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흡혈박쥐는 밤이 되면 둥지를 나와 사냥에 나선다.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 동물의 피를 훔쳐먹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나 사냥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서, 굶는 날이 꽤 된다. 이럴 때, 포식한 박쥐가 먹이를 나누어주면 굶주린 박쥐는 살아남을 수 있다.

포식한 박쥐 입장에서 식사를 조금 줄이는 것은 그다지 큰 손해가 아니지만, 굶주린 박쥐에게 조금의 양식은 목숨과도 같다. 얻어먹은 박쥐가 나중에 상황이 역전되었을 때 은혜를 갚게 되면, 둘 모두에게 이익이 손해보다 큰 윈-윈 게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영악한 박쥐는 자신의 목숨을 연장시켜준 조금의 양식을 되갚지 않음으로써 부가적 이익을 얻으려 할 수도 있다. 조금의 손해도 감수하지 않음으로써 이익의 총량을 더 크게 하는 전략이다. 과연 유전자는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과학교양서로서는 독보적인 히트작 중 하나다. 지력에 필력이 더해지면 얼마나 맛깔나는 글이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이 책을 추천할 이유는 얼마든지 댈 수 있겠지만, 재미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이 책에서 대인관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원칙 또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전자를 운반하는 그릇

 <이기적 유전자> 표지
 <이기적 유전자> 표지
ⓒ 을유문화사

관련사진보기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는 것이다. 유전자의 유일무이한 목표는 자신의 복제품을 가능한 한 많이 퍼뜨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직접 영역 싸움을 하는 것보다 아바타를 통해 게임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번식이야말로 유전자의 존재 이유지만, 번식을 위해서는 일단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생존과 번식을 다세포 차원에서 분업한다면, 더 유리하다는 것이 유전자의 판단이다.

이 책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진화생물학을 쉽게 풀어쓴 책이라서 리처드 도킨스의 독창적인 내용은 제13장 유전자의 긴 팔, 그리고 제11장 '밈(meme)' 정도이다. 유전자의 긴 팔이란, 유전자가 자신의 생존 기계를 넘어서 다른 생물이나 환경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지칭한다. 예컨대 비버가 댐을 짓는 것은 개체 차원에서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본능, 즉 유전자의 명령이다. 문제는 비버의 댐이 어떤 동물의 생존에는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유전자의 게임은 자신의 아바타 바깥에서도 일어난다.

달팽이 흡충은 유전자의 긴 팔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달팽이가 껍질을 너무 두껍게 만들지 않는 것은, 두꺼운 껍질이 비용 측면에서 경제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팽이에 기생하는 흡충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달팽이의 호르몬을 조작하여 두꺼운 껍질을 만들게 한다. 유전자의 긴 팔은 다른 유전자의 아바타를 조종하기도 하는 것이다.

밈에 관한 내용은 더욱 흥미롭다. 자기복제를 통해 존재를 지속하려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라면, 그것이 굳이 물리적 실체를 가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도킨스는 유전자를 '자기복제자'라고 부른다. 유전자의 본질을 적절히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자기복제자로서 존재를 연장하고 확장하려는 성질을 가진 것은 유전자뿐만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글귀는 아무런 물리적 실체도 없지만 사백 년을 넘게 그 존재를 연장해 왔고, 세계 각지로 자신의 복제자를 흩뿌렸다. 셰익스피어의 글귀는 유전자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생존 전적을 기록하고 있다.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

 반복되는 게임이라면, 죄수의 딜레마는 전혀 딜레마가 되지 않는다. 협력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반복되는 게임이라면, 죄수의 딜레마는 전혀 딜레마가 되지 않는다. 협력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내가 이 책을 대인관계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권하는 이유는 제12장에 있다.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 한다'라는 제목이다. 마음씨 좋은 놈이 호구 되는 것이 상식인 것 같은데, 도킨스는 왜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서두에서 소개된 흡혈박쥐로 돌아가 보자. 흡혈박쥐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언제나 피를 나누어 주는 전략, 상대방의 행동을 그대로 돌려주는 맞대응 전략, 그리고 얻어먹기만 하고 나누어 주지 않는 배신 전략 등이다.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지만, 한 번으로 끝나는 게임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반복되는 게임이다. 유전자의 입장에서, 어떤 전략이 유리할까?

