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덕현 대표
 김덕현 대표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대한민국 와인기행] 충북 영동 컨츄리 와인에 가다 ①에서 이어집니다.

컨츄리 와인에는 다른 와이너리에 없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저온살균기다. 컨츄리 와인은 '자연주의 와인'을 만든다. 와인을 제조할 때 와인 산화와 변질을 막는 무수아황산과 솔빈산 등을 첨가하는데, 컨츄리 와인은 그걸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저온 살균 과정을 거친다. 와인을 병입한 뒤 73도의 더운 물에 와인을 담가 30분 동안 살균을 하는 것이다. 살균이 끝나면 코르크 마개로 와인 병을 닫고 냉각시킨다.

설명은 간단하지만 와인 양조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초파리를 비롯한 온갖 오염원으로부터 와인을 지키기 위한 컨츄리 와인만의 지난한 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힘겹게 제조한 와인이 한순간에 변질될 수 있으므로 섬세한 손길과 노력,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

김 대표는 최소한의 손길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려고 노력한다지만, 실제로는 다른 와이너리보다 와인 생산에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포도 수확이 시작되면 새벽 이른 시간에 포도를 으깨는 작업을 합니다. 늦가을에는 한낮에도 덥고 햇빛이 뜨겁잖아요. 그래서 이른 시간에 포도 파쇄 작업을 하는 거죠. 초파리나 공기 중의 다른 오염원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황산을 기준치 이하로 사용하면 문제가 없다는 와인양조 전문가들의 조언하지만, 컨츄리 와인은 다른 와인과의 차별화를 위해 쉽지 않은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김마정씨는 "아황산을 사용하면 와인양조나 관리가 훨씬 수월한 것은 아는데, 우리 집만의 원칙으로 삼아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면서 활짝 웃는다.

저온살균 과정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전부 수작업을 거치기 때문이다. 저온살균은 한꺼번에 많이 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1회에 40병 정도밖에 못 한다. 30분씩 70도로 저온살균을 한 뒤, 다시 와인을 냉각시키는 과정을 거치고 병뚜껑을 닫는다.

저온살균기
 저온살균기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저온살균을 거치는 과정에서 와인이 변질되지 않을까?

"와인에 열을 가했을 때 최대 단점은 부피가 늘어나면서 공기 접촉이 늘어 향을 빼앗기는 것인데, 이런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와인의 향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습니다. 와인을 만들어서 옮길 때 최대한 산소 접촉을 차단해서 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늘 신경을 많이 쓰고 있거든요."

김덕현 대표가 자신 있게 말한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시스템이지만 당분간은 이 시스템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생산설비를 늘리고 자동화설비를 갖춘다면 훨씬 생산효율이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김덕현 대표는 설비 증설을 서두를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지금은 좋은 품질과 맛을 지닌 와인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란다.

컨츄리 와인이 처음 주류제조면허를 취득한 것은 2010년. 그렇다고 그때 처음 와인을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컨츄리 와인의 와인 양조 역사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도를 재배하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집에서 포도주를 만든다. 집에서 마시기 위해서다. 마시다 남으면 이웃과 나눠 마신다. 그러면서 서로 포도주 맛을 비교하기도 한다.

컨츄리와인은 가족 경영 농가형 와이너리다. 왼쪽이 김마정씨, 가운데가 한춘화씨, 오른쪽이 김덕현 대표
 컨츄리와인은 가족 경영 농가형 와이너리다. 왼쪽이 김마정씨, 가운데가 한춘화씨, 오른쪽이 김덕현 대표
ⓒ 김덕현

관련사진보기


컨츄리 와인도 마찬가지였다. 가양주로 집에서 포도주를 담가 팔아왔다. 그러다가 2010년에 주류제조면허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와인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 주류제조면허를 받을 때만 해도 와이너리 시설규모는 7평 남짓이었다. 한 해 생산량은 2천 병 남짓. 매년 와인생산량을 늘려나가면서 한 해는 저온숙성실을 만들고, 다음 해에는 지하저장고를 만들며 착실하게 규모를 늘렸다. 컨츄리 와인의 목표는 와인을 만들어 팔되, 빚을 얻어 규모를 확장하지 않고 내실을 기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를 설정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이면에는 한춘화씨의 힘겨운 노력이 있었다. 김마정씨의 아내이자 김덕현 대표의 어머니인 한춘화씨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컨츄리 와인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컨츄리 와인의 기틀을 다진 사람이 한춘화씨였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춘화씨는 기억을 더듬어 20년 전으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이가 처음 컴퓨터를 배운 것이 그 즈음이었기 때문이다. 컴맹이었던 그이는 컴퓨터를 배우면서 인터넷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때 한창 유행하던 '다음 카페'에 가입해 시골살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면서였다.

