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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민병희 강원도교육감이 강원도 교육 현장을 찾아가 직접 취재해서 작성한 것입니다. 민 교육감은 틈나는 대로 기사를 작성해 올릴 계획입니다. 민 교육감은 기사쓰기를 시작하면서, 독자들에게 자신이 현장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더 많은 교육 구성원들과 나눴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습니다. [편집자말]
2015년 3월,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공립형 대안고등학교 현천고가 첫 주인을 맞았다. 자기만의 사연을 갖고 학교 다니기 힘들어하던 학생들이 새로운 교육을 바라며 찾아온 곳. 그리고 눈 깜짝할 새 3년이 훌쩍 지났다.

강원도 모든 아이가 소중하지만, 이 아이들에게 각별히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모두를 위한 교육'의 상징 같은 학교였다. 왜 엘리트 교육이 아닌 대안교육에 예산을 쓰는지를 두고 의회의 문제 제기도 여러 번 있었다. 현천고의 첫 주인공들이 졸업하기 전, 직접 만나서 속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 아이들의 삶은 얼마나 변했을까? 현천고는 이 아이들의 삶에 어떤 의미였을까?

교육감 인터뷰 소식을 듣고 3학년 학생들 전원이 모였다. 현천고 학생들은 이 곳에서 나들회의를 진행한다.
▲ 현천고 3학년 인터뷰 교육감 인터뷰 소식을 듣고 3학년 학생들 전원이 모였다. 현천고 학생들은 이 곳에서 나들회의를 진행한다.
ⓒ 민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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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앞둔 학생들 몇 명과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현천고 선생님들의 생각은 달랐다.

"몇몇 아이들의 이야기로만 현천고를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3학년 모든 아이와 함께 하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아이들 44명과의 인터뷰는 시작됐다.

"3년간의 성과요? 아직도 시행착오 중이에요"

한여름 땡볕 아래 텃밭 노작 수업을 함께 했던 지난번 만남 때, 연이은 일정으로 먼저 자리를 뜬 것을 두고 서운했다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혹독한 여름과 추수가 지나고 찾아온 저장의 시기, 지난 3년간 아이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아침에 일어나는 것, 먹는 것조차 새로 배운 것 같아요. 무엇보다 3년간 '나'라는 사람이 누군지를 배웠죠. 그 전에는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내 삶을 내가 이끌 수 있다는 그런 믿음...? 그런데 1년만 더 다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혜인)

재작년 여름, 현천고 아이들의 텃밭 노작수업에 함께 했다. 다음 일정이 있어서 조금 먼저 나왔는데 이를 두고 서운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 텃밭 노작수업 재작년 여름, 현천고 아이들의 텃밭 노작수업에 함께 했다. 다음 일정이 있어서 조금 먼저 나왔는데 이를 두고 서운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 민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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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무너지고 다시 평화를 얻고... 아직까지 그 과정을 반복하고 있어요. 다른 친구들을 이해하는 것도, 나를 이해하는 것도 너무 어려웠어요. 솔직히 자퇴를 고민하지 않은 아이들이 없을 정도였죠." (진영록)

한 학생의 자퇴 이야기에 조금 놀랐다. 실제로 자퇴를 고민한 적 있냐고 물어보니 3분의 2 정도의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도리어 마음이 놓였다. 자기 선택권과 삶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비롯한, 다른 학교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치열한 성장통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어나는 것, 먹는 것조차 새로 배웠다"는 혜인이의 말 한마디에 현천고의 철학을 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입학하고 일주일 만에 자퇴를 고민했어요. 생각했던 것과 달랐거든요. 불안했죠. 하지만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학교에서의 내 권리를 한번 누려보자 생각했어요. 지금은 정말 좋은 선생님들과 친구들, 모든 인연에 감사하지만요." (박슬기)

"일반적인 고등학교는 정해진 답에 믿음을 심어주는 곳 같아요. 예를 들어 교사를 목표로 정한 학생이라면 교사에 관련된 생활기록부를 만들어야 하고, 자소서(자기소개서)에는 교사가 되기 위해 애쓴 노력들을 열거해야 하죠. 그렇게 살아야만 좋은 것이고, 잘 살아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학교가 만드는 것 같아요. 하지만 현천고에 오면 최소한 다섯 번 이상은 '내가 가고 싶은 길'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되요. 꿈이 깨지고, 흔들리는 것의 연속이죠." (진영록)

