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수잔 팔루디의 기념비적인 에세이 <백래시>가 드디어 한국어로 출간되었다. 미국에선 1991년에 발표된 이 책은 1960년대 북미에서 시작된 페미니즘 제2의 물결 이후 1980년대에 등장한 반(反)여성주의적 역풍을 다루고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인종차별 반대 운동과 민권 운동에서 독립해 출발한 자유주의와 급진 페미니즘 운동은 1970년대 미국에서 활발하게 일어났고, 유의미한 정치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의 보수 정부 집권 이후 사회 전 영역에서 여성운동이 이룬 성취는 대대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제도적·정치적인 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 일터에서의 권리 또한 후퇴를 요구 받았으며, 심지어 문화계에서도 여성을 퇴행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등장한다.

 수잔 팔루디의 책 '백래시(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 표지.

수잔 팔루디의 책 '백래시(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 표지. ⓒ 아르테


팔루디의 책은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이 등장한 시대적 맥락과 함께 이 같은 현상의 보편성을 짚은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여성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부흥과 반발, 쇠퇴는 반복되어온 현상이다. 가령 1세대 여성주의 운동이 투표권 성취 이후, 원하는 걸 주지 않았냐는 비아냥 속에서 별다른 의제를 선점하지 못한 채 방황했던 역사를 생각해보라.

한국도 이런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다. 지난 몇 년은 페미니즘 리부트를 이야기 할 정도로 여성주의가 화두로 떠오르고 사회적 성취도 남긴 시기였지만, 동시에 여기에 대한 (주로 남성들의) 반발도 컸던 때였다. 페미니즘을 단순히 '남성 혐오'나 '여성 우월주의'로 오도하며 펌훼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심지어 페미니스트 개인의 신상을 알아내 악의적으로 유포하는 행위도 등장했다.

온라인을 뒤덮은 '젠더 전쟁'의 영향

가히 젠더 전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같은 상황은 주로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그래서인지 인터넷 공론장이 들끓어 오르는 와중에도 실제로 논쟁이 어느 정도 범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뜬금 없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수준을 가늠해볼 만한 일들이 올해 발생했다. 드디어 직간접적으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연예인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연예인이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하는 경우가 흔치 않음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입을 열었다는 것은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과 담론이 끼친 영향이 꽤나 광범위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긴 이르다. 여성주의 이슈를 놓고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한 인물들이 있는 반면에 방향이 영 좋지 않다싶은 인사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 연예인들은 거의 모두 남성이었다. 물론 남성 연예인들의 여성 혐오나 실언을 향한 지적과 이에 대한 반응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소극적인 무시', '자신의 잘못을 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한 사과 아닌 사과' 혹은 '반성과 성찰'로 나뉘었다. 세 번째의 반응을 보인 대표적인 인물은 배우 김윤석 정도이고 나머지는 앞의 두 경우로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2017년, 특히 하반기에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유형의 반응이 등장했다. 바로 적극적인 항변 또는 변명이다.

'애호박 게이트'가 남긴 것


 영화 <베테랑>에서 조태오로 출연한 유아인의 모습

영화 <베테랑>에서 조태오로 출연한 유아인의 모습 ⓒ CJ 엔터테인먼트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최근에 발생한 워낙 대표적인 사건의 주인공이기에 이야기 해야겠다. 바로 '애호박 게이트'로 인터넷을 들썩였던 유아인이다. 그가 했던 발언들이 얼마나 별로였는지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을 했기에 말을 더 보태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자신의 애호박 발언에 대한 비판을 놓고 그가 보인 반응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특이했다. 그는 무시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유아인은 '증오를 포장해서 페미인 척 하는 메갈짓 이제 그만'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지적이 '페미니즘'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증오 표출에 불과하다는 딱지를 붙인 셈이다. 여기에 그는 뜬금 없이 길이길이 회자될 자신만의 페미니스트 선언을 남기며 '진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주장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 사태를 애초에 발화시켰던 사건은 사람들 사이에서 아득히 잊혔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몇년간 불어온 페미니즘의 바람은 사실 한국 사회의 것만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전세계가 들썩였다. 특히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북미 연예계에선 성별을 가릴것 없이 모두가 성차별과 여성 혐오에 대해 입을 모았다. 방송과 영화계에서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한 작품들이 제작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긍정적인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자 유행처럼 번졌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나 시류에 민감하기로 유명했던 유아인이 '진짜 페미니즘'을 꺼내든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페미니즘 자체를 문제로 만드는 게 아니라 프레임을 선점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모는 것이다. 이 구도에서 그는 여전히 의식있는 연예인(유명한 할리우드 스타들처럼 페미니즘을 말하는)으로 남을 수 있음과 동시에 자신의 과오를 완벽하게 덮고 더불어 상대방의 입도 다물게 만들 수 있다. 물론 그게 의도처럼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귀환

