 원장이 존경하는 사람이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기 때문에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관련 자료를 찾았다. 또한, 도산 사상을 깊이 연구했다고 알려진 안병욱 숭실대 명예교수를 찾아가 많은 말씀을 들었다.

도산은 알면 알수록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감화되어 사상적으로 숭모하는 사람이 많다. 그 암울했던 시대에 어떻게 공부하여 그렇게 깊은 지식을 쌓았는지, 그리고 신념으로 하는 지식을 삶 속에서 직접 몸으로 행한 진정한 실천가였다.

원고가 완성되면 원장은 틈이 날 때마다 달달 외웠다. 백지에 연필로 쓰면서 외우는 습관이 있었는데, 새까맣게 쓴 백지가 하루에도 십여 장씩 나왔다. 나는 암기에 그렇게 집중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암기가 끝나면 아무도 없는 빈 강당의 연단에 서서 혼자 강의하며 녹음을 했다. 마치 수백 명의 청중을 앞에 놓고 연설하는 것처럼 진지했다. 말의 강약을 조절하며 토해내는 강의는 꿈틀꿈틀 혼이 살아 있었다. 원장은 그렇게 원고를 암기하고 강의를 연습하면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냈다.

'주인 정신'에 대한 특강은 기업체에서 인기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인(主人)인가 여인(旅人)인가?>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사설을 바탕으로 원고를 작성했다.

"묻나니 여러분이시여, 당신은 주인인가 아니면 나그네인가? 오늘 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대한 사람은 모두가 대한의 주인인데, 주인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이상할 것이외다. 그러나 오늘 사회에서 주인다운 주인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글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선각자의 한탄이었다. 하지만 지금 되뇌어 보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질문이다. 나그네란 잠시 머물렀다가 자기 불리하면 떠나는 자이니, 주인 되기를 포기하는 나그네가 되지 말자는 권면의 말씀이다.

험난한 애국지사의 길

도산 안창호는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독립신문을 접했다. 그런 후 서재필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동하였다. 청중을 압도하는 서재필의 연설은 안창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18세 때 "1년 동안 밥도 굶고 쫓아다녔다"라고 말할 정도로 서재필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독립협회의 참여는 도산의 파란곡절로 점철된 애국 운동의 시발이었고, 고난의 생애로 이어지는 신호탄이 되었다.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책임 맡은 도산은 적극적으로 국민 계몽 활동에 나섰다. 1898년 음력 7월 25일은 고종의 탄생일이었다. 도산은 이날 독립협회 관서지부 주최로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평안감사를 비롯하여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연사는 약관의 청년 안창호였다. 감색 양복을 입고 연단에 오른 청년 연사는 천천히 주변을 한 번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쾌한가 했더니 오늘 이 자리야말로 쾌재를 부를 자리올시다"라면서 시작된 그의 연설은 만민을 감동하게 하였다. 그 자리에는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도 앉아 있었는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개심하여 민족운동에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날 안창호의 쾌재정 연설은 무명 청년을 일약 전국적인 명사로 만들었고, '조선 제일의 웅변가'로 알려졌다. 이 연설 후 지방 순회를 하면서 탁월한 웅변으로 민중의 자각을 호소했다. 생각해 보면, 20세에 불과한 청년의 생각이 그렇게 깊었고 실천력이 강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안창호는 갓 결혼한 부인(이혜련 여사)과 함께 1902년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다. 앞서가는 미국의 교육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열흘 정도의 지루한 항해 끝에 멀리 하와이가 보였는데,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하와이가 인상 깊어 스스로 도산(島山)이란 호를 지었다.

처음에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정 고용인으로 청소하는 일 따위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맡은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한 백인이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신사입니다"라고 감탄하면서 약속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급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인삼을 파는 한인 두 사람이 미국인들 앞에서 상투를 잡고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인삼 판매 영역을 놓고 싸우는 것을 보고, 미국인들에게 이런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한인 친목회를 구성했다.

