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작품 포스터, 이 영화는 하드보일드를 표방한다. 살인에서 오는 끔찍함이 아니라 우리 삶과의 유사성에서 불쾌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매운 맛이 고통의 한 종류라는 걸 아는가? 이 영화는 불쾌한 '매운 맛'이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작품 포스터, 이 영화는 하드보일드를 표방한다. 살인에서 오는 끔찍함이 아니라 우리 삶과의 유사성에서 불쾌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매운 맛이 고통의 한 종류라는 걸 아는가? 이 영화는 불쾌한 '매운 맛'이다. ⓒ 쇼치쿠


복수는 나의 것. 이 짧은 문장을 마주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드는가.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박찬욱 감독의 2002년 작을 떠올릴 것이다. 거기서 영화를 '조금 더' 사랑한다면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1979년 작을 떠올릴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길, 박찬욱의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에서 제목을 따왔다. 복수라는 테마에 맞게 두 작품 모두 싸늘함이 감돈다. 하지만 이마무라 쇼헤이의 것이 조금 더 어렵다. 혹시 지금 "박찬욱의 영화도 어려운데 그것보다 더 어렵다니!"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위의 질문은 그것을 위한 것이다. 두 작품을 보고 나면 보기 전보다 영화 제목의 의미가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니까.

이 영화는 눈 뜨고 볼 수 없다. 어쩌면 '끈적하다'나 '혐오스럽다'라는 표현을 쓸지도 모른다. 마치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생낙지를 씹어먹는 것처럼. 단순히 살인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 아니다. '에노키즈 이와오'의 살인은 이유도 없고 결과도 없다. 오로지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 그런데 순수한 형태의 악도 아니다. 분명 그 속에 무언가 있긴 한데 '복수'는 아니다.

영화의 제목을 보면 에노키즈가 복수를 위해 움직여야만 하지 않나. 우리는 미치도록 궁금하다. 괴물보다 '살인 기계'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그의 모습이 왜 복수귀로 보이는지.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뒤죽박죽'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이미 범인이 잡혀있다. 형사와의 대담을 통해 과거 회상이 나오는데, 순서대로가 아니다. 현재를 A라고 놓았을 때 A 다음 F, 그다음 C와 Z 그리고 G나 D가 나오는 식으로 이어진다. 편집의 힘이겠지만, 단지 편집에 의존해서는 그런 흐름이 나올 수가 없다.

감정은 형용할 수 없는 것, 이 영화도 그렇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 에노키즈는 아내가 아버지와 정분관계에 있음을 의심하고 있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 에노키즈는 아내가 아버지와 정분관계에 있음을 의심하고 있다. ⓒ 쇼치쿠


감정이란 무엇인가. 사전의 정의는 '오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 눈으로 봐도 믿을 수 없는 게 있는데 눈(오감)을 제하면 믿을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감정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자기 자신의 것이라 해도 그렇다. 숱한 영화들이 그러한 것을 다른 이미지와 결부해 말하곤 한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종교에 빗댄다. 어떻게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떻게'라는 물음이 종교의 덧없음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상일 감독의 <분노>는 주변인에 대한 의심이 자신에게로 향한다. 의심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나자 그동안의 의심이 '주관'에 갇혀 있지는 않았는지 자책하게 된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도 그런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보통 복수라고 함은 '내가' '원한을 가진 상대'에게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나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누군가와' 함께 할 수도 있고, '원한 없는 상대'를 해할 수도 있다. 전자는 청부살인 같은 것이며 후자는 묻지마 살인에 해당한다. 전자는 박찬욱이고 후자는 이마무라 쇼헤이다. 묻지마 살인으로 잡힌 범인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나를 싫어하고 피해를 주어 범행을 했다고.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논리는 개인을 단체로 확대해석하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한 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한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 아버지는 자신에게 욕정을 품는 며느리를 애써 떨쳐낸다. 영화에서 그는 에노키즈와 같지만, 그런 점에서 다르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 아버지는 자신에게 욕정을 품는 며느리를 애써 떨쳐낸다. 영화에서 그는 에노키즈와 같지만, 그런 점에서 다르다. ⓒ 쇼치쿠


<복수는 나의 것>의 테마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느 한 편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뒤죽박죽이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영화의 흐름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한 것이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가 에노키즈를 우리에게 이해시키려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평탄하게 흐르다 점진적으로 높아진다. 감정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우리는 목을 죄어오는 압박감에 치를 떨게 된다. 그렇게 흘러넘치는 압박이 영화 전체, 인물 모두에게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영화가 '정말' 무서워진다.

