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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를 기다리는 중
▲ 올해는 트리 앞에서 산타를 기다리는 중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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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크리스마스의 계절이다. 사무실에서는 연말 마무리로 정신 없지만 집에만 오면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 타령이다. 아이들의 모든 관심은 12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그 밤에 집중되어 있다.

작년부터 산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아빠, 솔직히 말해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9살 까꿍이와 아직도 산타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7살 산들이, 5살 복댕이의 동거. 덕분에 부모는 어정쩡하기만 하다.

그런데 오늘은 집에서 나누는 녀석들의 대화가 가관이다. 지난 22일 둘째와 셋째가 다니는 어린이집에 시간이 되는 아버지가 산타 분장을 하고 등장하기로 했었는데 형제는 그걸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형아. 금요일에 어린이집으로 산타할아버지 오신대. 오셔서 우리한테 선물 주신대. 야호,"
"복댕아. 너는 그걸 아직도 믿냐? 산타할아버지 안 오셔."
"응? 선생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아냐. 그거 다 아빠들이 산타 분장한 거야. 안경 쓴 산타도 있고, 키가 큰 산타도 있잖아."
"진짜? 그럼 산타할아버지는 없는 거야? 어쩌지? 우린 선물 못 받는 거야?"
"아니지. 22일에는 가짜고, 진짜 산타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에 올 거야. 아빠가 우리 선물 산타할아버지한테 문자로 보낸다고 했잖아."
"그치? 야호!"

비밀을 알고 있는 자
▲ 2학년 까꿍이 비밀을 알고 있는 자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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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산들이가 벌써 산타의 비밀을 알아차렸나 싶어서 조마조마했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래 아직 초등학생도 아닌데 그 정도의 동심은 있어야지. 그런데 옆에서 녀석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까꿍이가 피식 웃으며 한마디 보탠다.

"그래. 산타할아버지는 24일 밤에 오시지. 그치 아빠?"
"응? 응. 그렇지. 아빠가 산타할아버지한테 연락해 놨어."

고약한 녀석 같으니라고. 까꿍이는 벌써 동생들에게 비밀을 지키는 조건으로 아빠, 엄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요구해 왔었다. 너무 턱없이 비싼 선물을 원하기에 네 돈을 보태라고 하자 눈물을 흘리던 녀석. 그래도 어쨌든 이번 크리스마스는 동생들에게 비밀을 지키기로 했다.

"저 택배 상자는 뭐지?"

그렇게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산타의 비밀이 지켜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온라인으로 주문했던 둘째의 선물이 배송에 문제가 생기면서 택배가 아주 늦게 집으로 배달된 것이다. 첫째와 셋째 선물은 일찌감치 받아 집안 깊숙이 숨겼건만.

23일 오전, 아이들이 집에서 열심히 놀고 있을 때 택배 기사가 둘째의 선물을 들고 집으로 들어 왔다. 화들짝 놀라 아이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뒤 선물을 받아 현관 바깥쪽에다가 숨겼다. 다행히 아이들은 눈치채지 못했고 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렇게 23일이 지나는 줄 알았다.

비밀을 쫓는 자
▲ 7살 산들이 비밀을 쫓는 자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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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오후 땅거미가 질 무렵에 벌어졌다. 평소처럼 거실의 커튼을 치던 둘째가 창문 너머 놓여 있는 택배박스를 발견한 것이다.

"어? 아빠 바깥에 무슨 택배 박스가 있는데?"
"(아... 이걸 어쩌지?) 그래? 뭐지?"
"익사이팅? 내가 산타할아버지한테 부탁했던 그 선물 같은데? 나가서 확인해 봐야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7살이 되어 아이가 글을 읽게 된 것이 지금처럼 원망스러운 적이 있었던가. 어째야 하지? 이렇게 진실이 밝혀지는 것인가? 옆에서 5살 복댕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데?

그때 나를 구원한 것은 안방에 있던 아내의 날카로운 잔소리였다. 아내는 서둘러 현관으로 나가는 둘째를 불러 세웠다. 이 시간쯤 되면 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왜 아직도 말 안 듣고 그러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잔소리였다.

둘째가 멈칫하고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는 사이, 난 서둘러 나가서 택배박스를 개봉하고 장난감을 멀찌감치 숨긴 채 택배 상자만 들고 들어왔다. 둘째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어? 택배 박스가 비었네? 아빠, 그 안에 장난감 없었어?"
"응? 없었는데. 이거 그냥 박스 쓰레기야."
"이상한데. 산타할아버지가 박스 쓰레기만 보냈나? 박스만 던지시고 다른 곳으로 갔나?"
"글쎄. 모르겠네."

도저히 마땅한 답변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 정도 됐으면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산들이는 그 비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넘어갔고 다음 날 동생과 함께 산타할아버지에게 꼭 제대로 오시라고 기도를 했다. 내가 속이는 건지, 속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기네 어린이집에는 산타할아버지 대신 아빠가 3일 전에 선물을 사 준 친구도 있었다고 했으니 이미 비밀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

그래도 메리크리스마스

편지에 먹을 것 까지
▲ 산타를 기다리는 마음 편지에 먹을 것 까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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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저녁. 아이들은 분주하다. 올해 처음 사서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다가 산타할아버지를 위한 음식과 편지를 놔두기 위해서다.

이미 산타의 비밀을 알고 있는 까꿍이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것이 재미있는지 열심히 동생들과 함께 카드를 적었고, 둘째는 산타할아버지가 밤새 선물을 옮기느라 힘드실 거라며 그를 위한 초콜릿과 오렌지를 트리 앞에다가 정성스럽게 놔두었다.

그래도 역시 가장 절박하고 신실한 것은 셋째였다. 아직 글씨를 모르는 5살 막내는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며 누나에게 내용을 불러주었고, 누나가 써준 내용을 그대로 따라 그리느라 바빴다. 엄마, 아빠가 옆에서 절도 해야 한다고 거드니 자러 들어간 누나와 형을 굳이 불러내어 절까지 했다. 아주 신성한 모습으로.

비밀을 의심하지 않는 자
▲ 5살 산들이 비밀을 의심하지 않는 자
ⓒ 양정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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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모두 잠든 뒤 아내와 함께 포장지를 꺼내어 선물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몰래 사 왔던 포장지로, 뽀로로가 그 주인공이었다. 과연 우리 부부는 내년에도 이와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5살 복댕이는 내년에도 산타할아버지를 믿고 있을까? 둘째 산들이는 올해가 마지막이겠지?

산타할아버지의 마음으로 선물을 포장하고 있으려니 이 순간이 아쉽기도 하다. 이렇게 세월은 흐르고 아이들은 훌쩍 크게 되겠지. 가는 세월이 무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메리 크리스마스!

25일 새벽이 기다려지는
▲ 크리스마스 선물이 도착했어요 25일 새벽이 기다려지는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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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육아일기,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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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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