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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0도를 넘나드는 겨울밤, 벌써 50일 넘게 국회 앞에 누운 두 사람이 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 한종선씨다. 수년 전 꽤나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이미 다 해결된 거 아니냐고 묻지만, 그들은 그런 말을 듣는 게 상처라고 했다. 그들이 또다시 국회를 찾은 사연을 연속해 싣는다. - 기자말

 50여일 동안 국회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최승우씨.
 50여일 동안 국회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최승우씨.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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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밤 9시, 연말이어서인지 평소보다 더 휑한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 한 중년 남성이 손을 떨며 비닐텐트 끝을 꼼꼼히 안으로 밀어 넣고 있다. 틈새바람이라도 들어갈까 만진 데 또 만지고, 또 만지는 그.

- 아직 계시네요.
"그럼요. 바뀐 게 없잖아요. 허허."

그가 입은 노란색 외투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이라고 적혀있다. 텐트 옆, 어느덧 누렇게 바래버린 대자보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형제복지원 사건은 해결된 적 없습니다..."

라고 시작해 그의 잠긴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휘청이며 그의 옆을 지나치는 행인들은 "야야 오늘밤은 영하 10도란다"며 멀어져 간다.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는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49)씨다.

컵라면이나 햇반으로 하루 한 끼 식사를 하고 한뎃잠을 버텨내야 하지만 최씨는 지난 11월 7일부터 또 다른 피해생존자 한종선(42)씨와 함께 국회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내무부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 규명법'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과거사정리법) 등이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인 채 별다른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이날은 국회 앞 농성 51일째 밤이었다.

라이터

 국회 앞에서 50여일 동안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최승우씨.
 국회 앞에서 50여일 동안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최승우씨.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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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떨며 안부를 묻던 그가 약속 없으면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란다. 두 사람이면 꽉 들어차는 1평 남짓한 공간에 부르스타 불을 켜고 주전자에 물을 끓이자 틈 사이로 들어오는 냉기가 조금 가시는 듯했다. 솜씨 좋게 따뜻한 믹스 율무차를 타며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14살 때 학교에서 조금 늦게 집에 돌아가다가 갑자기 경찰관에 끌려가가지고... 제가 그때 진짜 빵을 안 훔쳤거든예? 근데 막 내를 데리고 가더니 자꾸 빵 훔쳤다고 때리고 고문하는 거 아입니꺼. 나중에는 바지를 내리더니 라이터 뜨거운 걸로 내 성기를 막 지지면서 훔쳤다고 말하면 집에 보내준다꼬... 나중에 들으니까 그렇게 잡아가면 고과점수를 줬다카대예."

1982년 4월의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바로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졌다. 복지원에서 그가 살던 개금동 집까지는 불과 몇 분 거리였지만 최씨는 4년 넘게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시 북구 주례동에서 운영되던 '복지시설'이었지만 실제로는 거리의 부랑자들을 감금해 구타, 학대, 성폭행, 인권유린, 강제 노역을 자행하던 '강제수용소'였다. 12년간 형제복지원에 강제 입소된 사람은 4천 명에 달하고, 공식적으로만 513명이 사망했다. 박인근 당시 형제복지원장은 수용자들을 이용해 10억이 넘는 국고보조금을 횡령했다.

'부랑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 가운데엔 무고하게 경찰이나 구청공무원에 납치되거나 인신매매 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최씨도 그중 하나였다.

지옥

 50여일 동안 국회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텐트.
 50여일 동안 국회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텐트.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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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손을 비비던 그는 형제복지원 시절을 떠올리며 스스로 정신병자가 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했다.

"14살에서 18살이면 사춘기나 청소년기 아입니꺼. 학교에서 한창 많이 배울 나이인데 거기 안에 들어가서 강간당하고 매일같이 두드려 맞고... 강간을요. 내 아직도 기억납니다. 들어간 첫날, 거기 좀 힘 있는 소대장이나 어른들한테 항문을 따였으니까네. 거기서 어리고 예쁘장하게 생긴 애들 치고 윤간 안 당해본 아가 없었습니더. 남녀동이 따로 있었으니까. 제가 그렇게 한 1년 반 동안 소대 안에서 여자 구실을 하고 살았어요. 밤만 되면 소대장 옆에 불려가가꼬."

도망도, 자살도 실패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항문이 파열돼서 완전히 뭐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더라고요. 이렇게 죽느니 차라리 도망가자 싶어서 도망도 가봤는데 붙잡혀서 또 죽을 만큼 맞았지요. 거기선 죽으면 그냥 묻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러고 나서는 도망갈 생각은 더는 못하겠더라고요. 죽어버리려고도 몇 번 했는데 번번이 끌려가서 또 맞고, 또 맞고..."

