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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서부의 역사적인 도시 낭트(Nantes). 나는 낭트 출신의 한 장군이 이름을 남긴 광장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낭트의 구시가를 천천히 구경하면서 라 시갈(La Cigale) 레스토랑 서쪽 블록으로 더 걸어 들어갔다. 내 눈 앞으로 사면이 건축물들로 둘러싸인 큰 마당 같은 광장이 나타났다.

건물들로 둘러싸인 광장 안에 노랗게 물든 활엽수들이 도열해 있다.
▲ 캉브론 광장. 건물들로 둘러싸인 광장 안에 노랗게 물든 활엽수들이 도열해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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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낙엽이 물든 덩치 큰 활엽수들이 광장을 호위하고 있었다. 샛노란 가로수들은 특이하게도 모두 사각형 모양으로 가지치기가 되어 있었다. 괜히 나무를 괴롭히는 듯한 가위질이지만 사각형 나무 모양이 묘하게 몽환적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넓은 공원 같이 생긴 광장의 이름은 캉브론 광장(Cours Cambronne)이다. 나는 광장의 중심에 우뚝 선 한 장군의 동상까지 걸어갔다. 이 광장을 규정하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장군의 이름은 피에르 자크 에티안 캉브론(Pierre Jacques Étienne Cambronne, 1770~1842). 캉브론 장군은 나폴레옹(Napoléon I)이 키워낸 나폴레옹의 장군이자 정통군인이었다.

캉브론 장군은 나폴레옹의 전쟁에 20년간 빠짐없이 참가한 장군이다.
▲ 캉브론 장군 동상. 캉브론 장군은 나폴레옹의 전쟁에 20년간 빠짐없이 참가한 장군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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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전쟁에 20년간 빠짐없이 참가한 그의 동상을 보면 치열한 전투를 거듭했던 그의 흔적이 사실대로 묘사되어 있다. 전투에 앞장 섰던 그가 사용하던 전장의 지휘봉이 중간이 부러져 있는 모습으로 재현된 것이다. 그만큼 그가 투입된 전투가 처절했음을 동상을 통해 나타내고 있었다.

캉브론 장군은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황제로 복귀한 후 벌어졌던 워털루 전투에 자원해서 참전했다. 그는 당시 나폴레옹 근위대의 지휘관이자 대장이었다. 그가 지휘했던 나폴레옹 황제의 근위대는 '싸움의 달인', '전투의 베테랑'으로 이름을 날리던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군 주력부대는 영국군과 프로이센 군에 의해 어이없이 격파되어 대학살의 제물이 되었다. 최후의 순간에는 오직 캉브론의 근위대만이 나폴레옹 곁에 남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마지막으로 그가 그토록 아꼈던 근위대 병력을 전장의 들판에 투입하였다. 승리가 불가능한 패전의 입구에서 캉브론이 지휘하는 150여명의 근위병들은 후퇴하지 않고 결연히 항전했다고 한다.

‘프랑스 황제 근위대는 죽을지언정 결단코 항복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 장군 동상의 문구. ‘프랑스 황제 근위대는 죽을지언정 결단코 항복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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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전면에는 짧은 글이 남아 있었다. 캉브론 장군의 이름을 적어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보았더니 캉브론 장군이 워털루의 전장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었다.

"프랑스 황제 근위대는 죽을지언정 결단코 항복하지 않는다.(La garde meurt mais ne se rend pas.)"

프랑스 근위대를 포위하며 항복하라고 외친 영국군에게 캉브론 장군이 맨 앞에 나서서 결연하게 응답한 말이었다.

캉브론의 이 말은 당시 프랑스 국민들에게 전해져서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캉브론은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유럽에도 가짜 뉴스가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캉브론이 이 말을 부인한 지 얼마 후에 또 한번의 반전이 일어났다. 그가 영국군에게 한 대답은 그게 아니라 다른 말이라는 이야기가 파리에 널리 퍼졌고 국민들에게 더 깊은 인상을 안겨 주었다. 그는 "그대의 항복 요구에 대한 나의 답변은 다섯 글자다. '엿 먹어라(MERDE)'"라고 소리 질렀다고 한다.

이 캉브론의 한마디에 대해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이 말은 프랑스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격찬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프랑스 전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유럽을 호령하다가 졸지에 패전국이 되어버린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살려주었던 한마디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민족이나 이민족과의 전쟁에 결사항전한 위인들에 대한 사랑은 남다른 것 같다.

