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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묵 옥녀봉에서 학살된 김진묵
▲ 김진묵 옥녀봉에서 학살된 김진묵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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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면 보도연맹원들이 양곡창고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다음날 옥녀봉에서 학살당했다는 소식은 증평면 덕상리 덕령마을에 순식간에 퍼졌다. 김병묵은 동생 3명이 증평양곡창고에 끌려가면서부터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보도연맹원들이 옥녀봉에서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밤 낫과 이불홑청, 그리고 양초를 준비했다. 도저히 혼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동생(김상묵) 처인 이창임과 김재청의 아버지 김한묵, 그리고 김호경과 함께 출발했다. 1950년 7월 9일 야심한 밤이었다.

충북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에 있는 옥녀봉에는 화약 냄새와 피 냄새가 섞여 숨도 쉴 수 없었다. 군인과 경찰들이 소총과 기관총으로 쏜 총소리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대한민국 군·경은 보도연맹원들을 처단한 후 급하게 남쪽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보도연맹 유가족들이 이들의 행보를 알리 만무였다. 괜히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다 걸리면 큰 탈이 날까봐 잔뜩 겁이 나 있는 상태였다.

촛불에 의존해 엉금엉금 현장에 도착한 김병묵 일행은 기절초풍하기 직전이었다. 방공호를 따라 시신들이 즐비해, 어디서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해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칠갑이 된 수백 명의 육신들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러다 7월 10일 새벽녘에야 방공호 한쪽에 3명의 시신이 꼭 껴안은 채로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김병묵의 동생 3형제로, 김진묵, 김광묵, 김상묵이었다.

시신 3구를 4명이 온전히 옮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담가(擔架)도 준비하지 못했다. 애초에 낫과 이불홑청을 준비한 것도 시신의 일부만 수습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이들은 낫으로 시신의 목을 베 이불홑청으로 감쌌다. 그리고 부리나케 발걸음을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도착하니 해가 부옇게 떠올랐다. 십오리(6km)길을 걷는 동안 이불홑청에서 흐른 피가 온 몸에 번졌다.

숙부들의 시신이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은 김재권(80세. 증평읍 덕상리)은 숙부 김상묵의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대청마루에 피칠갑이 된 이불홑청이 있었다. 그 안에 작은아버지 세 분의 목이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김광묵 옥녀봉에서 학살된 김광묵
▲ 김광묵 옥녀봉에서 학살된 김광묵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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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증평면 사건

1949년 6월 7일 청주지방법원에서는 정치범 9명에 대한 선고공판이 벌어졌다. 이른바 '남로당 증평면 사건'이었다. 총책 김정묵은 미체포 상태였고, 부책(副責) 신상인과 남로당원 8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이들 모두 충북 괴산군 증평면 덕상리 주민이었다. 판결문에 의하면 이들은 1948년 12월 2일 남로당 괴산군 증평면 세포(細胞)를 조직했고, 이후 1~2차례의 모임을 통해 중앙당의 방침에 따라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등의 정치노선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 모임은 사법부에 의해 국가를 전복할 혐의로 둔갑하였고, '국가보안법'과 '포고령2호' 위반으로 단죄되었다. 시골의 농민들이 남로당에 가입하고, 몇 차례 모임을 가진 것이 대한민국 체제를 위험에 빠뜨린 이적행위(利敵行爲)로 변모한 것이다. 재판결과는 신상인이 징역 2년을, 나머지 8명은 징역 1년을 받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8명 중 4명은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세상의 빛을 보았다. 이 재판은 사실상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재판 결과는 참혹했다.

2년형을 받은 신상인은 6.25가 발발하자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청원군에서 학살되었다.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어있던 정치범 800명이 총살될 때 죽음의 땅에 동행한 것이다.

징역 1년을 선고 받은 사람들은 구류기간 70일을 감면받아 1950년 3월 말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곧바로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되었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람들의 신세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모두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김재희(6.25 당시 23세), 김창복(28세), 김재호(31세)가 위 사건으로 사망했다. 김원회(27세)는 의용군으로 가 행방불명 상태다.