현천고는 다양한 교과를 운영하지만 이를 관통하는 원칙이 있다. 학생들이 관심 분야를 직접 선택하고, 탐구하고,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 것.
▲ 꿈날다 발표 현천고는 다양한 교과를 운영하지만 이를 관통하는 원칙이 있다. 학생들이 관심 분야를 직접 선택하고, 탐구하고,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 것.
ⓒ 민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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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친고의 교육과정은?
"현천고는 대안교육 특성화고등학교로서, '존중, 자람, 나눔' 이라는 교육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존중'의 가치 실현을 위해 '의사소통, 공동체회의, 행복찾기' 등이, '자람' 영역으로는 '진로탐색 인턴쉽, 교양실기/디자인공예, 표현하는 삶', '나눔' 영역으로는 '생활경제(협동조합)' 등의 대안교육 특성화 교과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중 '진로탐색 인턴쉽'은 학생들의 관심에 따라 전문가 멘토의 도움을 받으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때문에 인기가 많습니다. 또한 '표현하는 삶' 교과군에서는 학기별로 학생들의 선택에 의해 무학년제로 운영되는 연주실습, 목공, 연극, 패션, 쿠킹, 밴드 활동이 이루어집니다. '생각하는 삶' 교과군은 인문학, 문화 비평, 인간과 교양, 어른 되기, 돈과 자립, 세상 엿보기 등의 수업이 운영되는데, 이들이 현천고의 교육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교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박경화 현천고 교장

"확실한 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것"

어른들이 정해준 답을 믿고 열심히 살아가면 차라리 지금 당장은 덜 불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스스로 결정하지 않은 길을 의심 없이 나아가기에는 '세상 보는 눈'이 훌쩍 자라버렸다고나 할까? 왜 우리 학교는 이리도 힘든 길을 가게 하냐며 툴툴대다가도, 왜 다른 학교 또래들은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진짜 '나의 길'인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지를 의아해하는 아이들.

"솔직히 아직도 불안해요. 하지만 많은 어른이 우리를 만나면 하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너희 나이 때 그런 고민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요. 그래서 나 자신을 믿기로 했어요. 3년 동안 배운 대로요." (송지혜)

"'어른 준비하기'라는 수업을 듣고 있는데, 아직 어른 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걱정이에요. 내 마음이 더 넓어져야 하는데, 홀로 설 수 있어야 하는데..." (원지수)

"3년 동안 넌 무엇을 했냐고 물을 때 딱히 내세울 건 없어요. 우리 학교는 솔직히 대학합격률, 취업률, 그런 거 취급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확실히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3년 전 보다 확실히 내가 성장했다는 것. 이 학교에 오기 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거라는 것." (진영록)

현천고 학생들은 학교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전국 최초로 학생 이사장까지 배출했다.
▲ 협동조합 설립 현천고 학생들은 학교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전국 최초로 학생 이사장까지 배출했다.
ⓒ 민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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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어요"

누구나 교육이 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 전제가 붙는다. 그 전에 대입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특히 고등학교 교육의 변화는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힘을 잃기 일쑤다.

하지만 소위 '문제아'들의 학교라 불렸던 현천고의 교육은, 분명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물론 이 학교 구성원들의 합의가 전제되어 있기에 가능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보면 현천고 아이들의 이 '진지함'은, 우리가 '대입' 또는 '취업'이라는 정량화된 목표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효율적인 처방에 급급해 잊고 지내던 값비싼 비용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해준다.

"입학 초기와 달리 아이들의 폭력적인 행동은 거의 없어졌어요.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이러면 안 되는 거구나 스스로 깨달은 거죠. 선생님들이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에요. 안 되는 것을 누가 몰라요. 하지만 안 좋은 선택을 하게 되는 딜레마 속에서 살았던 거죠." (진영록)

"현천고는 결과물이 없어도 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학교도 선생님도 아무도 우리에게 어떤 결과물을 바라지 않아요. 다만 저를 사랑하는 법,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해요." (김수민)