이 모임이 나중에 한인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로 발전한다. 도산은 남의 집 가정 고용인으로 일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줬기 때문에 가정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도산의 아내 이혜련 여사는 눈물짓는 날이 많아 '울보 새댁'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훗날 이혜련 여사는 "그분은 첫째가 조국, 둘째가 담배, 그리고 아내와 자식은 열두 번째였어요"라고 미국에서의 신혼생활을 회고했다.

애국지사의 길은 자신과 가족의 희생이 불가피한 길이었다. 일신의 영달을 꾀하여 친일파의 길로 들어선 자들의 삶과는 극과 극을 달렸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한 도산은 가족을 미국에 남겨놓은 채 1907년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오로지 조국과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만주,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멕시코, 하와이 등을 누비면서 국외 교민사회의 단결된 독립운동 지원을 고취했다.

몇 년 만에 한 번씩 나그네처럼 미국의 가족을 방문했는데, 띄엄띄엄 3남 2녀를 두었다. 막내아들은 평생 살아 있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도산이 서울과 상하이, 대전 감옥 등지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미안한 마음이 묻어나 있다.

"내가 지금까지 아내에게 치마 하나, 저고리 한 감 사 준 일이 없었고, 필립에게도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못 사주었다. 그러한 성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랬는데, 여간 죄스럽지 않다."

편지에 연필 한 자루 못 사주었다고 안타까워한 맏아들 필립(必立)은 할리우드의 동양계 최초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이혜련 여사가 삯일을 하여 5남매를 키웠다. 필립도 일찍부터 생계를 유지하느라 막노동을 했다고 한다. 5남매는 위대한 인물을 아버지로 두었지만, 그 덕분에 남들보다 더 혹독한 가난을 겪어야 했다.

<버드나무 그늘 아래>는 도산의 맏딸 안수산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돈벌이를 못 했던 아버지, 평생을 정거장을 거치듯 몇 번 집을 다녀갔던 아버지의 빈자리에 대한 원망이 약간 서려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자긍심의 원천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더욱 반듯하게 행동하고 노력했다. 미국 해군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안전보장국(NSA)에서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약했다. 책에는 그녀의 치열했던 삶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실천이 곧 힘이다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체험한다는 것은 멋지고 값진 일이다. 정신이 살아 있는 책이었다. 책장마다 강한 기개와 정신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독립운동이 얼마나 힘들고, 또 그 가족이 당한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위대한 인물 뒤에는 늘 인내와 희생으로 살았던 가족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책을 읽다가 도산을 흠모하는 마음이 충천하여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강남에 있는 도산공원을 찾아갔다. 태극기가 참 많은 공원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정문에서 묘소까지 쭉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묘소로 가다 보면 우측에 선생의 동상이 있고, 공원 여기저기에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어록이 보인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은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영혼의 울림을 주는 귀한 만남, 그것이 비록 책을 통한 만남이라도 소중한 기회이고 축복이다. 도산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헛된 자리 욕심, 안락한 생활, 돈과 이성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언행이 일치한 삶을 살았다. 많은 미덕 중에서도 신의를 가장 중하게 여겼다. 한낱 어린아이와의 약속도 반드시 지켰던 도산은 민족의 지도자이기에 앞서 겸손한 인격자였다.

인간은 모든 것을 꿈꿀 수 있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생각은 자유이고 말하는 것도 자유다. 맹세와 결심의 말은 참 많다. 말로는 하늘의 별을 뚝 따올 수도 있고, 말로써 밥을 지으면 대한민국 사람이 전부 먹고도 남는다. 말이야 참기름을 친 듯 반질반질하게 하지만 실천이 문제다.

실천 없는 꿈은 한여름 밤의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의지, 굳건한 의지가 절대 필요하다. 실천이 곧 힘이다. 아는 것을 실천했을 때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축성여석의 방)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도산 안창호, #흥사단 깃발, #안수산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