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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방문 중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14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면담하고 있다.
 일본을 방문 중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14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면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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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아베 신조 총리한테 굴욕을 당했다. 지난 14일 총리관저 접견 때 과도하게 머리를 숙인 것도 문제지만, 일본 정부가 홍 대표의 의자보다 아베 총리의 의자를 높임으로써 의도적으로 굴욕을 줬다는 것도 문제다.

그런 대우를 받고도 본인 스스로 굴욕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개인 자격으로 갔는지 정당대표 자격으로 갔는지를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제1야당 대표로 가서 그런 대우를 받았다면 명백한 굴욕이다. 강력한 수준은 아니지만, 모욕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아베가 내놓은 의자에 담긴 뜻

광해군의 최측근이자 대학자인 어우당 유몽인이 수집한 실화집 <어우야담>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부자 대열에 갓 들어선 어느 남자가 자기 집을 찾는 손님이 많아지자 재정 절감 차원에서 벌인 일이다.

귀한 손님이 오면 수염 위쪽을, 중간 손님이 오면 수염 중간 부분을, 만만한 손님이 오면 수염 아래쪽을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그 신호를 보고 부인이 술상의 수준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에 따를 것 같으면, 홍 대표를 맞이하기 전에 아베 측이 수염 아래쪽을 만지작거렸다는 말이 된다.

아베 측은 페이스북 창시자, 인도 특사, 미국 국방장관 등을 만날 때는 동등한 의자를 내놓았다. 이들을 맞이하기 전에는 수염 중간 부분을 만지작거렸을 것이다. 사람 봐서 의자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홍 대표에 대한 대우가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홍 대표만 겪은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 5월 아베를 방문한 문희상 대통령특사도 동일한 일을 겪었다. 아베 측이 낮은 의자를 내놓은 것이다. 지난 6월 정세균 국회의장 방문 때도 아베 측은 의자를 통해 차별하려 했다. 하지만, 한국측 항의를 받고 대등한 의자로 교체했다.

조선시대에도 일본을 방문한 사신단이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통신사란 명칭으로 일본에 사신단을 파견했다. 바로 그 통신사 일행이 그런 일을 겪었다. 이때 '수염'을 만지작거린 장본인은, 뉴질랜드 정치학자 팀 빌이 아베 신조의 외할버지와 비슷한 부류로 평가한 16세기 인물이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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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는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유지를 실천하고 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다가 패망 후 A급 전범 혐의로 체포된 뒤 극적으로 살아나 총리대신까지 된 기시 노부스케는 패망 이전의 일본을 회복한다는 목표로 정치활동을 했다. 일본의 영광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의 못다 이룬 뜻은 외손자인 아베 신조의 군사대국화 노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팀 빌은 <북한과 미국, 대결의 역사>에서 한국 역사를 정리하는 대목에서 이런 말을 했다.

"16세기에 접어들어 일본의 쇼군 히데요시는 아시아 본토로 일본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계획- 곧이어 20세기에 되풀이된 계획-으로 두 차례 조선 침공을 시도했다."

쇼군은 한국어 어감으로는 '장군님'이다. 무신정권 지도자를 지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쇼군이 아니었지만, 서양 학자의 눈에는 쇼군과 다를 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쇼군으로 지칭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 침공이란 것은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도발을 가리킨다. 

"곧이어 20세기에 되풀이된 계획"이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듯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팽창 정책이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20세기 일본인들에 의해 계승됐다는 게 팀 빌의 인식이다. 16세기나 20세기나 일본이 한반도를 경유한 대륙 침공을 통해 팽창정책을 추구했으므로, 기시 노부스케 등을 도요토미의 후계자로 보는 팀 빌의 인식은 틀리지 않다. 이런 인식에 입각하면, 기시 노부스케를 계승하는 아베 신조도 궁극적으로는 도요토미의 후계자가 된다. 

조선 정치인을 하대했던 도요토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아베 신조는 대륙팽창의 의지만 같은 게 아니라 조선 정치인을 대하는 태도마저 비슷하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 황윤길·김성일이 이끄는 조선통신사 일행의 방문을 받았다.

이때 도요토미는 관행을 어기고 의도적으로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선조 24년 3월 1일자(1591년 3월 25일자)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도요토미는 대마도까지 사람을 보내 조선통신사를 영접하던 관행을 일부러 깨뜨렸다. 1868년 이전의 대마도는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했다. 일본은 자국 영토가 아닌 대마도까지 와서 조선 사신단을 영접했던 것이다. 이런 관행을 깨고 도요토미는 일본 땅에서부터 통신사를 영접했다.