 자신을 비판하는 여성들이 온라인 생태계와 인권 운동 정신을 교란하는 폭도들이며, 진정한 여성들과 다르다고 표명한 유아인의 트윗

자신을 비판하는 여성들이 온라인 생태계와 인권 운동 정신을 교란하는 폭도들이며, 진정한 여성들과 다르다고 표명한 유아인의 트윗 ⓒ 유아인 트위터



사실 유아인과 같은 사람들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는 유명한 개념이 있다. 페미니즘 운동이 들끓어 오르던 시절, 한국 여성들의 페미니즘은 너무 폭력적이라 진정한 것이라 할 수 없다던 이들을 떠올려 보라. 차이가 있다면 당시 그들은 점처럼 흩어져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비아냥을 사고 침묵하길 반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중문화인의 입에서 같은 소리가 나오고 사람들은 그가 의식이 있다고 지지를 보낸다. 실제로 유아인의 발언이 화제가 된 이후 몇몇 남성 중심 커뮤니티에서 나온 반응을 살펴보라. 언론도 다를 것이 없다. 당시 여러 매체들은 유아인이 당당히 자기 소신을 밝히고 사람들과 설전을 주고 받았던 것처럼 묘사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주장하자면, 나는 어쩌면 이것이 지금껏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을 고까워 했던 이들이 가하는 '백래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길들이는 것이다. 구획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가령 자신의 노래가 여성혐오적이라는 지적을 놓고 김희철은 SNS에 입장을 밝히며 자신은 '정상적인 여성, 남성'을 사랑한다고 언급했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일까? 유아인이 말한 '가상 세계의 페미니즘'을 하며 '교류가 아니라 전쟁'을 벌이는 사람은 누구일까?

두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시끄럽게 쫓아와서 자신을 비판하는 존재(특히 여성)들이다. 이들은 비정상이며 어딘가 어긋났고 진짜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주장의 정당성이 없다고 치부되니 손쉽게 '폭도'로 매도된다.

2018년 어쩌면 우리가 대비해야 할 문제

수년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페미니즘 담론이 성장을 거듭할수록 자신에게 불리한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반발 또한 더욱 교묘해지고 세련되어져 왔다. 이제 남자들은 성찰은 커녕 무의미한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 기득권이 공격받는 데서 누적된 남성들의 피로감을 이용해 비판의 목소리를 폭력으로 둔갑시킨다.

그 사이 '진짜 여성'과 '정상 남성'의 화합과 평화를 이야기 한다. '가짜 페미니스트'는 그런 것을 깨는 존재들인 셈이다. 마치 보수 기독교 세력이 '성(性)평등'은 안 되지만 '양성평등'은 된다고 선을 긋는 꼴과 비슷하다. 하지만 유아인을 비롯한 남자 연예인들이 정한 공론의 규칙은 여성들의 문제제기가 여성이기에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적대와 배제'에서 출발했으며 분노는 필연적으로 촉발될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악질적이다. 말하자면 그런 구도에서 이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앞서 언급했듯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연예인들의 발언은 특정한 시선의 보편성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17년 여성주의를 둘러싼 남성 연예인들의 이 같은 발언들은, 우리가 다가올 새해에 새로운 지형과 구도 속에서 운동과 논쟁을 이어가야 함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팔루디가 그렸던 암울한 백래시가 실현되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는 말이다.

페미니즘 여성주의 백래시 유아인 김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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