각각의 전략을 취하는 박쥐들에게 이름을 붙여 보자. 호구 박쥐는 언제나 먹이를 나누어 준다. 사기꾼 박쥐는 배신 전략을 취한다. 그리고 맞대응 전략을 취하는 박쥐를 '원한자'라고 부르자. 원한자 박쥐는 기본적으로 호구와 마찬가지로 먹이를 나누지만, 배신행위를 당할 경우 상대방을 기억해 두고 다시는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즉, 사기꾼 박쥐를 기억했다가 맞대응하는 것이 원한자 박쥐다.

호구들만 존재하는 무리는 유지된다. 배가 부를 때 먹이를 조금 포기하는 대신 허탕을 쳤을 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므로 전원에게 유리한 상황이다.

그런데 만약 이 무리에 사기꾼이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호구들은 사기꾼에게 당하면서 굶어 죽게 되고, 사기꾼 유전자는 무리 내에 점점 더 퍼지게 된다. 사기꾼과 호구의 초기 배합비율이 어떻든 상관없이, 사기꾼의 생존율은 호구에 비해 높다. 사기꾼 전략의 기댓값이 호구에 비해 크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호구는 전멸하고 사기꾼만 남게 된다.

여기에 원한자를 추가해 보자. 원한자가 적고 사기꾼이 많은 무리에서 원한자는 쉽게 도태된다. 원한자는 처음 한 번은 일단 먹이를 나누어 주므로, 같은 사기꾼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먹이를 나누는 선행을 하게 되어 호구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원한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자기들끼리 만나는 가능성이 커진 원한자들은 사기꾼보다 높은 평균 이득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 상태에서 게임이 반복되면 경쟁에서 밀린 사기꾼의 수가 줄어든다. 하지만 전멸하지는 않는다. 사기꾼 개체가 충분히 적어지면, 사기꾼이 같은 원한자와 다시 만나서 보복 당할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적은 수의 사기꾼들은 여러 원한자들을 등치고 다니면서 생존한다.

이제 호구, 사기꾼, 원한자가 모두 참가하는 무리를 살펴보자. 우선 호구가 사기꾼에 밀려 전멸한다. 다음 단계에서 사기꾼의 비율이 높아지지만, 어느 시점 이후에는 사기꾼이 원한자에게 밀리기 시작한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다수의 원한자와 소수의 사기꾼으로 이루어진 무리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로버트 액설로드는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 게임 상황에서 다양한 전략의 기댓값을 계산했다. 그는 앞에서 예로 든 세 가지의 단순 전략은 물론, 적절한 시점에 배신하는 전략 등 다양한 변종 전략을 포함해서 실험했다. 한 번쯤 배신을 통해 로또를 노리는 전략이 우세할 것처럼 보이지만, 시뮬레이션 결과 최고의 전략은 순수한 원한자 전략이었다.

액설로드는 전략을 두 그룹으로 분류했는데, 절대 먼저 배신하지 않는 '착한' 전략 그룹과 어떤 이유든 먼저 배신을 최소한 한 번은 하는 '못된' 전략 그룹이다. 놀랍게도 득점이 높은 상위 8개 전략은 모두 착한 전략이었다. 못된 전략 7개는 모두 하위권을 차지했다. 정말로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 한다."

도덕의 황금률

이제 나의 결론이다. 원한자 전략은 분명 호구 전략에 비하면 그렇게 착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원한자 전략은 절대 먼저 배신하지 않는 전략이므로 착한 전략이다. 또한, 모든 구성원이 원한자로 되어 있는 무리는 모든 구성원이 호구인 무리와 똑같은 결과를 낸다. 아무도 먼저 배신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두가 모두에게 베푸는 사회가 형성된다. 모두가 원칙을 지키는 사회는 착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사회와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나는 이것이 함무라비 법전과 성서를 포함해 인류 역사를 통해 언제나 설파되어 온 도덕의 황금률, 즉 "네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우하라"는 원칙과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맹자에 나오는 "역지사지" 또한 같은 맥락의 교훈이다. 그래서 나는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상대의 입장에서 상황을 생각해보는 습관을 기르자고 감히 제안해 본다. 절대 먼저 배신하지 않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전략이니까 말이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관용이 강물처럼 흐르는 소통사회를 희망하는 시민입니다. 책 읽는 브런치 운영중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junat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