캉브론과 그의 근위대 병사들은 영국군에게 욕을 해가며 결연히 항전했기 때문에 모두 전멸당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예상 밖으로 그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명성이 자자한 프랑스 전사들을 영국군도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캉브론은 이 워털루 전투가 끝난 뒤에도 18년을 더 살다가 사망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가 살아난 캉브론은 고향 낭트에 동상으로 남아 오늘도 낭트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캉브론이 프랑스의 역사적인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던 19세기 초반은 프랑스 국력이 최고조로 달했던 전성기였다. 그 당시 유럽을 제패했던 프랑스는 해상무역이 번성하였고 당시 낭트는 프랑스의 해상무역 중심도시였다. 나는 프랑스 전성기의 흔적을 찾아 다시 낭트 구시가의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프리카와 신대륙을 오갔던 무역의 도시답게 낭트에는 다양한 대륙의 맛이 어우러진 음식문화가 그대로 남아있다. 무역 전성기의 낭트에서는 바다 밖에서 수입한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드는 설탕산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설탕을 원료로 만들기 시작한 낭트의 과자는 프랑스 내에서도 명성이 널리 퍼져 나갔다. 다행스럽게도 낭트의 과자들은 낭트 구시가 역사 오랜 과자 가게들 안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1850년에 창업한 낭트의 유명한 과자 가게이다.
▲ 고티에 드보트. 1850년에 창업한 낭트의 유명한 과자 가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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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850년에 창업했다는 낭트의 한 유명한 과자 가게를 찾아 나섰다. 19세기 중반에 프랑스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사탕인 베를랭고 드 낭트(Berlingot de Nantes)를 판매하는 과자가게이다.

나는 가이드북에 표시된 주소를 따라 포세 거리(rue de la fosse)를 찾아갔다. 평소에도 외국 도시에서 길 찾기를 즐겼지만 왠일인지 가이드북의 주소에는 이 과자가게가 없었다. 포세 거리 근처를 2바퀴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결국 가이드북을 접고 핸드폰으로 구글 지도를 켠 후 가게 이름을 입력했다. 구글 지도를 보며 찾아가다 보니 과자가게는 가이드 북과는 전혀 다른 주소가 입력되어 있었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결국 나는 고티에 드보트(Gautier Debotté) 가게를 찾게 되었다.

나는 한껏 기대를 안고 고티에 드보트의 문을 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시간여행 영화의 19세기 환상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이 가게 건물의 천장과 벽에는 온통 장식이 화려한 루이 필립(Louis Philippe) 양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역시 낭트는 과자가게 하나만 보아도 문화적으로 저력이 있는 도시였다.

가게 천장과 벽면에는 다양한 포즈의 천사상들이 가득 차 있다.
▲ 고티에 드보트 내부장식. 가게 천장과 벽면에는 다양한 포즈의 천사상들이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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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지나 색은 바랬지만 목재 벽에 어두운 갈색으로 남은 천사상이 가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게의 천장 아래 네 벽면에는 다양한 포즈의 예쁜 천사상들이 가득 차 있었다. 새가 나는 꽃밭 속의 어린 천사상들은 과자 가게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렸다.

동그란 원형의 가게 천장에는 넓은 여백 속에서 새 2마리가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당시 19세기 유럽의 화단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동양의 풍경화 이미지가 이 천장에도 그대로 차용되고 있었다. 19세기가 그대로 남은 과자 가게 천장에서 노니는 새 2마리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풍경의 전개에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잠시 헷갈렸다.

고티에 드보트 가게 안을 둘러보니, 가게 안의 과자들은 브르타뉴(Bretagne) 현지에서 생산되는 밀가루와 설탕 등을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졌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과거에 사용하던 조리법과 과자 제조법을 존중하고 전통생산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아름다운 가게였다. 나는 이 사랑스러운 장인정신을 가진 가게의 수많은 과자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가게는 초콜릿 종류만 해도 10여개가 될 정도로 다양하다.
▲ 고티에 드보트 초콜릿. 이 가게는 초콜릿 종류만 해도 10여개가 될 정도로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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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게에서 주로 팔고 있는 과자는 생과자, 초콜릿, 사탕이다. 이 과자가게에서 현재 가장 많은 판매수량을 자랑하는 제품은 초콜릿으로 보였다. 이 가게 선전문구에도 고티에 드보트의 명물 초콜릿이 당신을 유혹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초콜릿을 먹으며 탐욕과 휴식을 즐기라는 돌발적인 광고문구는 분명 자신들이 만드는 초콜릿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왔을 것이다.