현천고 한 학생은 현천고 교육을 '결과물이 없어도 되는 과정'으로 표현했다. 유형의 결과물을 요구하지 않을 뿐 아이들의 영혼은 충분히 성장하고 있었다.
▲ 제주도 여행 현천고 한 학생은 현천고 교육을 '결과물이 없어도 되는 과정'으로 표현했다. 유형의 결과물을 요구하지 않을 뿐 아이들의 영혼은 충분히 성장하고 있었다.
ⓒ 민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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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찾기, 삶과 철학, 노작과 자연, 표현하는 삶, 생활 경제 등 현천고 특성화 교과는 학생 성장의 매개체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학생과 교사 모두 가장 중요한 교육과정으로 손꼽는 것이 바로 '나들회의'다. 생활규칙부터 학교 운영의 전반적인 내용까지 협의하는 나들회의는 교사도 학생도 모두 1인 1표를 행사하는 작은 민주사회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기까지 결코 쉽지 않아요. 하지만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져요. 무엇보다 우리의 결정을 존중해주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워요.

규칙을 정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나들회의는 우리의 상황을 공유하거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에요. 전교생이 한자리에 모여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시간이지요." (최예지)

선생님들과 어울려 함께 회의를 하는 것에 전혀 어색함이 없어보인다. 동등한 학교 구성원으로 대접받는 나들회의에서 쌓아온 신뢰가 있기 때문 아닐까?
▲ 둥글게 둘러앉은 동등한 구성원 선생님들과 어울려 함께 회의를 하는 것에 전혀 어색함이 없어보인다. 동등한 학교 구성원으로 대접받는 나들회의에서 쌓아온 신뢰가 있기 때문 아닐까?
ⓒ 민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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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해요!"

아쉬운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목소리로 선생님들에게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비리, 폭언, 이중성... 어른들에게 실망해서 중학교를 뛰쳐나왔고, 이 학교도 아니라면 내가 기댈 어른은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저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있었지만 선생님은 없었거든요. 하지만 여기서 만났어요. 진짜 어른을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보통은 일방적이잖아요. 잘못하면 혼내고 벌주고 끝. 보통의 선생님들이 그렇잖아요. 그런데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효율성이 굉장히 떨어져요. 우리 때문에 너무 아파하고, 고민하고, 우리와 싸우기도 하죠."

선생님께 존중받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법, 남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는 아이들.
▲ 인간 대 인간 선생님께 존중받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법, 남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는 아이들.
ⓒ 민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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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대 인간으로 대해주는 분들이에요. 선생님과 학생들도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짜증 내고 말을 안 듣기도 하지만 우리를 도와주려는 선생님들의 진심은 우리 모두 알고 있어요."

"인내심이 정말 강하신 분들이에요. 정말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분들이죠. 우리도 선생님들을 보면서 기다리는 법을 배웠어요. 선생님, 우리 때문에 너무 고생하셨어요. 고맙습니다."

감히 평가해 보건대, 현천고 선생님들의 가장 큰 노동은 '믿고 기다려주기'일 것이다. 1년 365일 늘 아이들 곁에 머물면서,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아이들의 변화를 기다려주는 것. 이거 절대로 쉬운 일 아니다. 그러나 그 신뢰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야 아이들은 자랄 수 있다. 현천고 아이들이 다른 또래들에 비해 맘껏 불안해하고 고민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은 선생님들이 보여준 '믿음'과 '인내'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건 어른에게도 힘든 일이다. 3년간 멋지게 학교생활 해내고, 어려운 인터뷰에 응해준 현천고 3학년 학생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고맙다 현천고 3학년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건 어른에게도 힘든 일이다. 3년간 멋지게 학교생활 해내고, 어려운 인터뷰에 응해준 현천고 3학년 학생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민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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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 1 : 스스로 졸업준비위원회를 꾸려 1월 9일 졸업식을 준비하는 현천고 3학년 학생들. 진심으로 졸업을 축하한다. 앞으로 사회 나가서도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일들이 많을 거야. 그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주는 학교는 아마 이 세상에 없겠지. 적극적으로 스펙을 만들어 주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운 너희들의 3년에 감사하다. 잘 버텨주고 훌쩍 자라준 아이들아, 사랑한다.

* 추신2 : 오늘도 온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아파하고 있을 현천고 선생님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 추신3 : 2018년 신년사에서 교육감 직속 '고교 혁신 추진단'을 만들겠노라고 약속했다. "왜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에게는 '내가 가고 싶은 길'에 대해서 의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죠?" 현천고 한 학생의 이 질문을, 추진단이 구성되면 던져 볼 생각이다.


태그:#민병희, #강원도교육청, #현천고, #공립형대안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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