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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기자 말

가까이 음지마을의 기헌고택에서 멀리 상수리나무 아래 양지마을의 강씨종택까지 보인다. 사진 가운데가 두 마을을 가르는 법전천이다.
▲ 법전(버저이)마을 정경 가까이 음지마을의 기헌고택에서 멀리 상수리나무 아래 양지마을의 강씨종택까지 보인다. 사진 가운데가 두 마을을 가르는 법전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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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에는 안동 권씨의 닭실과 선돌, 의성 김씨의 바래미, 진주 강씨의 버저이마을까지 한글로 된 집성마을이 여럿 있다. 문중 이름을 댈 때는 주로 한자어로 한다. 유곡(酉谷) 권씨 혹은 안동 권씨 유곡문중, 해저(海底) 김씨 또는 의성 김씨 해저문중, 법전(法田) 강씨나 진주 강씨 법전문중, 이런 식이다. 더러는 닭실 권씨, 바래미 김씨, 버저이 강씨로 친근하게 부르기도 한다. 

이번에 찾아볼 버저이마을은 한자로 시작하여 한글로 바뀐 마을 이름이다. 버저이는 법전의 경상도 사투리다. 법전은 옛날 법흥사 절 앞에 큰 밭이 있어 법전(法田)이라 했다. '버전이', '버제이', '버지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버저이가 제일 많이 쓰인다.

진주 강씨 집성마을, 법전마을(버저이마을)

버저이 마을은 법전면에 있는 진주 강씨 집성마을이다. 법전(버저이) 강씨는 홍문관 응교(應敎)를 지낸 강덕서로 시작한다. 강덕서의 아들 강윤조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자신의 아들, 잠은 강흡(1602-1671), 도은 강각(1620-1657)과 함께 태백산 자락, 법전리 성잠에 발붙였다. 강흡은 태백산 자락에 은거한 심장세, 홍석, 정양, 홍우정과 함께 태백오현으로 불린다.  

그 후 두 형제는 버저이마을에 들어왔다. 마을은 개울(법전천)로 두 마을로 나뉜다. 오른쪽은 음지마을, 왼쪽은 양지마을. 강흡은 음지마을에 동생, 강각은 양지마을에 터를 잡았다. 음지마을은 조선 시대에는 순흥, 양지마을은 안동 땅으로 각각 순흥법전, 안동법전이라 하였다.

법전천 건너 언덕 바로 아래 기헌고택과 송월재종택이 있다. 두 집은  음지마을의 고색을 짙게 한다. 소나무 오른쪽 아래에 경체정이 있다.
▲ 음지마을 정경 법전천 건너 언덕 바로 아래 기헌고택과 송월재종택이 있다. 두 집은 음지마을의 고색을 짙게 한다. 소나무 오른쪽 아래에 경체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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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천 건너 상수리나무아래 법전강씨종택과 해은고택이 있다.
▲ 양지마을 정경 법전천 건너 상수리나무아래 법전강씨종택과 해은고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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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을은 당색이 달랐다. 음지마을의 강흡 후손들은 노론, 양지마을 후손들은 소론이었다. 한때 노론다리, 소론다리를 따로 만들어 다닐 만큼 알력이 심했다 한다. 이 일도 예전 말이다. 2015년에 두 집안은 함께 뜻을 모아 <진주 강씨 법전문중지>를 편찬하였다. 현재는 어느 문중보다 더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두 문중의 말이다. 

노론색이 짙게 남은 음지마을

기헌고택 뒤 언덕에 올랐다. 음지마을 둔덕에서 응달을 피해 서있는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길 안내를 한 것이다. 음지는 물론 멀리 양지마을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기헌고택을 지은 사람은 기헌 강두환(1781-1854)이다. 1845년 일이다. 기헌은 1844년, 상소 사건으로 삼사의 탄핵을 받았으나 헌종 스승이라는 배경으로 유배만은 면하고 이곳에 낙향하였다.

기헌고택 굴뚝은 대문 옆에서 오는 이를 반기는 삽살개처럼 보인다.
▲ 기헌고택과 굴뚝 기헌고택 굴뚝은 대문 옆에서 오는 이를 반기는 삽살개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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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재 널굴뚝이 음지마을 고색을 짙게 한다.
▲ 송월재종택 굴뚝 송월재 널굴뚝이 음지마을 고색을 짙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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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헌이 한양에 머물 때 추사(1786-1856)와 친분이 있어 마을 앞에 있는 '경체정' 현판 글씨를 받았다 한다. 둘은 동시대, 노론집안 사람으로 영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다만, 경체정은 두 사람 모두 사망할 즈음에 지어진 것이니 글씨를 미리 받아두지 않았나 싶다. 기헌고택 앞에 있는 송월재종택과 널굴뚝은 전주 이씨 집안 집이지만 음지마을의 고색을 짙게 한다.

법전천 곁에 아주 예쁜 정자가 있다. 경체정(景棣亭)이다. 강윤(1701-1782)과 강완, 강한, 삼형제의 우애와 덕행을 기리기 위해 강태중(1778-1862)이 1854년에 지은 정자다. 강윤은 강흡의 현손이고 감태중은 강윤의 증손이다.

강흡 이래 3대째 벼슬을 멀리해 가세가 기울어질 즘, 삼형제는 뜻을 모아 학문에 전념, 벼슬길에 올랐다. 강윤이 노론과 혼맥을 맺으면서 음지마을은 노론 색이 짙어졌다. 경체정은 <시경> 소아편, '상체지화(常棣之華)'에서 따왔다. '형제간 우애가 깊어 집안이 번성한다'는 뜻이 담겼다. 