복지원에서의 일상은 지옥이었다. 그는 복지원 '형'들로부터 생니를 많이 뽑혀 30대부터 틀니를 사용했다고 했다. 끝없는 세뇌작업과 폭력, 기합, 제식훈련, 복지원 내 공사장 작업, 철공·목공·봉제·신발·나전칠기 공장 등에서의 혹독한 강제 노역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그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꺼. 아이고 참, 힘들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좀 편하게 살고 싶은 긴데..."

그의 호흡이 가빠졌다.

괴물

 50여일 동안 국회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씨.
 50여일 동안 국회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씨.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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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1986년 10월, 그동안 그를 찾아왔던 아버지와 친할머니에 의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입소한 뒤 어느덧 그와 똑같이 길거리에서 붙잡혀 형제복지원에 보내진 친동생과 함께였다. 그러나 성장기 4년이 넘는 형제복지원에서의 세월은 이미 그를 깊숙이 잠식해있었다. 그는 사회가 무서웠다.

"괴물이 된 거죠. 나도 너무 폭력적으로 변해버린 거죠. 처음 나왔을 땐 성정체성도 혼란했었고... 거기서 맨날 패고 강간하고 그런 거만 보니까네 안 그랬겠습니꺼? 그러니까 스무살 이후부터는 할 게 깡패밖에 없더라고예. 중간에 세상이 싫어서 외국도 나가봤고 배도 타봤는데 사회를 모르니까 전부 이용만 당하고 착취당하고. 그냥 조직폭력배 생활할 수밖에 없더라고예."

그는 특히 경찰만 보면 "미쳤다"고 했다. 어릴적 자신을 형제복지원으로 잡아간 데에 대한 분노였다. 주먹 좀 쓸 적에 경찰만 보면 미친 듯이 달려가 두들겨 팼다는 그는 공무집행방해죄만으로도 전과 20범은 족히 될 것 같다며 멋쩍어했다. 밥을 안 먹었다니 텐트 구석구석 쟁여둔 컵라면에 스팸, 김치, 찰밥까지 내어주는 그의 모습과 비교해 상상이 되지 않았다.

- 지금도 바로 옆에 경찰들 있는데 괜찮으세요? (국회 정문 앞엔 경찰들이 항상 보초를 선다)
"에이 지금은 괜찮습니다. 이젠 다 나쁜 놈이 아니란 걸 아니까네. 허허."

셀 수 없이 교도소를 들락거리던 그가 마음을 다잡게 된 건 동생의 자살 소식이었다.

"동생이 사회 나와서 한탄을 많이 했어요. 결국은 형제복지원 이후 겪은 후유증이죠. 트라우마고. 2009년에 결국은 자살을 하더라고예. 그러고 나니까 나도 죽고 싶어서 몇 번 시도했는데 어떻게 매번 살아나버렸어요. 그냥 문득 정신 차려야겠다 싶더라고예."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알게 된 트라우마 전문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았다. 현재 기초생활수급자이지만 '형제복지원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후원금을 받지 않는다고도 했다. 피해자로서 스스로 싸우는 게 당당하고, 마음도 건강해져 요새는 영어 공부와 연극 공부에 흠뻑 빠졌다고 했다. 모질었던 삶을 말하는 동안에도 그는 넉넉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무력함, 그러나

 50여일 동안 국회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최승우씨.
 50여일 동안 국회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최승우씨.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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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해요. 진상규명 해달라는 겁니다. 우리 문제에 관심이 뜨겁다가 또 서서히 식어가니까네 시위, 기자회견, 단식, 삭발, 국토대장정... 우리도 안 해본 게 없었지예. 얼마 전에는 청와대까지 갔는데 법을 만드는 데는 국회니까 국회로 가라카대예. 그래서 또 여기 있는 거 아입니꺼.

국가 폭력이잖아요. 국가가 우리 인생 망쳐놨는데, 왜 피해자가 여기 추운데 있어야 되는 건지... 아까 말한 그 라이터로 내 지져부린 게 결국 국가 아입니꺼? 여기서 국회만 보면 아주 속에서 열이 난다 아입니꺼."

사실 최씨와 같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차례 언론과 출판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2014년 즈음 본격적으로 여론화된 형제복지원 사건은 그 충격적인 내막에 많은 이들이 공분하면서 사회적 주목도 크게 받았다.

그러나 최씨 말대로 변한 건 없었다. 여론의 관심 속에 지난 19대 국회 때 발의된 진상 규명법은 공전만 거듭하다 결국 폐기됐고, 20대 국회 들어서도 관련 법들의 진행 사항이 아직 더디다.

심지어는, 이렇듯 형제복지원 사건이 여론화된 지 1년 뒤, 2년 뒤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는 내용의 후속보도 또한 숱하게 나와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직도, 정말로, 변한 건 하나도 없다고 써야 하는 이 무력감. 최씨가 다시 국회 앞에 누웠다고 알리며 느끼는 조금의 좌절감. 이때, 최씨의 마지막 외마디.

"그때 기자님이라켔지요? 사회를 좀 바까주이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 다음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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