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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 풍영정.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 풍영정.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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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지도자의 어리석은 결정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을 무참하게 희생시켰는지를 보여주었던 영화 <남한산성>의 원작자, 김훈은 그의 산문집 <자전거 여행>에서 남도의 정자, 식영정· 소쇄원· 송강정· 명옥헌· 취가정을 둘러본 감회를 피력했다.

16세기 호남의 이름난 누정(樓亭)들은 조선 중기 '당쟁과 사화(士禍)'가 중앙정치를 휩쓸고 지나간 잔혹한 역사의 산물이라고 했다. "불우한 자들이 낙원을 만들고 모든 낙원은 지옥 속의 낙원이다"라고 했다.

상당 부분 공감한다. 작가의 눈으로 보는 남도의 정자들은 대부분 '불우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살벌하고 엄혹했던 현실 정치에서 패퇴했거나 소외당한 호남의 선비들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귀향하여 세운 정자(亭子)는 '지옥 속의 작은 낙원'이었을 것이다.

강력한 개혁정치로 '현실의 낙원'을 건설하려 했던 스승 조광조를 기묘사화로 잃은 양산보(1503~1558)는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한탄하며 소쇄원에 '자연의 낙원'을 만들어 묻혀 지냈다. 광해군의 폭정과 패륜정치에 환멸을 느낀 명곡 오희도(1583~1624)는 명옥헌을 지어 현실정치와 연을 끊고 은둔했다.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당한 송강 정철(1536~1594)은 송강정에서 '사미인곡'을 불러대며 임금이 성은을 내려줄 '그날'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세월을 보냈다. '낙원이되 지옥 속에 있었던' 셈이었다.

‘천국 가는 계단’의 끄트머리에  바람(風)의 정자가 매달려 있다
 ‘천국 가는 계단’의 끄트머리에 바람(風)의 정자가 매달려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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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돌아가리, 내 그림자 길게 드리운 곳으로

자칫하면 삼족(三族)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살얼음판 같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밀려났던 처사들이 머물던 '유배의 집'과는 성격이 다른 '진정한 낙원'이 있다. 아수라장 같은 정치판을 벗어나 온전히 자연경관과 시문을 벗 삼아 편안하게 노후를 살다 간 선비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 '풍류의 정자'가 있다.

담양 가마골에서 발원한 극락강(極樂江)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을 휘돌아나가고 있다.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위를 느림보 완행열차가 지나가고, 멀리 '광주의 어머니' 무등산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온다. 극락강과 선창산이 마주치는 강변의 높은 대지, '극락의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정자 풍영정(風詠亭)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으로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다.

풍영정의 주인 칠계 김언거(漆溪 金彦琚 1503~1584)는 근처 도화동(桃花洞) 마을에서 증사헌부 집의(曾司憲府執義)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31년에 문과중시에 오른 뒤 옥당에 뽑혀 교리·응교 등 내직을 거쳐 상주·연안 군수와 승문원 판교(정3품)를 마지막으로 1560년(명종 15)에 정년 퇴임하여 정계를 떠나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풍영정에서 바라본 극락강의 모습. 도시화와 4대강 사업으로 옛 운치를 찾아볼 수 없다
 풍영정에서 바라본 극락강의 모습. 도시화와 4대강 사업으로 옛 운치를 찾아볼 수 없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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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시인의 '낙화'처럼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온 행복한 사람이다. 김언거는 고향에 있는 극락강의 옛 이름인 '칠계'를 자신의 호로 사용할 정도로 이곳을 그리워했다. 그의 붓은 중앙 정계에 있었지만 그림자는 늘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칠계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풍영정'이라 부른다. '풍영(風詠)'은 <논어>의 '선진(先進)'편에서 차용해왔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에게 소원을 물었다. 이에 제자 중 한 사람인 증점이 대답하기를 "맑게 흐르는 기수(汽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며 노래를 읊조리며 돌아오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풍우영귀(風雩詠歸)',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읊조린다는 뜻이다. 기수와 무우는 춘추시대의 전설 속에 나오는 곳이다. 아마도 이정자를 지은 김언거가 평생 꿈꾸던 '이상향'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풍류처사(風流處士)'들의 유토피아

알싸한 바람을 따라 '바람(風)의 정자' 입구에 다다른다. 그만그만한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계단이 허공을 향해 쭉 뻗어 있다. 문득, 전설의 록밴드 레드제플린의 <천국 가는 계단>이라는 노래가 오버랩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저만치 허공의 끝에 낙원이 걸려 있다.

댓돌을 딛고 정자에 올라서니 수많은 제영 현판(題詠懸板)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어림잡아 70여 개쯤 되는 편액들이 서까래 밑과 들보 사이사이에 걸려있다. 고색창연한 단청과 잘 어울린다. 발밑으로는 극락강의 물줄기가 게으르게 굽이치며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져 자연 속의 시화전이 펼쳐지고 있다.