작중에서 에노키즈의 과거는 2차 세계대전 말기, 초등학생 시절로 언급된다. 해군에서 나온 병사가 에노키즈 아버지에게 배를 바치라 요구한다. 바닷가에 살던 그의 가족에게 배는 곧 생명이다. 아버지는 완고하게 거부했고 병사는 그런 아버지를 폭행한다. 어린 에노키즈는 각목을 들고 병사를 쓰러뜨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해질 보복이 두려워 배를 상납한다. 어린 에노키즈는 그런 아버지를 겁쟁이라 부르며 엇나가기 시작한다.

문제는 다른 부분에 있다. 그때 아버지의 말처럼 "왜 가톨릭 신자에게만 배를 빼앗는지" 알 수 없다. 종교에 관한 부분은 영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니 그냥 넘어갈 수도 없다. 이 부분을 위에서 언급했던 <밀양>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해석이 나온다. 그들에게 종교는 마음의 안식처일 텐데 오히려 배를 빼앗기게 한다. 이 '종교'라는 단어를 '믿음'이나 '복수'로 치환해도 결과가 같다. 마치 밑 빠진 독처럼 감정을 채워 넣어도 금세 바닥나버리고 만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복수는 결코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한 덧없음으로 에노키즈의 살인은 계속된다. 에노키즈의 사망 후에야 복수의 고리가 멈출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 영화의 결말에 에노키즈의 아버지와 부인은 사형당한 에노키즈의 뼈를 산 아래로 던진다. 그런데 던져진 뼈가 화면 중간에 걸치는 순간 화면이 멈춘다. 그다음 장면은 당황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다. 다시 한번 뼈를 던져봐도 멈춤이 계속된다. 그렇게 두세 번을 반복한 후에 식겁한 아버지가 유골함을 통째로 던져버린다. 화면 전체가 얼어버리는 '프리즈 프레임' 기법은, 뼈뿐만 아니라 식겁한 두 사람의 얼굴도 그 순간에 고정한다.

지금껏 '길 가다가 살인을 목격한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정도의 사실성으로 달려오던 영화가 갑작스레 초현실적으로 바뀌어버리니 우리도 당황스럽다. 단언컨대 그건 에노키즈의 분노가 드디어 제자리에 왔다는 신호다. 영화 내내 들끓어 오르던 색욕과 분노는 에노키즈의 뼈가 멈춤으로써 제자리에 고정된다. 그러니까 에노키즈는 두 사람과 우리를 향해 '나를 평가하던 너희의 판단은 종교처럼 무상한 것'이라며 조롱하고 있다.

복수는 마지막에 남는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 에노키즈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해 보인다. 그는 우리 사회에 섞여든 무언가, 혹은 우리 자신에 섞여든 무언가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 에노키즈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해 보인다. 그는 우리 사회에 섞여든 무언가, 혹은 우리 자신에 섞여든 무언가다. ⓒ 쇼치쿠


에노키즈에게 아버지는 전쟁에 굴복한 개미일 뿐이다. 에노키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엇나간 것이니 반전(反戰) 캐릭터인 셈이다. 그렇다면 에노키즈의 살인은 전쟁의 광기에 굴복한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가 된다. 마음속 근심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맴돌고, 에노키즈도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한마디로, 에노키즈는 일본의 치부를 도려내려 하는 치료제 같은 역할이다. 그런데 에노키즈를 체포하려는 사회는 그가 그들의 손에 키워진 걸 모른다. 그들로서 에노키즈는 사회의 밖에서 자라난 종양이다. 영화 속에서 에노키즈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에노키즈는 전쟁 위로 쌓아 올린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이때 앞서 말했던 덧없음의 테마가 전쟁에 결합한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을 다시금 상기해보자. 왜 복수는 나의 것이 되어야 하는가. 분명 에노키즈의 행동은 굴복한 아버지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에노키즈는 아버지에게 복수하지 못한다. 에노키즈가 잡혀 감옥에 있을 때, 면회 온 아버지가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고 말하지만 에노키즈는 그에 답하지 못한다. 그는 살해 후에 둘러댈 핑계가 필요한 것뿐이다.