고티에 드보트의 초콜릿은 크리올로(Criollo) 카카오 등 최상의 재료만 사용해서 만들어진다. 이 가게는 초콜릿의 종류만 해도 10여 개가 될 정도로 다양했다. 가게의 유리 진열대 안에는 초콜릿이 종류별로 쌓여 있는데 얼마나 많이 팔리는지 책이 쌓여 있듯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선물용으로 박스 포장이 된 초콜릿 몇 개를 산 후, 그 중 한 개를 따로 풀어서 먹어보았다. 이 가게의 초콜릿은 방부제나 첨가제는 일절 넣지 않아서 그런지 건강한 맛이 느껴졌다. 초콜릿은 코코아 콩의 품종에 따라 향과 풍미가 달라지는데 크리올로 카카오를 사용한 고티에 드보트 초콜릿은 단맛이 강하지 않고 약간 쓴 카카오 맛이 입 안에 퍼졌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탕이다.
▲ 베를랭고 드 낭트.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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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티에 드보트의 대표적인 과자인 베를랭고 드 낭트(Berlingot de Nantes)는 동그란 철제 케이스와 비닐봉지에 가득 담겨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삼각형 모양의 이 사탕은 설탕을 뒤집어 쓴 듯 표면이 희끗희끗했다. 과자는 분홍색, 갈색, 연두색, 노란색의 다양한 파스텔 톤 색상으로 은근히 식욕을 자극했다.

나는 보기만 해도 달달해 보이는 베를랭고 드 낭트 사탕 봉지 하나를 샀다. 과자에서는 색상 별로 다른 향이 났다. 내가 산 베를랭고 드 낭트에서는 강한 민트 향이 났다. 마치 다양한 손님들이 좋아하는 향을 색색으로 입혀서 사탕을 만든 것 같았다. 나는 편안해 보이는 한 종업원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 작은 사탕을 진정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 베를랭고는 무엇으로 만드나요?"
"베를랭고는 설탕으로 만들어요. 우선 설탕을 뜨겁게 끓인 후 뭉치기를 반복합니다. 그 후에는 또 늘이고 겹치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면 잘 된 설탕 반죽이 만들어지지요. 이 설탕 반죽을 비비 꼬아서 만든 사탕이 베를랭고입니다."

"지금도 낭트 시민들은 이 베를랭고를 많이 먹습니까?"
"그럼요. 낭트 시민들은 이 베를랭고를 현재도 즐겨 먹습니다. 지금은 이 사탕이 초콜릿이나 케이크에 인기가 뒤지지만 19세기에는 프랑스에서도 이 베를랭고의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선물용으로 판매 되는 포장 과자세트가 가득 쌓여 있다.
▲ 고티에 드보트 선물. 선물용으로 판매 되는 포장 과자세트가 가득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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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자가게의 대표 과자인 베를랭고 뒤편에도 수많은 과자들이 산같이 쌓여 있었다. 우리나라 엿처럼 끈적끈적한 캔디인 몽텔리마르 누가(Montelimar nougat)는 과자의 귀족인 듯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수제 마카롱, 시럽과 레몬이 담긴 케이크, 발렌시아(valencia) 아몬드를 쪼개서 넣은 비스킷, 알맞게 구워진 생과자, 다양한 파이(pie)도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고티에 드보트의 모든 과자를 다 사서 맛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프랑스 아주머니들이 전설의 과자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 고티에 드보트 손님들. 프랑스 아주머니들이 전설의 과자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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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안에서는 프랑스 아주머니들이 긴 줄을 서서 베를랭고와 초콜릿 선물을 사고 있었다. 가게 종업원들은 차분하면서도 친절했다. 바빠 보이는 종업원들은 짜증나는 표정도 아니고 과하게 친절하지도 않았다. 과자 가게에서 과자의 옛 스토리를 들으며 즐겁게 줄을 서는 손님들을 겪으며 직원들도 손님들에게 동화된 듯했다.

이 가게의 종업원들은 차분하면서도 손님들에게 참 친절하다.
▲ 고티에 드보트 종업원. 이 가게의 종업원들은 차분하면서도 손님들에게 참 친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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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가게에서 지나간 19세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달콤한 과자까지 맛볼 수 있으니 이 역시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가져다 줄 과자 선물 꾸러미가 내 옆에 있으니 이 역시 행복이 아니겠는가?


태그:#프랑스, #프랑스 여행, #낭트, #고티에 드보트, #베를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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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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