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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메멘토>(2001)를 필두로 그의 팬층이 생겨나기 시작해 최근 개봉한 <덩케르크>(2017)에 이르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영화에 관심이 없어도 <인셉션>(2010)이나 <인터스텔라>(2014)만큼은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놀란 감독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을까?

두 영화를 비롯해 놀란 감독의 영화가 대중에게 지지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그의 영화가 항상 지적인 욕구를 채워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셉션>에서 전문가들이 쉽게 설명해주지 못하는 꿈의 세계를 보며, <인터스텔라>에서 저 너머 우주를 향한 시간여행을 꿈꾼다. 놀란은 우리의 꿈을 충족시키는 감독이다.

놀란은 알 듯 모를 듯하게 연출하며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관음'을 관객에게 내비친다. 여기서 관음이란 히치콕다운 인간의 육체적 탐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성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저곳에 놓인 사실에 대해 접근하고 엿보려 하는 '지성의 탐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 놀란 감독의 영화는 관객을 '지성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것을 좋게 이야기하면 '관객을 유혹'하는 것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관객을 속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놀란의 영화를 그의 영화 중 하나인 <프레스티지>(2006)에서 나오는 마술쇼에 비유할 수 있다. 즉 내용적인 측면이 아니라 연출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놀란에게 붙은 '플롯의 마술사'라는 칭호는 바로 위의 문장에서 언급한 것들을 망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속임수'에 가까운 '플롯'으로 짜여 있다는 것은, 그의 영화가 비판받아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여러 마술을 망라한 예술이므로 그렇다. 영화는 시간을 잡아두고, 공간을 초월하며, 상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역할을 한다. 놀란은 그것을 대중에게 가장 잘 드러내는 방법을 아는 것뿐이다.

과도기의 영화 <프레스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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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의 영화들이 개봉할 때마다 팬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그전부터 이미 놀란을 주목하던 사람이 있었다. 중간에 특이점이 생기지 않는 한, 영화의 개봉 시기마다 팬들을 모은다면 마치 나이테처럼 점점 팬층이 두꺼워지기 마련이다. 그에 수반해 안티 팬도 점점 커지게 되었는데, 개중에서도 <프레스티지>는 팬과 안티, 모두에게 숱한 비판을 듣는 작품이다. 다른 영화에 비교해 플롯이 평탄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개봉 당시에도 그러했고 2017년인 현시점에서도 그렇다. 공교롭게도 놀란이 감독을 맡은 10편의 작품 중 <프레스티지>는 놀란의 4번째 영화이다. <프레스티지>를 통해 놀란의 영화가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과도기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놀란은 연구적 측면이나 대중적 측면에서도 모두 환영받는데, 깊게 파고들면 깊게 보이며 얕게 보아도 깊게 보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놀란 감독의 영화에 대한 비판점을 찾기보단, 그의 영화에서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고 우리에게 전달되는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두 마술사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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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런던은 마술쇼가 선풍적인 인기몰이 중이다. 앤지어와 보든은 라이벌이자 친구 관계로 마술극단에서 일한다. 그러던 어느 날 보든의 실수로 앤지어의 조수이자 아내인 줄리아가 사망한다. 이에 앤지어는 분개해 극단을 나와 보든과 대립한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마술이다. 아내의 사망으로 발단, 서로 방해하며 상처 주는 전개, 분열된 상태로 죽음을 맞는 결말이다. 이러한 발단 전개 결말에는 각각 하나의 마술이 중점으로 언급된다. 발단 부분의 물탱크 탈출 마술과 전개 부분의 새를 죽이지 않는 마술. 결말 부분의 순간이동 마술이다.

마술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영화가 허구성으로 가득 차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면 오해다. 영화는 마술에 관한 비밀을 자세히 보여준다. 하지만 단 하나의 허구가 있다. 바로 순간이동 마술이다. 이 영화에서 순간이동 마술은 인물의 '복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보든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사용한 것이었지만 앤지어는 그랬다.

붕괴와 분열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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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SF로 넘어오니 당황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분명, 그 점을 감수하며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게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을 설명하기에 방사능이 적절한듯싶다. 방사능의 위험성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비유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방사능 하면 원자력 발전을 떠올릴 텐데, 그때의 방사능은 '분열'한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조작을 가해서 그렇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방사능은 '붕괴'한다. 그때의 방사능은 우리 생각처럼 위험하지 않다.