풍영정의 콘텐츠, 정자 내부에 약 70여 개의 제영 현판이 걸려 있다
 풍영정의 콘텐츠, 정자 내부에 약 70여 개의 제영 현판이 걸려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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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에서 은퇴하고 돌아온 김언거는 퇴계 이황· 주세붕· 송흠· 송순· 김인후· 기대승· 임억령· 고경명 등 내로라하는 시인묵객들과 교유하면서 시를 짓고 자연과 벗 하며 학식을 넓혔다. 극락강과 선창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넓은 들녘에서 넘실대는 황금물결의 넉넉한 인심은 수많은 '풍류처사(風流處士)'들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명류(名流)들의 왕래는 자연스럽게 많은 시문을 낳았고 그 흔적들이 지금까지도 오롯이 남아 '풍영정을 대표하는 콘텐츠'가 되었다. 그중에서 먼저 정자 주인 김언거의 속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자.

벼슬길에 있으면서 편히 쉬지 못했는데/ 높은 각에 올라서니 모든 근심 사라지네/ 노 젓는 사공의 외로운 얼굴 달빛 아래 비치고/ 물을 찾는 기러기떼 소리 바람에 차갑도다/ 이름 있는 이 지역 한없이 화려하니/ 지나가는 길손들이 찾아와서 머무르네/ 난간에 기대앉아 노 선비들의 시편 바라보니/ 칠수 나산이 천만추를 이어가리

뒤편 가운데 서까래 밑에 걸려있는 반듯한 서체의 편액 하나가 눈에 띈다.  지은이가 낯설지 않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1533~1592)의 풍영정 차운시가 걸려 있다. 고경명은 관직의 소임을 무사히 마치고 향리로 돌아와 쉬고 있는 고향 선배가 무척이나 부러웠을 것이다.

돌아가 쉬겠다던 이 내 몸은 쉬지를 못하는데/ 높이 누워 즐긴 사람 무슨 근심 있을 쏜가/ 한가한 몸이 되어 맑은 운수 희롱하고/ 우리도를 붙잡아서 창주처럼 밝혔도다/ 갈대 사이 가는 비에 고기 어망 거두었고/ 벼슬에 미풍 일면 꾀꼬리 소리 듣네/ 도산에게 말 전해도 응당 수긍할 것이니/ 이제부터 봄가을을 아니 잊고 찾아오리

전설 속에 등장하는 풍영정 현판, 風자가 나머지 글자들과 달라 보인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풍영정 현판, 風자가 나머지 글자들과 달라 보인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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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진 '風'

당시 이곳에는 풍영정 외에도 11채의 정자가 더 있었다. 은퇴하고 돌아온 김언거를 환영하며 고향 사람들은 이 근처에 11채의 정자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나머지 정자들은 임진왜란 때 화마를 입어 없어지고 풍영정만 남아 있다. 불을 이겨낸 풍영정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풍영정 현판에 관한 이야기가 그럴싸하다. 김언거의 소식을 전해 들은 명종(明宗)은 정자의 현판 글씨를 전라도 무주 구천동에 기거하는 명인, '갈처사'에게 받아 걸라고 권한다. 김언거는 기쁜 마음으로 갈처사를 찾아갔으나 여러 번 헛걸음을 하였고 열세 번이나 찾아간 끝에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갈처사는 칡넝쿨로 붓을 만들어 글씨를 써주며 가는 길에 절대로 펴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한 칠계가 그만 봉투를 펼치는 순간 '風' 자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놀란 김언거는 돌아가 갈처사에게 다시 써줄 것을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그의 제자인 황처사에게 '風' 자를 받았다. 지금도 현판을 자세히 보면 '風' 자는 나머지 '詠'과 '亭' 자보다 자획이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조선 최고의 명필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현판
 조선 최고의 명필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현판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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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8경 중의 한 곳인 풍영정의 현모습은 도시화로 인한 고층 건물들과 4대강 치수사업으로 옛 운치를 찾아볼 수 없다. 정자의 제일 높은 마룻보에 걸려있는 조선 최고의 명필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扁額)만이 이곳의 풍광이 호남에서는 제일 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풍영정은 조선 중기, 붕당정치 시기에 정치적 암투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켜나 있었던 청고한 선비들의 '파라다이스'였다.

권력의 단맛에 취한 채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한 '한물간 인사, 일수거사(一水去士)'들의 추한 말년의 모습이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는 요즘이다. 430여 년 전 권력을 놓고 미련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거문고와 시문을 벗 삼아 행복한 노후의 삶을 살다 간 옛 선비는 풍영정 난간에 기대앉아 오늘의 후손들에게 일갈하고 있다. '성공신퇴(成功身退)· 성공자거(成功者去)', "공을 이룬 사람들은 그 시기를 알고 물러나야 근심이 없다"라고.


태그:#풍영정, #칠계 김언거, #성공신퇴, #극릭강, #영산강 8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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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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