또 통신사 일행이 도읍인 교토에 도착했을 때, 도요토미는 그곳에 없었다. 통신사 일행이 1개월  반쯤 기다리자 도요토미가 교토에 나타났다. 그러고도 그는 곧바로 만나주지 않았다. 약 2개월 뒤에야 통신사와의 면담을 허락했다.

위의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면담 당일에도 외교적 결례가 많았다. 쏘아보는 듯한 시선으로 사신단 앞에 나타난 도요토미는 방석 몇 개를 포개고 앉았다. 아베 신조가 자기 의자를 높인 것처럼, 도요토미도 방석을 높였던 것이다. 전반적 분위기로 볼 때, 방석을 포갠 행위는 위압감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랬기 때문에 사신단이 본국에 돌아와서 그 점을 보고했을 것이다.

무례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도요토미 측은 사신들 앞에 놓인 탁자에다가 탁주와 떡 한 접시만 달랑 내놓았다. 그러다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이번에는 아기를 안고 나왔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사라졌다. 모욕적인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의도적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행동들이었다. 

당시, 도요토미는 대륙침략 의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임진왜란 7년 전인 1585년에는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를 만난 자리에서 "조선을 점령한 뒤 중국까지 공격하겠다"고 장담했고, 1588년부터는 대마도 도주를 통해 조선 침략의 가능성을 조선 쪽으로 흘려보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의도적인 외교적 결례가 있었다. 도요토미가 그렇게 한 것은 조선 사신과 조선 정부의 기선을 제압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주도록 압박하려는 동기가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행렬. 사진은 영조 임금 때인 1748년 통신사 방문을 묘사한 그림. 대구시 달성군의 한일우호관에서 찍은 사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행렬. 사진은 영조 임금 때인 1748년 통신사 방문을 묘사한 그림. 대구시 달성군의 한일우호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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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대전 종결 직전에 미국 정부는 일본 점령에 대비해 일본인들의 심리구조를 조사했다. 그 조사 결과를 담은 게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다. 이에 따르면, 모욕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한국·중국인들과 다르다.

오랫동안 문인들이 지배한 한국과 중국에서는, 웬만한 모욕은 웃어넘기는 게 미덕이다. 웬만한 모욕에 즉각 반응하는 것은 대인답지 못한 처신으로 인식된다. 싸움을 피하고자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는 한신의 이야기가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도 그런 심리를 반영한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모욕을 받으면 즉각 반응하는 게 미덕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도리를 지키는 것으로 인식된다.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으면, 더욱 더 무시를 받는다.

한국·중국에서는 자신이 모욕을 줬는데도 상대방이 덤덤한 태도로 나오면 모욕을 준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일이 많다. 이것은 일본에서는 드문 일이다. 한국·중국에서는 모욕을 견디면 대인배 소리를 듣지만, 일본에서는 소인배 취급을 받는다. <국화와 칼> 제8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일본에서) 이름에 대한 의리는 자기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할 의무다. ······ 이름에 대한 의리는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 명예를 훼손시킨 자에게 복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자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 훌륭한 사람은 모욕도 은혜만큼 강하게 느낀다. 어느 쪽이든 보답하는 게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위다."

자신에 대한 모욕을 방치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므로, 누군가가 자신을 모욕하면 복수하든가 아니면 스스로 할복해야 한다는 게 일본인들의 전통적 인식이다.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 것처럼 모욕에 대해서도 보답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관념이다.

1590년에 조선통신사 일행은 어떤 경우에는 외교적 결례를 시정시켰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받은 모욕에 대해 완벽한 항의를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외교적 결례를 당한 순간에 항의를 제기하고 조선으로 발길을 돌렸다면, 도요토미는 조선인들을 무섭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모욕을 용납하지 않는 민족으로 판단하고 조선을 좀더 어렵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사신들은 그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의 한국 정치인들도 아베 신조에게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다. 아베 신조가 가한 모욕에 대해 명쾌한 '복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홍준표 대표 경우는 자신이 모욕을 당했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신적 후계자로서 군사대국화를 추구하는 아베 신조한테 한국을 얕볼 빌미를 주고 돌아온 것은 아닐지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태그:#홍준표, #아베 신조, #도요토미 히데요시, #외교적 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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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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