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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제에서 발언하고 있는 신경득 2011년 아버지가 학살된 곳으로 추정하고 있는 도장골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사진제공: 충청리뷰 육성준 기자
▲ 위령제에서 발언하고 있는 신경득 2011년 아버지가 학살된 곳으로 추정하고 있는 도장골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사진제공: 충청리뷰 육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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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마을 앞산에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밤에 교통호로 내려오는데 갑자기 앞이 안 보이는 거예요."

신경득(74세. 청주시 사창동) 전 경상대 국문과 교수가 일곱 살 때 겪은 일이다. 교통호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는 소년 신경득에게 나타난 이는 구런이(택호) 할아버지다. 구런이할아버지 등에 업혀 내려온 날로부터 밤에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야맹증(夜盲症)이 걸린 것이다. 치료비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시절이라 병원은 고사하고, 한약방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신경득을 밤마다 엎고 울타리 밑을 거닐며 "새 눈 반짝 내 눈 반짝"하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병원에 가서 눈 치료는 꿈에도 꾸지 못하니, 기복신앙에라도 의존했던 것이다.

차도가 전혀 없자, 어머니는 신경득의 둘째 외조부가 운영하는 한약방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노인네가 내린 처방은 "방동사니(풀 이름)하고 돼지 간을 같이 삶아서 먹이라"라는 것이다. 처방전대로 먹였지만 낫지는 않았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금실(택호)대부가 쌀 닷 말을 어머니에게 주어 한약을 지어 먹었다. 현금 효과가 있었던지 야맹증이 완치되지는 않았지만,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신경득에게 야맹증이라는 병마가 찾아온 것일까?

4개 국어에 능통했던 아버지

야맹증이 발병한 이유는 영양실조 때문이다. 신경득이 교통호에서 갑자기 앞이 안 보이기 한 달 전, 아버지 신상인은 청원군에서 후퇴하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되었다. 신상인은 당시 33세의 젊은 이발사였다. 그런데 그는 남로당 증평면 사건과 관련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포고령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았다. 몇 개월 후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신상인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관련 기사 : "학살당한 동생들 시신, 낫으로 수습했어요")

가장은 죽었지만, 어머니 김광식에게는 5남매의 자식이 남겨졌다. 어머니가 은반지 장사를 했지만 여섯 식구의 입에 풀칠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굶는 것이 먹는 것보다 쉬웠다. 어떤 때는 3~4일 굶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영양실조에 걸려 야맹증이 온 것이다.

신 전 교수의 칠십 평생에 한 번도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 '아버지 신상인'이다. 아버지는 청주형무소에 끌려가기 전 증평 덕상리에서 조그만 이발소를 운영했지만 평범한 시골 사람은 아니었다.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이발소를 차리기도 했고, 심지어는 일본과 만주를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정식학교는 입문도 하지 못하고, 한학을 배운 게 전부였지만, 4개 국어에 능통했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농민들은 난방을 위해 나무로 불을 땠다. 산에서 나무를 벌채하다 보면 산감(山監)에게 적발되어, '산림취체령위반'으로 고발당하기 일쑤다. 또한, 집에서 막걸리나 술을 빚다 보면 '밀주법'으로 걸린다. 신상인은 마을 사람들이 이런 곤란을 겪을 때마다 주재소에 찾아가 선처를 호소해, 문제를 해결했다.

1948년 12월 초 그가 남로당에 가입하게 된 경위는 불분명하다. 신 전 교수는 "아버지는 높은 수준의 이념이나 사상은 없었던 것 같고요. 농민들이 더불어 사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라고 당시를 상상한다.

판검사를 꿈꾸던 청년이 국문과 교수가 된 사연

7세에 야맹증에 걸렸던 신경득은 초등학교 아홉 살 때까지 구구단과 한글을 깨치지 못했다. 병에 차도가 생기면서 글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보이는 책은 전부 집어 들고 읽어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읽었던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백범일지>와 <삼국유사>다. 특히 <백범일지>가 신경득 삶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신 전 교수는 "김구 선생이 경찰서에서 일본 경찰들에게 밤새 취조를 받고 나오는데, 경찰서에 불빛이 환했다고 합니다. 김구 선생은 "일본인들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밤새도록 불을 켜가며 일하는데, 나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밤을 지새운 적이 있는가"라고 자성했다"는 글귀가 나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김구 선생 같은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꿈이 현실이 되기에는 꿈같은 일이었다.

증평 죽리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돈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괴산 청안중학교 정천일 교장이었다. 졸업식에서 참석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신경득의 송사(送辭)를 눈여겨본 것이다. 신경득의 담임 심현덕 선생에게 "저 아이는 누구냐"고 하니 심 선생이 "과부 아들"이라고 하자, 어느 중학교에 진학했냐고 되물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못 했다고 하자 "우리 중학교로 보내시게. 3년 장학생으로 해줄게"라고 해 무사히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청주상고를 입학하게 된 것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중학교 내내 1등 성적으로 또다시 '3년 장학생'이 되었다.

대학교도 4년 장학생이 되어야만 다닐 수 있는 형편이었다. 하향지원을 해 청주대학교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전체 수석으로 4년 장학생이 되었다.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0년 장학생이 된 것이다. 신경득은 청주대 법과에 입학하면서 판검사 꿈을 꾸었다. 그의 꿈이 깨진 것은 3학년 때이다. 청주대 학생회장을 했던 최진선이 베트남전쟁에 자원하면서 배를 타고 베트남을 향할 때였다. 보안부대 군인들이 최진선을 배에서 끌어 내려 귀국 조치 시켰다. 신원조회에 걸린 것이다. 알고 보니 최진선의 아버지가 6.25 때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한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신경득의 '판검사 꿈'은 날아갔다. 대학원을 국문학과로 바꾸면서 석·박사 학위를 따냈다. 청석학원에서 교사로 10년을 보내고 4년을 시간강사로 보내다가 1984년에 경상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부부가 함께 책을 쓰다

신 전 교수는 <충청리뷰> 1994년 6월호에 실린 '청주형무소 정치범 도장골 사건'을 접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너무 가슴이 떨려' 3년이 지난 1997년에서야 기사를 읽었다. 이때부터 아버지 죽음의 진상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했다. 호정리 인근의 주민들을 만나 구술증언을 확보했다.

발품을 팔면서 동시에 6.25 당시의 민간인학살 자료를 연구했다. 수년 간의 노력 끝에 나온 것이 <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살림터, 2002)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인권재판을 할 때 검사의 논고로 채택되었고,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용되었다.

<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표지 신경득 교수 저서
▲ <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표지 신경득 교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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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 교수가 60세가 되면서 어릴 때 앓은 야맹증의 후유증이 왔다. 정년퇴직 때까지 만 5년간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무사히 교수직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증세가 심해져, 앞을 전혀 볼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력을 잃으면 삶을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신교수의 얼굴에서 절망이란 단어는 찾을 수가 없다. 아버지 문제에 대해서 집요할 정도로 연구하고 조사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사건' 진실규명결정문을 받아냈다. 현재는 아곡리 유해발굴을 위해 몸과 맘을 바치고 있다.

아홉 번째의 저서는 아내와 같이 준비하고 있다.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글자도 볼 수 없고 타이핑도 불가능하다. 아내 노인숙이 논문이나 책을 읽어주면, 내용 대부분을 암기해, 글을 구성한다. 그런 후에 다시 아내에게 읽어주면 노인숙은 부지런히 타이핑을 친다. 이렇게 준비하고 있는 책이 <조선 전초(戰初) 종군문학연구>다. 이 책이 발간되면, 저자는 신경득과 노인숙 공동명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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