경체정 현판은 모두 네 개다. 정자 정면 예서체로 쓴 글씨가 추사의 친필이지만 원본은 도난당하고 없다. 왼쪽 해서체 글씨가 철종과 고종 때 안동 김씨의 세도 물결을 제대로 탄 김병국 글씨다. 모두 노론 집안 출신 글씨로 음지마을에 있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왼쪽 글씨가 김병국 글씨, 오른쪽 글씨가 추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 경체정 왼쪽 글씨가 김병국 글씨, 오른쪽 글씨가 추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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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굴이 굴뚝역할을 하는 기단굴뚝이다.
▲ 경체정 굴뚝 가래굴이 굴뚝역할을 하는 기단굴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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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숨어 살기로 작정한 입향조의 뜻을 대대손손 이으려 한 것인지, 몸체 없이 기단에 가래굴(연도)을 낸 기단굴뚝이다. 강흡의 호는 잠은(潛隱)이다. 끊임없이 자맥질(潛)하고 은거하며(隱) 좋은 세상을 기다린다는 뜻 아니겠는가. 숨어 살되 게으름피우지 않겠다는 것이다. 삼형제가 세상에 알리지 않고 우애를 다지며 학습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로도 보인다.    

버저이 양지마을, 진주강씨종택과 해은고택

노론다리인지, 소론다리인지 법전천 다리를 건너 양지마을 강씨 종택에 왔다. 종손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가 제일 난감하다. 아무도 없는 집을 그냥 들어가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인사말을 건넸다. 내 인사를 받긴 하였지만 '웬 한량이 평일 대낮에 다니냐'는 말투였다.

"우리 집에 이왕 왔으니 안채를 잘 보소. 주춧돌 높낮이가 다 달라 건축학적으로 의미가 있다나, 많이들 와서 보덥디다."

서울에서 오래 생활을 해서 그런지 사투리는 쓰지 않았고 경북 내륙의 억양은 남은 것 같다. 앞서 퉁명스럽게 대꾸한 인사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부드러운 말투로 건넨 말이다.

돌계단, 덤벙 주초, 섬돌, 석축은 일부러 막 만든 듯 파격미가 돋보인다.
▲ 법전강씨종택 안채 돌계단, 덤벙 주초, 섬돌, 석축은 일부러 막 만든 듯 파격미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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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도은구택으로도 불린다. '도은구택(陶隱舊宅)' 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얀색 바탕에 파란 해서체 글씨다. 종손 말대로 검게 바랜 춘양목 안채 문을 빼꼼 열고 들어가 보니 마루 밑 주춧돌이 대단하다. 덤벙 주초다. 하나는 어린애 몸만 하고 다른 하나는 좀 작긴 한데 옆에 것이 워낙 커서 그리 보인 것이다. 

토방에 이르는 돌계단은 삐뚤삐뚤, 내 눈을 의심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기울어졌다. 석축은 제멋대로 생긴 막돌로 쌓았다. 막 다듬은 섬돌과 안채 서쪽 벽을 뚫고 나온 들쭉날쭉한 보까지 보고 나서야 이 집 주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겠다. 그럴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파격도 미라면 정녕 파격미(破格美)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성건재는 안채와 달리 반듯하다. 굴뚝도 단정하고 안정감이 있다.
▲ 성건재 굴뚝 성건재는 안채와 달리 반듯하다. 굴뚝도 단정하고 안정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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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에 세 개의 굴뚝이 있다. 들쭉날쭉하여 자잘한 재미를 준다.
▲ 해은고택 굴뚝 집 뒤에 세 개의 굴뚝이 있다. 들쭉날쭉하여 자잘한 재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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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 옆에 성건재가 있다. 강각의 아들, 강찬(1647-1739)이 1710년에 지은 정자다. 안채와 달리 아주 반듯하다. 굴뚝은 몸에 암키와로 줄무늬를 내고 수키와로 연구와 연가를 만들어 위에 얹었다. 아래가 두툼하고 위로 갈수록 얄팍하여 안정감이 있다. 종택 아랫집은 해은고택이다. 1750년경에 해은 강필효가 지은 집이다. 집 뒤 몸집 큰 굴뚝 세 개는 제멋대로 생겨 자잘한 재미를 준다.

마을을 살짝 벗어나, 춘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이오당이 있다. 강흡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679년에 세운 정자다. 이름이 재미나다. '낙오천 종오년(樂吾天 終吾年)'에서 나왔다. 자연을 즐기다 생을 마감한다는 의미다.

자연을 즐기다 생을 마감한다는 ‘이오’ 뜻에 맞게 단출하다.
▲ 이오당 자연을 즐기다 생을 마감한다는 ‘이오’ 뜻에 맞게 단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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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정자와 다르지 않으나 이오의 현판과 같이 보면 달리 보인다. ‘자연을 즐기고 생을 마감할 것이니 공연히 굴뚝연기로 부산 떨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 이오당 굴뚝 보통 정자와 다르지 않으나 이오의 현판과 같이 보면 달리 보인다. ‘자연을 즐기고 생을 마감할 것이니 공연히 굴뚝연기로 부산 떨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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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다른 정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루 밑에 숨겨 놨다. 강흡의 뜻이려니 생각하면 그 또한 달리 보인다.

'공연히 굴뚝 연기를 내보내 사람들을 꾀지 마라. 낙오천하여 종오년하리라….'

강흡이 조용히 후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태그:#법전마을, #버저이마을, #봉화, #굴뚝, #진주강씨법전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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