그 장면은 우리에게 많은 의문을 남긴다. 첫 번째로, 일반적인 폭력 상황에서는 단체가 개인을 압박하는 게 정상이다. 쪽수가 많으면 싸움에 유리하니까. 그런데 에노키즈는 개인이고, 사회에 대항하고 있다. 자신은 잘못 하나 없다며 시종일관 꿋꿋하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서 개인과 단체는 위치가 역전되어 있다. 두 번째로, 에노키즈의 살인은 덧없는 것이니 그는 그가 혐오하는 사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전쟁은 불특정 다수의 목숨을 빼앗고 에노키즈도 그렇다.

정말로 복수하는 것일까?

첫 번째 담론에서 에노키즈는 정말 신기한 캐릭터가 된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미국은 개인과 단체 정도로 격차가 컸다. 에노키즈가 개인이니 일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때 에노키즈는 반사회적 인물이 아니라 '영웅'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전쟁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에서 전쟁은 덧없음을 표현한다. 에노키즈는 홀로 세상과 전쟁하고 있으며 끝내 사형당한다. 그가 죽음으로써 덧없는 전쟁은 사라진다. 하지만 마지막에 얼어붙은 뼈가 계속해서 '덧없음'이 남아있을 것이라 말한다. 실제로 그렇다.

혹자는 그러한 덧없음을 '우연성'이라 부른다. 둘 다 비슷한 말이지만 맥락이 다르다. 덧없음이란 손아귀의 모래처럼 허무에 가깝다. 우연성이란 멋대로 행동하는 어린아이에 가깝다. 혹자가 우연성을 주장하며 대는 근거는 이렇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분)'는 자신만의 살인 철학이 있다. 우연성에 의존해 사람을 죽이고 그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고 말한다. 궤변이지만 그 영화에서 모든 것이 안톤 쉬거의 뜻대로 흘러가니 믿을 수밖에 없다. 안톤 쉬거는 우연의 필연, 필연의 우연을 주장하는 악마이다. 그러한 안톤 쉬거의 신념 자체가 하나의 필연에 해당한다. 마음속에 의도가 있으므로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에노키즈는 필연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길을 가다 만난 변호사를 죽이고, 잠시 들른 여관에서 사랑에 빠지는 우연만이 있다. 그래서 에노키즈의 73일 도주는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되지 못한다.

덧없음을 언급하는 건 불필요하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 두 사람은 에노키즈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 두 사람은 에노키즈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다. ⓒ 쇼치쿠


위에서 에노키즈를 전쟁에 빗대어 말한 걸 불편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확대해석이 맞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보아달라 말한다. 이 영화에서 에노키즈의 어린 시절은 사족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의도하는 건 에노키즈의 무차별적인 살인인데, 에노키즈의 어린 시절은 그에 이해할 만한 이유가 못 된다. 전시에 강제로 동원된 아버지를 동정하지는 못할망정 엇나가 버리다니. 두 번째 담론은 그것에서 비롯된다. 에노키즈는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을 닮아간다.

그게 바로 아버지와 사회다. 에노키즈는 해군이라는 거대한 단체에 굴복하는 아버지를 혐오하지만, 정작 자신도 일본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말하자면 에노키즈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과 닮았지만, 달라야만 하는 '거울상'이다. 서로 마주치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는 도플갱어 설화에서도 알 수 있듯, 에노키즈는 의도적으로 아버지를 회피한다. 정작 복수의 대상에 손을 대지 못하는 아이러니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 도플갱어라는 개념이 마치 자아분열처럼 보인다. 카를 구스타프 융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네 가지로 분류된다.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진 이분법, 그것은 각각 자아와 그림자로 나누어진다. 그중 우리가 먼저 마주하는 건 자아와 그림자다. 여기서 에노키즈는 의식하며 사는 '자아'이며 아버지는 무의식 속의 '그림자'다. 그러니까, 에노키즈가 아버지를 회피하는 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거다. 여기서 아버지는 자신보다 상위의 것, 즉 사회에도 해당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평생에 걸쳐 에노키즈를 따라다닌다. 손에 잡히지 않는 무의식 속, 굴복감을 등에 업고 에노키즈는 살해 활주극을 시작한다.

