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러다가 한국 영화 다 망해요."

지난 12일 열린 여성영화인 축제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성 영화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국 영화 다 망한다"고 토로했다. 그저 지나가면서 하는 말인 줄 알고 웃으며 넘기려던 내게 그는 거듭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제야 나는 그 말이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국 영화가 망한다"는 주장 앞뒤로 수많은 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장에 대한 진위 여부가 먼저다. 과연 한국 영화는 정말 망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다. 올해 상반기 외국영화 점유율은 57.2%로 역대 최다를 기록한 한편, 올해 한국 영화 흥행 순위 30위권에 든 작품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9편에 불과하다. 하반기에 잠시 <택시운전사>와 <청년경찰>의 흥행으로 인해 한국 영화 점유율이 솟아올랐고 연말 기대작 <신과 함께>와 < 1987 >의 흥행을 점쳐볼 수 있겠으나 전반적으로는 '산업 전반적인 침체'에 가깝다는 게 여러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왜 침체기에 접어들었을까. 이 역시 여러 원인을 따져볼 수 있겠으나 "소재와 형식, 서사 전반에 있어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면서 관객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2017 여성영화인 활동백서)는 분석이 대표적이다. 특히 한국 영화계는 올 한해 국내외적으로 이슈가 됐던 '페미니즘 열풍'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남성 중심의 영화들을 양산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영화 <청년경찰>의 한 장면.

영화 <청년경찰>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보안관>

영화 <보안관> ⓒ 롯데엔터테인먼트


올해 개봉한 <브이아이피>나 <청년경찰> <공조> <보안관> 등을 비롯한 '남성 중심적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주로 남성 주인공의 주변부에 머물며 소모적인 역할로 쓰였다. 지난해부터 한국 영화 속 여성 캐릭터에 대한 문제제기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나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올해도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남성 중심적 서사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 그 가운데 소재의 다양성은 실종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 어두운 가운데서도 빛나는 '여성영화'와 '여성영화인'들의 성취가 있었다. 이 기사에서는 그 성취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아이캔스피크>와 나문희, 여성 캐릭터의 지평을 넓히다

올해 개봉한 여성 영화 중 가장 분명한 수확은 <아이캔스피크>의 배우 나문희였다. 나문희 배우는 <아이캔스피크>에서 여성 원톱 주연으로 56년간의 연기 생활의 진수를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심사위원 8명의 만장일치 의견으로 역대 청룡영화제 최고령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또한 '제1회 더 서울어워즈, 제17회 디렉터스컷,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에 이어 2017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받았다.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아이 캔 스피크> 나문희 배우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아이 캔 스피크> 나문희 배우 ⓒ SBS 화면


<아이캔스피크>는 기존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의 한계를 넘어서 위안부 여성들의 아픔을 새로운 시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얻었다. 나문희가 연기한 위안부 여성 '옥분'은 단순히 피해자 서사에만 갇히지 않고 '폭로하는 여성'으로 영화 전반을 주도했다. 이는 배우 나문희의 성취인 동시에 영화 <아이캔스피크>의 성취이기도 하다.

또 '스타 감독' 반열에 오른 이준익 감독의 <박열>과 봉준호 감독의 <옥자> 등에서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박열>에서 이준익 감독이 그린 여성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는 식민지 남성인 박열에게 동거를 먼저 제안하는 등 당시 혁명가적인 면모를 가진 여성 등장인물로, 신인 배우 최희서가 매력적으로 연기했다.

한 평론가는 '박열'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영화 속 인물의 비중으로 보자면 제목을 '가네코 후미코'로 했어야 옳다는 것이다. 최희서는 <박열>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다수의 신인연기자상을 휩쓸었다.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옥중에서 쓴 수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당당히 밝힌다.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옥중에서 쓴 수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당당히 밝힌다.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옥자>의 배우 안서현은 가족과도 같은 슈퍼 돼지 '옥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산골 소녀 '미자' 역할을 맡아 드라마부터 액션까지 소화하는 연기력을 보였다. 안서현은 2004년생으로 미래가 기대되는 여성 배우다.

베를린영화제에서 홍상수 감독의 <밤에 해변에서 혼자>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김민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김민희는 <아가씨>에 이어 <밤에 해변에서 혼자> <그 후>를 통해 진일보한 여성 캐릭터-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한국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악녀>의 스틸사진

<악녀>의 스틸사진 ⓒ NEW


한편,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누아르 장르에서 올해 <악녀>와 <미옥>이라는 '여성 누아르' 영화들도 선을 보였다. 각각 김옥빈과 김혜수라는 여성 배우가 원톱 주연을 맡아 다채로운 액션 연기를 펼쳤다.

특히 <악녀>는 올해 영화 <불한당>과 함께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비경쟁)에 진출하는 성과도 거뒀다. 비록 두 작품 모두 서사적인 면에서 뚜렷한 한계를 보였다는 평이 있으나, '여성 누아르'라는 흔치 않은 장르적 시도를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밖에도 독립영화에서 여성 원톱 주연으로 활약한 <용순>의 이수경과 <재꽃>의 정하담 또한 올해의 '주목할만한 배우'였다.

한해 제작된 68편 중 여성감독 영화는 '단 4편'

 영화 <더 테이블> 스틸컷

영화 <더 테이블> 스틸컷 ⓒ 엣나인필름


이외에도 임수정,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까지 무려 네 명의 여성 주연이 영화의 기둥이 된 <더 테이블>이 있다. <더 테이블>은 소규모 영화로 개봉했으나 10만 관객을 돌파하며 나름의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 트렌스젠더 여성(MTF) '제인'(구교환 분)을 내세워 이상적인 공동체와 희망을 그려낸 영화 <꿈의 제인> 그리고 '여고생'이라는 집단을 특정한 프레임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카메라에 비춘 다큐멘터리 <땐뽀걸즈> 등이 올해 돋보이는 여성주의 영화로 손꼽을 수 있겠다.

 영화 <유리정원>

영화 <유리정원> ⓒ 리틀빅픽처스


여성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비록 작게나마 존재하는 한편, 여성이 연출하는 영화는 더욱 소수다. 2017년 1월 1일부터 11월 30일 개봉한 68편의 상업영화 가운데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는 단 4편에 불과했다. <싱글라이더>(이주영 감독), <해빙>(이수연 감독), <유리정원>(신수원 감독), <부라더>(장유정 감독)가 여성 감독의 영화들이다. 나머지 64편의 영화는 남성 감독에 의해 제작됐다.

한편, 올해 배우이자 영화 감독으로 활약한 배우 문소리를 이 기사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문소리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여배우로서의 고충에 대해 현실적으로 담아내 많은 여성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얻었다. 이러한 호평은 여성 배우들이 자청해서 <여배우는 오늘도>의 GV(관객과의 대화) 릴레이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내년에는 여성 영화인들에게 이런 연대가 늘어나길 기원해 본다. 

아이캔스피크 옥자 밤에해변에서혼자 최희서 나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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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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