"농사를 지으면서 힘겨웠던 이야기며, 시골살이를 수기처럼 써서 카페에 올렸어요. 시골에 살면서 겪는 이야기나 내 심정을 글로 쓰면서 살아가는 힘을 얻었던 거지요. 그때 닉네임이 '컨츄리 아낙네'였어요. 그런 글을 올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제 글을 읽어주셨고, 컨츄리 아낙네가 누구냐면서 관심을 가져 주셨어요. 그러면서 우리 집에 한 번 놀러오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한춘화씨
 한춘화씨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예기치 못한 곳에서 시작된 인연은 한춘화씨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카페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집으로 초청, 직접 담근 포도주 맛을 보여주었다.

"그때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나 신기할 정도예요. 지금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거 같아요. 카페 회원들을 한 번에 40~50명씩 초청해서 한꺼번에 닭은 40마리씩 삶고 찰밥을 해서 대접을 했어요. 포도주도 시음하게 하고. 그때는 와인이 아니라 포도주라고 했어요."

한씨의 손맛이 뛰어난 덕분일까? 아니면 마케팅 전략(?)이 적중했기 때문일까? 포도주를 맛본 사람들이 포도주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포도주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1.8리터 페트병에 포도주를 담아서 팔았는데, 한 해에 이천만 원 정도를 판 적도 있다.

"내가 직접 농사를 지어서 만든 포도주라서 당당했어요. 부끄럽거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어요. 그걸 팔아서 살아야했으니까. 그래서 한춘화라는 이름보다 컨츄리 아낙네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던 거예요."

그 이가 와인에 눈을 뜬 것은 2005년, 영동이 와인특구로 지정이 되면서부터였다. 영동군에서 와인아카데미를 열어 와인 양조교육을 시작했고, 한춘화씨와 김마정씨는 와인 교육과정에 참가하면서 와인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성큼 들어서게 되었다.

2010년, 주류제조면허를 낼 때 가장 고심한 것은 와이너리 이름이었다. 그때 한춘화씨의 닉네임 '컨츄리 아낙네'에서 이름을 땄던 것은 한씨의 노력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저한테 포도주는 살아가기 위한 탈출구이면서 꿈이고 희망이었어요. 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포도가 터지면 팔 수가 없어요. 그걸로 포도주를 만들어 팔았어요. 지금은 와인 교육을 많이 받아보니 와인도 좋은 포도로 만들어야지 향이 좋은 와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만 해도 팔고 남은 포도로 와인을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컨츄리와인 시음장
 컨츄리와인 시음장
ⓒ 유혜준

관련사진보기


이렇게 기초를 다지면서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한 컨츄리 와인에 김덕현 대표는 스물여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발을 들이게 된다. 와인산업의 전망을 밝게 예측한 아버지 김마정씨의 권유 때문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게 김 대표의 주장이다.

스물여섯 살은 새로운 도전을 꿈꾸기에 적당한 나이이지만,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도와 와인양조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기는 젊은 나이가 아니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 나이에는 시골보다는 도시가 더 좋잖아요. 계기가 있었죠. 영동에서 매년 포도축제가 열리는데 농가형 와이너리 네 곳이 와인시음을 하고 판매하는 부스를 운영했는데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던 거죠. 그때 사람들이 많이 와서 와인에 대해 묻고 사가는 것을 보면서, 한국와인이 앞으로 전망이 밝다는 확신을 갖게 된 거죠."

김마정씨 역시 젊은 아들을 시골로 불러들이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털어놓는다.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는 데 오히려 아들을 시골로 불러들이면 아들의 앞날을 막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했다. 2010년이면, 한국와인이 존재감조차 없던 때였으니 더욱 그랬다.

두 사람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김덕현 대표가 결합한 뒤, 컨츄리 와인은 한 단계 혹은 그 이상으로 도약하면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향으로 돌아온 김덕현 대표 앞에 닥친 현실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특히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양조를 하고 와인 판매를 하는 일은.

[대한민국 와인기행] 충북 영동 컨츄리 와인에 가다 ③로 이어집니다.


태그:#한국와인, #컨츄리와인, #김덕현, #자연주의, #영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