여기서 아내가 사망한 앤지어는 '분열'에 해당한다. 보든이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앤지어는 파국에 빠지지 않았다. 분열의 특성처럼 앤지어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영화는 그것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분열이라는 단어는 중의적이다. 앤지어는 정신을 넘어 신체까지 분열되고 만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을 보든에게 보내는 둥 점점 미쳐간다. 그리고 마침내 물체가 복제되는 기기에 손을 댄다.

반대로 보든은 '붕괴'에 해당한다. 보든은 쌍둥이 형제로 태어나 하나로 살아왔다. 개인의 정체성은 서로의 정체성이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은 희미해져 붕괴하고 만다. 하지만 붕괴는 분열보다 안정적이다. 분열은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붕괴는 아니다. <프레스티지>는 앤지어의 분열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이야기 전반을 이끈다. 그만큼 보든이 수동적이라는 뜻이다.

붕괴와 분열의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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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든은 천재 마술사이며, 앤지어는 돈이 많다. 보든이 마술을 구상해 내면 앤지어는 돈을 들여 그것을 얼추 재현한다. 여기서 보든의 재능과 원자 세계에서의 에너지에 해당한다. 보든의 에너지는 제 위치를 찾아가기 위해 '반감기'를 거친다. 따라서 앤지어가 복수하지 않았더라도 보든은 끝내 붕괴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것이 보든 아내의 죽음으로 묘사된다.

앤지어가 가진 돈은 그가 복제 기계를 손에 넣을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통해 앤지어는 스스로 복제되고 '자살'한다. 그때 앤지어는 복제가 죽을지 원본이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는 분열의 위험을 몸소 체험하는 중이다. 여태껏 그를 달리게 하던 분열이 직접적인 위협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것을 핵분열의 위험성으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 두 사람의 특성은 선행과 후행으로 요약된다. 재능은 선천적이나 돈은 후천적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 보든이 '먼저' 앤지어를 건드려 '분열'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선후가 반복되니 이 영화는 보든의 승리로 끝나는 것일까? 그렇다. 이 영화는 보든의 승리로 끝난다. 다르게 말해 붕괴의 승리다.

<프레스티지>가 비판받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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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든의 쌍둥이가 살아남았지만, 그것은 보든이 반쪽만 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이 반감기에 해당한다. 반감기는 계속되니 보든은 계속 무너질 것이다. 앤지어는 백 번의 자기분열을 통해 폭발하고 만다. 그것은 보든에 의해 저지된다. <프레스티지>가 여타 놀란 영화에 비해 떨어지는 게 이 부분이다. 분명 이 영화의 서사는 보든의 실수로 시작된다. 앤지어가 평소 보든에게 느끼던 열등감은 아내의 사망 탓에 분노로 바뀐다. 그 에너지는 한 바퀴를 돌아 다시금 보든에게 온다. 이 영화에는 그 분노의 에너지 말곤 아무것도 없다. 이야기의 순서를 꼬아놓는 것에 일기장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 에너지가 어디 가지는 않다.

놀란 영화의 주요 특징은 인물과 인물, 인물과 관객 사이의 상호소통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것이 잘 드러난 게 <메멘토>와 <인셉션>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극을 이끄는 에너지가 계속해서 분열한다. 말하자면 방사능에서의 '연쇄반응'이다. 하나의 사건으로 인물은 끊임없이 붕괴하며 확장된다. 그런데도 분열의 규칙성으로 뒤에 벌어질 일이 예측 가능해진다. 그것은 놀란의 특기가 아니다. 분열된 에너지가 하나로 합쳐질 때의 쾌감은 다시 합쳐질 수 없는 반감기에 가로막힌다. 이렇게 생각해도 하나의 답이 나오며 저렇게 생각해도 하나의 답이 나온다. 둘 다 진실에 근접한 것 같지만 영화는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놀란 영화가 꿈만 같은 이유다. 우리는 늘 그렇듯 꿈을 향해 손을 뻗고 싶어 한다. <인셉션>에서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일방적으로 꿈을 꾼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단지 놀란의 스타일과 맞지 않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크리스토퍼 놀란 프레스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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