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한화 이글스가 베테랑 투수 박정진과 드디어 재계약을 완료했다. 29일 한화 구단은 올해 FA 자격을 얻은 박정진과 2년 총액 7억5000만 원(계약금 3억 원, 연봉 4억5000만 원)의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충북 청주 출신으로 세광고와 연세대를 졸업한 박정진은 1999년 프로야구 1차지명으로 한화에 입단한 이래 19년간 오로지 독수리 군단의 주황색 유니폼만을 입고 뛰어온 대표적인 '원클럽맨'이다. 지난 2013년 11월 첫 번째 FA 자격을 얻어 당시 2년 총액 8억 원에 계약했던 박정진은 4년만에 두 번째 FA 권리를 행사하며 '역대 FA 최고령(만 41세) 계약' 기록을 새로 썼다.

박정진의 통산 성적은  691경기 789⅓이닝 45승 43패 35세이브96홀드 평균자책점 4.55다. 주로 불펜에서 활약하며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랜 세월 한화의 뒷문을 든든히 지키낸 필승조이자, 투수로는 구단 사상 최다출장 기록을 보유한 선수가 됐다. 지난 시즌도 55경기에서 3승2패 1세이브 7홀드 평균자책점 3.94의 성적으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사실 박정진의 계약규모는 100억을 넘는 초대형 계약이 넘쳐나는 최근 FA시장의 몸값 거품을 감안하면 오히려 소박해보인다. 하지만 베테랑 선수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는 국내 이적시장에서 불혹을 넘긴 선수가 당당히 FA 권리를 재행사할수 있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다. 여기에 첫 번째 FA 당시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대우(다년계약+ 비슷한 연봉)를 보장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박정진의 활약상과 꾸준함이 인정받았음을 증명한다.

박정진과 한화의 재계약은 프랜차이즈 스타의 가치가 날로 퇴색하는 최근 프로야구에서 모처럼 만나는 훈훈한 소식이라는 평가다. 올겨울 이적시장에서 강민호(삼성)-민병헌(롯데)-김현수(LG)-정성훈(전 LG) 등  KBO 각 구단을 대표하던 '프랜차이즈급' 선수들의 잇단 대이동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프로의 세계에서 영원한 것이란 없고 시장 논리에 따라 팀을 옮기는 선택이 물론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팀의 상징같은 선수들을 떠나보내야하는 팬들로서는 여러모로 허탈한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한화는 지난해부터 '리빌딩'을 통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김성근 전 감독 시절 막대한 투자에 불구하고 번번이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던 한화는 최근 유망주 육성을 통하여 젊은 팀으로 거듭나는 길을 선택했다. 이미 지난 시즌 후반기에 베테랑 선수들이 대거 구조조정됐고 올겨울 또 다른 내부 FA 정근우도 아직 계약협상이 지지부진하다. 자연스럽게 최고령 선수인 박정진의 거취 역시 우려의 시선을 자아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화는 박정진의 가치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박정진은 그야말로 한화의 살아있는 역사다.  박정진이 프로에 데뷔했던 1999년은 한화가 처음이자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영광의 해였다. 박정진은 한화가 2000년대 후반부터 10년연속 가을야구 진출 실패라는 암흑기를 보내던 순간에도 묵묵히 마운드를 지킨 버팀목이었다.

냉정히 말하면 박정진은 정민철-구대성-송진우-장종훈같이 한화의 황금시대를 주도했던 레전드급의 슈퍼스타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구단으로서는 박정진이 1990년대-2000년대-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팀을 위하여 헌신한 과거의 공헌도는 물론이고, 적지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젊은 투수들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는 '현재의 기량' 역시 의심하지 않았다. 한화 팬들도 박정진의 잔류 소식를 환영하는 반응 일색이다.

박정진의 재계약과 함께 KBO를 대표하는 원클럽맨들의 가치 역시 재조명받고 있다. 선수생활 내내 오직 한 팀의 유니폼만을 입고 활약한다는 것은 내로라하는 슈퍼스타나 프랜차이즈 선수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꾸준한 실력과 자기관리는 기본이고 여러 가지 시기와 운도 잘 맞아 떨어져야 가능하다.

실제로 최근 KBO에서 10여년 이상 장수한 원클럽맨들을 보면 최정(SK)이나 박용택(LG)같이 누구나 인정하는 유명한 스타플레이어도 있지만, 상당수는 박정진처럼 오히려 저평가받거나 조연급 이미지가 강한 선수들이 더 많다. 삼성의 박한이-권오준-조동찬, SK의 채병용-조동화-김강민, 롯데의 이우민-문규현 등은 팀과 영욕의 순간들을 오랫동안 함께하며 많은 추억을 남긴 선수들이다. 이들은 비록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정작 이들을 빼고 구단의 역사를 논하기도 어려울 만큼 '소리없이 강한' 족적을 곳곳에 남겼다.

최근 프로야구에서 저마다 '육성'이 중요한 화두가 되면서 그 부작용으로 팀에 오랜 시간 헌신한 베테랑들의 가치가 지나치게 홀대받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진정한 육성이나 리빌딩이란 단지 젊은 선수들에게만 기회를 몰아준다고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박정진이나 박용택같은 베테랑들, 특히 15년~20년 가까이 구단의 역사를 함께해온 원클럽맨이라면 그 존재감만으로도 젊은 후배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나 다름없다.

특히 한화가 박정진을 예우한 장면은 꼭 '슈퍼스타가 아닌 선수라고 할지라도' 구단에 오랫동안 헌신하고 자기 몫을 다해준 선수에게는 그에 걸맞은 '리스펙트'(존중)를 받는다는 좋은 선례로 남을수 있다. 한화를 향한 19년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한 준 박정진의 행보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오래 살아남는 자가 진짜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야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