김재권 숙부들의 목이 베어진 시신이 놓여진 대청마루가 있었던 곳을 가르키는 김재권
▲ 김재권 숙부들의 목이 베어진 시신이 놓여진 대청마루가 있었던 곳을 가르키는 김재권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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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가 나서 똥 좀 누고 갈게요"

1950년 7월 8일 증평에서 온 신아무개 형사가 덕상리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였다. 신 형사는 보도연맹원들을 앞세워 증평양곡창고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재권의 조부는 자신의 딸을 덕상리로 보내 보도연맹원들이 몸을 피할 것을 꾀했다. 김재권의 당숙모는 현재의 충용아파트에서 마을 청년들 일행과 맞닥뜨렸다. 형사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들에게 내놓고 도망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형사 몰래 눈만 껌벅껌벅했다. 일행 중 김재인 만이 눈치를 챘다.

김재인은 배를 움켜쥐며 신 형사에게 "설사가 나서 똥 좀 누고 갈께요" 라고 해서 허락을 받았다. 똥 누는 시늉을 하다 보니 일행은 벌써 저만치 갔다. 김재인은 저 길이 죽으러 가는 길로 생각하고 줄행랑을 놓아 사지(死地)에서 벗어났다. 김재인은 살아 났지만 같이 끌려갔던 숙부 김사영과 동생 김재용(=김재호)과 김재희는 집으로 다시 오지 못했다.

이장에서 인민위원장까지

김병묵의 비극은 한국전쟁기에 동생 셋을 보도연맹 사건으로 잃 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49년 초에 괴산경찰서 경찰들은 김병묵의 집을 수시로 찾아와 그에게 "동생들 찾아내!"라며 다그쳤다. 심지어는 괴산경찰서로 끌고 가 온갖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김재권씨는 "아버지가 하루는 자리를 절뚝이며 집으로 오시대요. 바지를 걷었더니 정강이가 시퍼렇더라구요" 주리를 트는 고문을 당한 것이다.

김재권의 사촌형 김재섭(84세. 청주시 모충동)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김재섭씨는 "보도연맹 결성 전에 괴산경찰들이 몇 차례 집으로 와서 구둣발을 신은 채로 방에 들어왔어요. 경찰들은 후레쉬로 얼굴을 비추며 아버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어요"라고 한다.

진묵, 광묵, 상묵의 맏형이었던 김병묵은 동생들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다가 6.25가 터지자 새로운 상황에 맞부딪친다. 전쟁 전에 구장(이장)을 봤던 것과 보도연맹 사건으로 동생 셋을 잃었다는 이유로 덕상리 인민위원장을 강요당했다. 국군 수복 후에는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치렀다. 이것으로 그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1950년 겨울, 덕상리 인근에 있던 좌구산에 빨치산이 몰려들었다. 빨치산들은 덕상리로 내려 와 식량과 생필품을 빼앗아 갔는데, 김병묵은 이들에 의해 끌려가다가 간신히 살아났다.

국군 880부대는 낮에 마을에 주둔하면서 온갖 민폐를 끼쳤다. 소위 '낮에는 국군 세상, 밤에는 인민군 세상'이 된 것이다. 이 중간에 마을 사람들만 샌드위치 된 것이다.

증평 덕상리 마을의 불행은 1949년 '남로당 증평면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이 사건이 특정시설의 방화나 봉화시위, 등 구체적 물리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신경득(74세. 청주시 사창동) 전 경상대 국문과 교수는 "예비음모에도 속하지 않는 사건이에요. 지금으로 치면 훈방조치감도 안 되는 사건입니다"라고 한다.

신 교수는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국가보안법과 포고령2호 위반으로 처벌했는데요. 포고령2호는 맥아더가 일본 점령군의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내린 결정인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1948.8.15) 된 이후에도 이 조항으로 처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한다. 또한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들까지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결국 사지(死地)로 끌고 간 것은 국가의 야만적인 행위이다"라고 한다.

한국전쟁기에 벌어진 대한민국 군·경과 북한군, 좌-우익에 의한 집단폭력과 살상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덕상리 김재권 형제처럼 낫으로 목을 베 시신을 수습한 것은 전국에서 유일하다. 낫으로 동생들의 목을 벤 형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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