그런데 누구나 그렇다

이 영화에서 에노키즈만 이상한 건 아니다. 에노키즈의 아내가 에노키즈의 아버지에게 욕정을 품는다. 며느리는 온천욕 중인 아버지에게 다가가 등을 밀어준다 말한다. 아버지도 며느리의 가슴을 움켜쥐며 욕정이 통하는 듯했으나 금세 떨쳐낸다. 두 사람은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만나서는 안 된다. 이때 두 사람이 있는 곳, 여관이라는 장소(에노키즈 가의 가업이다)와 온천의 수증기는 뜨듯하고 끈적한 느낌을 준다. 작품 내에서 여관은 단순히 묵어가는 곳이 아니다. 도피 중인 에노키즈도 여관에 묵을 때마다 매춘부를 불러 섹스를 하곤 한다. 영화는 여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성을 공유하는 두 명의 '에노키즈'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내비친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물'의 이미지는 다르다. 아버지는 온천에서 여자를 떨쳐내고 아들은 피를 보며 여자를 취한다. 두 사람의 차이는 그것에서 귀인 한다.

작품에서 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징이다. 그 끈적함은 에노키즈에게 있어 '피'를 뜻한다. 알 수 없는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피다. '피 끓는 청춘'이라는 관용어구는 에노키즈의 살해 욕구를 대변한다. 에노키즈는 물 위를 떠가는 배로 도주하며, 살인할 때 비가 오기도 한다. 그 비는 작품 내에서 수시로 내린다. 그런데 비는 에노키즈의 손에 묻은 피를 지우지 못한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씻어내리는 게 아니라 '묻히는' 속성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에노키즈가 손에 묻은 피를 소변으로 씻는 장면이 섬뜩한 것이다. 분명 소변은 깨끗하지 않다. 그의 손은 더러운 것으로 깨끗해진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에노키즈에게 살인은 자신을 청결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도피 중에 여관에서 눈맞은 여인은 에노키즈가 수배범인 것을 알고도 지지해준다. 에노키즈는 경찰에 잡힐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여인을 목 졸라 죽인다. 자신을 숨겨준 여자라는 치욕을 겪게 하지 않기 위함이다. 이것으로 에노키즈가 자신의 죄책감을 피로 씻어 내린다는 게 증명된다. 에노키즈의 살해극은 아버지, 사회로부터 청결해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에노키즈가 마른 강가를 가득 메운 뱀장어 떼를 쳐다보던 건, 그 무리에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그 뱀장어는 남성기의 이미지보단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덧없음

뱀장어는 맨손으로 잡기 힘들다. 온몸에 점액이 있어 금세 빠져나간다. 물고기에게 물은 삶의 터전이자 호흡의 수단이다. 그러니 물이 조금만 더 마르면 강도 점액도 말라 잡히고 말 것이다. 다시 한번 반복, 에노키즈는 맨손으로 잡기 힘들다. 온몸에 분노가 있어 금세 빠져나간다. 에노키즈에게 피는 삶의 터전이자 호흡의 수단이다. 그러니 피가 마르면 삶도 분노도 말라 잡히고 말 것이다. 에노키즈가 경찰서에 잡혀 온 영화 초반부터 그는 태연하기 짝이 없다. 마치 목숨이 여러 개인 사람처럼. 그는 그 거친 살해극의 끝이 말라가는 강바닥임을 알았던 것일까. 주변엔 자신과 같은 모습의 뱀장어밖에 없다. 아무리 퍼덕여도 살아나갈 수 없다. 복수는 그 끝에 남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이마무라 쇼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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