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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용소의 하루를 그린 작품이지만, 조금도 어둡지 않은 이야기다.
 수용소의 하루를 그린 작품이지만, 조금도 어둡지 않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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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호프, 그러니까 이반 데니소비치는 간첩 혐의로 기약 없는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다. 구소련의 수용소는 악명 높다. 아우슈비츠보다 나은 환경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아침 다섯 시 기상 신호에 잠을 깬 그는 몸이 아프다. 오늘을 견딜 수 있을까. 이 책은 슈호프의 하루를 그린다. 그런데 그의 하루 여정에 분노나 절망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솔제니친의 문체 때문일까, 아니면 슈호프가 삶을 대하는 태도 때문일까.

슈호프는 작업장에서 우연히 줄칼을 주웠는데, 수용소 재입장을 위한 신체검사 줄에 서 있다가 그것을 여전히 품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들킨다면, 적어도 10일간 영창 생활을 해야 할 것이고, 부실한 배급으로 나빠진 건강상태는 그의 생명을 위협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숨겨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면? 다른 수용자들의 신발을 수선해주면 꽤 짭짤한 수입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슈호프는 고민 끝에 도박을 감행했고, 수용소로 줄칼을 가지고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묘사하는 솔제니친의 어투는 전혀 어둡지 않다. 목숨을 건 모험이었는데 말이다. 기상 시간에 뭉그적거린 벌로 실내 청소를 할 때도, 모르타르가 얼어붙는 온도에서 벽돌을 쌓을 때도, 부유한 수용자 체자리에게 소포 줄을 양보할 때도 슈호프는 분노하지도 절망하지도 않는다. 상황에 대한 그의 대응은 논리적으로 생존게임을 풀어가는 생존 전문가의 모습이다. 베어 그릴스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을 삼키면서 얼굴을 찡그리지만, 슈호프는 무표정이다.
소포 수령자 명단이 나붙는 이 기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사는 그런 슈호프였지만, 이따금씩은 그런 기대를 해보는 것이었다. 누군가 슈호프에게 달려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슈호프! 자네 왜 소포 수령하러 가지 않나? 자네에게 소포가 왔단 말일세!"
그러나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본문 160쪽)
가족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 소포는 절대 보내지 말라고 아내에게 다짐을 받은 슈호프였지만, 그도 역시 사람인지라 가끔은 이런 망상에 빠진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수용자들은 가끔 빵이며 소시지가 든 소포를 받아 배를 채우기도 하는데 말이다.

블라덱 슈피겔만의 <쥐>의 주인공, 즉 작가의 아버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다. 그는 인색하고 무례하며, 사람들이 친절하게 구는 것은 자신에게 무언가 금전적 보상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헌신적으로 간호해온 후처를 돈만 밝히는 속물이라고 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서 그의 삶이 파란만장하게 펼쳐진 다음, 작품 끝 무렵에 다시 만나는 그를 동정하지 않는 독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가 처음 카포(재소자 관리를 돕던 유대인)의 방에 갔을 때를 묘사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식탁 위에 베이컨, 빵, 치즈 따위가 차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 그는 유혹에 견디지 못하고 음식을 훔칠 것만 같아 그만 눈을 가린다.

매슬로의 욕구 이론이 말하듯, 생존을 위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인간은 상위의 욕구로 나아가지 못한다. 점심 식사로 나오는 귀리 죽 한 그릇에 대해 이반 데니소비치가 가지는 감정은 강렬하기 그지없다.
파블로가 두 그릇을 자기한테 건네주는 순간에는 정말이지 심장이 다 멈춰버릴 정도였다. 두 그릇을 다 나에게 준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일었기 때문이다. (96쪽)
주인공은 점심 배식 시간에 배급원을 속여 자기 반 몫으로 죽 네 그릇을 더 빼돌리는 데 성공한다. 그 네 그릇이 어떻게 배분될 것인가, 그중 한 그릇이라도 자신이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부반장 파블로가 두 그릇을 내밀면서, 한 그릇은 먹고 한 그릇은 체자리에게 가져다주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죽 두 그릇이 자기에게 내밀어지는 순간, 슈호프의 심장은 멈춰버릴 정도로 요동친다.

슈호프의 뇌는 먹을 것을 생각하는 일만으로도 벅차다. 아침 배급으로 나온 빵 한 조각을 어떻게 잘 숨겨서 작업 중에 먹을 것인가, 죽그릇 바닥에 붙어 있는 찌꺼기는 어떻게 해서 잘 떼어 먹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부유한 동료에게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의 하루는 세 끼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슈호프는 드디어 거나한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러나 빵은 남겨두었다. 국을 두 그릇이나 먹고 빵까지 먹는다는 것은 어쩐지 분에 넘치는 일이다. 빵은 내일 몫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 (176쪽)
슈호프가 저녁 식사 때 두 그릇의 국을 받아먹는 장면이다. 유시민이 <청춘의 독서>에서 칭찬해 마지않는 장면이기도 하다. 두 개의 국그릇을 차례로 조심스럽게 들고 국물을 마신 다음, 건더기를 한 그릇으로 모아 찬찬히 양분을 흡수하는 것이 마치 장엄한 의식과도 같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겨울에 읽다 보니, 추위와 싸워야 하는 슈호프의 현실이 가깝게 느껴진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겨울에 읽다 보니, 추위와 싸워야 하는 슈호프의 현실이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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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제니친은 냉전 시기 서구권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이데올로기 싸움을 하는 와중에, 적측에서 자기 진영을 비판하는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공격수 아닌가. 그런 솔제니친을 지금에야 읽게 된 것은, 이념 싸움에 동원된 문학작품에 기대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이 작품이 발표와 동시에 뜨거운 환영을 받은 이유는 솔제니친이 러시아 문학의 감수성을 되살려 냈기 때문이라고,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에서 말한다. 솔제니친에게 기립박수를 보낸 것은 소련 국내 독자들이 먼저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 음악, 미술은 물론 문학도 이념 싸움에 동원되었다.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분명한 선악 구도에서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소련 문학의 전부였던 시절, 솔제니친은 고골리나 도스토옙스키가 쓴 것 같은 소설을 세상에 내보인 것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고전이라는 데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전체주의 소련의 비인간성을 폭로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존재를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솔제니친은 왜 소설 제목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지었을까? 수용소야말로 인간이 물화되는 곳 아닌가. 수용소의 현실을 고발하는 소설의 제목이라면 <C-854호의 하루>가 더 적절하지 않은가? 솔제니친의 눈은 수용소가 아닌 사람을 향하고 있다. 수용소의 삶을 기계처럼 살아가는 C-854호는 사실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하나의 인간이다. 이것이 때와 장소를 초월하는 하나의 진실이다.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 속에 던져진 우리는 슈호프와 얼마나 다를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표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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