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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는 고유의 맛이 있다. 미나리는 미나리 맛이 있고, 달랭이는 달랭이 맛이 있다. 된장국을 끓일 때는 된장과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각 고유의 재료들은 그 나름의 맛이 있고 그 맛이 잘 어우러져야 맛있는 된장국이 된다.

된장국의 맛을 더 하기 위해 넣는 것이 조미료이다. 조미료는 맛을 더 좋게 하기 위해 넣기도 하지만, 너무 많이 넣어버리면 조미료 맛만 나고 기존 재료의 맛은 제 맛을 잃어버려 된장국 전체의 맛을 떨어뜨린다. 그런데 난 어느 순간부터 재료의 맛을 음미하기 보다는 침샘을 자극하는 조미료 맛에 더 길들여졌다. 그러다 보니 정작 그 재료가 가진 맛을 잃어버렸다.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면, 인생의 참맛을 잃어버리고 조미료에 찌들어 살았다. 나에게서 조미료란 술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술은 어쩌면 조미료와 같다. 술을 한잔하면서 사람을 만나다보면 처음의 어색함이 그 농도가 옅어져 관계가 훨씬 부드러워진다.

그런데 만남이 더 할수록 술이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되고, 만남보다는 술이 더 우선시 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제 맛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하고 술맛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인생을 살다보니,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 술 인생을 살게 되었다. 즉 조미료에 찌든 삶을 살아온 것이다.

술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다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몸은 몸대로 가정은 가정대로 일은 일대로 망가졌다.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몸은 몸대로 가정은 가정대로 일은 일대로 망가졌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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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들어가서부터다. 그 당시 신입생 환영회나 축제 기간 또한 동아리 활동에서 술이 없는 것은 된장국에 조미료가 없는 것과 같았다. 특히 글을 쓰는 동아리에서는 거의 매일 술자리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마신 술은 어느 새 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그때부터 술을 끊기 전까지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몸은 몸대로 가정은 가정대로 일은 일대로 망가졌다. 술이란 건 표시가 나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란 걸 몰랐다. 술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났고, 새로 시작한 사업도 술 때문에 망쳤다. 사업이 망하자 자포자기하여 더 술을 마셨다. 오죽하며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이

"영아, 술 먹지 마라."

였으랴. 하지만 그 유언까지 무시하고 술을 마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연로하신 어머님을 모셔야 하는데 아내가

"당신 술만 끊으면 제가 어머님 모실게요."

라는 말을 했지만 난 술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그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내 술 버릇을 닮아 아들도 폭음을 했다. 어느 날 아들과 내가 술이 취해 서로 치고 받고 싸웠고 누군가 112에 신고를 해서 경찰이 두 번이나 출동한 적도 있었다. 술 때문에 혈압이 220까지 올라갔지만 난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술을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2015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잠에서 깨어보니 번화가 편의점 앞이었다. 술이 취해서 그곳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던 것이다. 몹시 부끄러웠다. '도대체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이야'라는 생각이 들었고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아니 술에 찌든 생활에서 탈출하기로 했다. 그래서 금주선언이 아닌 탈주선언을 하기로 한 것이다.

금주선언 아닌 탈주선언

이제껏 술을 매개로 하여 사람을 만났는데, 그것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의 만남도 조미료 맛이 아닌 그 사람의 참맛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술맛이 아닌 그 얼굴에서 풍겨져 나오는 삶의 참맛을 가슴으로 음미하고 싶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술 속으로 도망칠 것이 아니라 고통이나 슬픔이나 기쁨이나 고독이나 즐거움이나 그것이 가진 자체의 맛을 깊이 느끼고 싶었다.

술을 끊자 세상은 달라보였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술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성장기 이후 겪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했다. 무엇보다 저녁에 내 개인 시간이 생겨서 좋았다. 내가 그 동안 하지 못한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한동안은 예전 같으면 술을 마실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가 막연했고 다시 술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재밌는 일을 찾아서 하자 며칠 지나니 술 생각이 많이 줄어들었다. 정 할 일이 없으면 헬스장엘 갔다. 운동을 하면 잠도 잘 오고 시간도 잘 갔다. 운동 후에 목욕탕 열기욕실에 앉아 있으면 몸이 풀리며 나른해졌는데,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술 마실 때는 결코 겪지 못한 즐거운 삶이 새로이 나에게로 다가온 것이다.

저녁에 어떤 행사가 없나를 살펴보고 그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의 큰 즐거움이 되었다. 전시회든 시낭송 행사든 음악회든 찾아보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것을 준비한 사람들의 노고와 그 작품들 하나하나가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한 사람의 인생의 깊이에 대해 시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내 살아가는 이야기를 깊이 있게 생각하며 글을 쓰기도 했다. 아예 카페 하나를 정해두고 매일 출근 도장을 찍으며 글을 썼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천상병 시인은 인생은 소풍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난 소풍 나와서 술만 마셨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난 탈주에 성공했고 지금 술 없이도 재미있는 소풍을 즐기고 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살아가니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고, 무엇보다 두 여자가 너무 좋아한다. 어머니와 아내. 그들의 얼굴에 웃음을 그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그리고 내가 술을 끊으니 아들도 술을 끊었다. 그래서 아들과 자주 여행을 다닌다. 언젠가 아들이

"아빠가 5년 전에만 술을 끊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난 웃으며 말했다.

"5년 후에 술을 끊었으면 어쩔 뻔 했니?"


태그:#술, #과음, #폭음, #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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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이야기가 아닌 생활 속에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를 담고 싶습니다. 들꽃은 이름 없이 피었다 지지만 의미를 찾으려면 무한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들꽃같은 글을 쓰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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