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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오늘은 잘 모르겠어』
 심보선,『오늘은 잘 모르겠어』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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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집은 요일을 세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흔히 사람들이 세는 월요일, 화요일과 같은 문법이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차적인 것이나, 그 반대인 역순환적인 것도 아니었다. 스냅사진처럼 그 순간이었다.

독자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는 지인의 사진들을 보는 것처럼 감정으로 포착된 그의 시어를 지나간 날, 아니면 오늘의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보는 달력처럼 대강대강 쳐다봤다.

시인이면서 사회학자이기도 한 시인 심보선은 6년 만에 <오늘은 잘 모르겠어>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아, 그랬었지. 시도 결국에는 이야기였어. 사건의 서사가 아닌 감정의 서사로 들려주는 구의역 김군 사고, 그건 다른 이름으로 다시 일어났었지.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 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 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 갈색 가방 속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니, 고작 그게 전부야?"// 읽다 만 소설책, 쓰다 만 편지,/ 접다 만 종이학, 싸다 만 선물은 없었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중에, (129쪽).

낯선 이국의 나라에서 일어난 있음직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매스컴은 디오니오스 축제의 희생양처럼 한단락의 사건 사고 기사로 치부했다. 거부하고 싶다.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밝히는 뉴스이기 전에, 한 사람이 생을 마감했던 날이었다. 그것도 아주 꽃다운 열 아홉 살이었다.

감정은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며, 요일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동그라미를 쳤다. 기호에 따라 별표를 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바라보는 정치인의 '실언'을 '너'가 아닌 '나'는 화자처럼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유가 없어 위험한 일을 한 요일이 아닌 소년이 마지막으로 외롭게 살았던 날이 갈색 가방속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 스텐수저로 상징됐다.

52편의 요일 중에 '나'는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오늘 아침 빵 굽는 노인이 내게 말했다/ 생각은 멀어질수록 단맛으로 변하고/ 빵은 멀어질수록 쓴맛으로 변한다/ 그는 오로지 빵의 관점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의 안이> 중. (38쪽)

밀가루 반죽이 잘 되어 그날 빵 맛이 좋다면 행운이 있는 요일이다. 반면에 맛본 빵이 질기거나 눅눅하다면 그날은 불행이 있는 요일이다. 우리의 관점은 어디에 두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일까. 시집을 관통하는 관점은 '죽음'이었다. 숭고라 이름 붙인 개의 죽음에서부터, 부친의 죽음까지, 그 상실에서 시를 쓰는 이유를 밝힌다.

내겐 시가 있다/ 시를 쓰며 나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건너뛰어 왔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시를 썼다/ 군대 있을 때/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바로 어저께 회의해서/ 내가 울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증거들/ 그들의 눈높이 아래서 몸부림치는 별빛들/ 한 편의 시가 별자리가 되려면/ 수천수만 명의 시인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축복은 무엇일까> 중에 (31쪽).

멀쩡한 삶과 엉망진창으로 엉성하게 꾸려가는 삶은 구별될까. 어느 것이 진짜이고 또 다른 어느 것이 가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준은 있는가.  

발음을 굴려보고 싶다. 죽음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도 싶다. 어쩌면 죽음을 바라보는 이유는 살기 위한 메시지를 얻고자 하는 버둥거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이란 죽음에 대항하는 저항을 이겨야만 하는 혁명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혁명을, 버티는 것, 위로하는 것, 힐링하는 것 등으로 각각 표현은 하지만 그 의미가 아주 다른 것은 아니다.

시인의 오늘은 잘 모르겠다. 모른다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 있는 어제였고, 오늘이었고, 내일이 있을지 모른다. 모르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촛불의 시위가 있었던, "그게 나라냐?"는 구호에서 '죽음'의 대립항 들을 무수히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살고 있음'은 '태어남'과 동일시되고 있다.     

새로워야 한다. 무덤의 봉분에 올라오는 잔디도 그 길이는 각양각색이다. 사람의 삶의 궤도는 말할 것도 없다.

2005년부터 2014년까지/ 그러니까 정확히 10년 동안 잃어버렸던 후각을/ 침대에 누워 있던 어느 날 밤 되찾았다// - <잃어버린 10년> 중에, (171쪽)

되찾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감각, 그리고 감정들. 그 감정에 흩어진 기억의 편린들이 그가 살아온 흔적이었다. 사람이란, 그 사람이 살아온 날들이 그 사람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모습이다. 어떻게 살았니? 그래, '아이처럼 훌쩍거리며'(170쪽) 버티며 있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고생했어, 너의 요일, 그리고 너도 하는 것처럼 시집은 읽혔다.

시집의 감각은 디스토피아도, 그렇다고 파라다이스도 건들지 않았다. 아직 사후(死後)를 이야기 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실을 경험한 우리의 자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위로도 뭘 좀 알아야 할 수 있다는 편견 때문일까? 희망과 절망은 결국에는 같은 허밍 속에 부르는 노래이지 않을까.

하지만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다만 말 없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우리는 너무나 무서웠던 거지// -<이별 씬> 중에, (52~53쪽)

덧붙이는 글 | 심보선,『오늘은 잘 모르겠어』,(문학과지성사/2017), 전체 271쪽, 값 8,000원.



오늘은 잘 모르겠어

심보선 지음, 문학과지성사(2017)


태그:#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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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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