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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1년 홍준표 당시 광주지검 강력부 검사에 의해 조직폭력단 '국제PJ파 두목'으로 기소됐던 여운환씨가 입을 열었다. 그는 <오마이뉴스>와 이틀간 총 7시간에 걸쳐 자신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사이에 있었던 '사나웠던 운명'을 숨가쁘게 털어놨다. <오마이뉴스>는 18회에 걸쳐 그 '사나웠던 운명의 증언'을 풀 스토리로 연재한다. <오마이뉴스>는 여 대표의 인터뷰 내용과 관련해 홍 대표의 해명과 반론을 듣고자 수차례 접촉을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다만 홍 대표의 한 측근인사는 "그것은 검찰(검사)이 불의한 깡패세력을 소탕한 사건"이라고 반박했다. <오마이뉴스>는 이후라도 언제든지 홍 대표의 반론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힌다. [편집자말]
여운환 아름다운컨벤션 대표가 지난 10월 25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여운환 아름다운컨벤션 대표가 지난 10월 25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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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달'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언제부터 건달 생활을 한 건가?
"나는 남이 건달 생활을 한 적이 있냐고 물으면 '있다'고 대답해.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방황했어. 학업을 등한시하고 방황했다고. 그러면 건달 생활을 언제까지 했냐고 하면 군방위 복무 전까지야. 그때가 1975년 말인가 그래. 그때 한 달간 구속됐었다고. 그것을 끝으로 나는 마음을 잡았어. 어울려 다닌 친구들과 만남도 자제하고. 그때의 목표는 지금의 애들 엄마와 결혼하는 거였어. 마음을 못잡고 건달 생활을 계속 하면 결혼도 못하고 내 인생도 망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

사실 난 그때 중형을 받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나왔으니까. 그때는 징역 2년이라고 하면 엄청난 형이었어. 지금의 10년형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2년이란 세월이 엄청 클 때 아녀. 누구라도 그런 형을 받고 1년 정도 교도소에 수감되면 인생 끝났다고 할 정도였어. 오죽했으면 교도소 가는 사람들이 교도소라고 안하고 '형무소'라고 했겠어. 그렇게 표현한 것처럼 그땐 거길 가면 큰 일이 생기는 것이나 진배 없었어. 그런 것들 때문에 마음을 잡을 수밖에 없었어."

- 왜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가?
"학교 다닐 때 서클 같은 게 있었어. 지금의 동아리가 아니고 거의 다 폭력 서클이었다고. 그 서클에 어울려 몰려다녔던 거지. 근데 조직폭력, 범죄단체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어. 그냥 어울려 다니는 패거리였어. 부모님 속썩이고, 다니다 보니 패싸움하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선후배가 정해지고. 그렇게 몰려다녔던 패거리다 보니 우리하고 친하지 않고 조금 적대감을 갖는 사람들끼리 싸우면 그게 패싸움이 되고.

그렇게 해서 잡혀가고 조사받는 과정에서 경찰관들이 패거리들이 잘 다녔던 단골집이나 다방이나 음악감상실 이름을 붙여서 '무슨 파' '무슨 파' 이렇게 지어놓았어. 근데 폭력배가 강령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경찰에 의해) 그냥 만들어졌어. 글 쓰는 사람도 없어서 회칙이고 뭐고 없었어."

- 처음에는 김태촌의 서방파 활동에서 활동하지 않았나?
"내가? 그것도 소설화돼 있는 거야. 김태촌은 나랑 나이 차가가 몇 살 있지만 (학교로는) 내 1년 선배야. 김태촌이 학교를 늦게 다니는 바람에 1년 선배로 같이 어울렸어. 그때 어울린 사람 중에는 마음 잡은 사람도 있고, 못잡은 사람도 있고.

그러다가 김태촌이 서울로 갔어. 우리는 광주서 생활했고. 그런디 김태촌이 서울에서 폭력사건 사고를 냈어. 사고를 내서 수사기관에서 조사받다가 '니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서방이다'고 한께 '서방파'가 된 거야. 지금도 곧잘 '서방'이라는 표현(지명)을 쓰는데 지금 동신고 앞을 서방이라고 하잖아.

김태촌은 마음을 안잡고 죽 그런 생활을 하다가 여러 사건들에 연루되면서 교도소에 들락거렸어. 김태촌을 추종하는 후배들도 생기고. 옛날보다 조직화가 잘 되고. 그렇게 해서 자기들끼리 조직폭력이라고 하고. 아까도 말했듯 나는 1975년이 끝이었어. 이후 단 한 번도 경찰관 등 수사관서에 입건된 적이 없어."

- 서방파에 가입하지는 않았나?
"전혀. 나랑은 맞지 않는 이야기야."

"난 75년 이후로 마음을 잡았다"

- 국제PJ파를 만든 적이 있나?
"국제다방과 PJ음악감상실이 한 건물에 있었어. 우리가 그 근방을 무대로 해서 놀았다고 해서 경찰이 붙어준 거야. 나는 그걸 만든 사람이 아니고, 거기서 제일 우두머리는 김길용이었어. 이전에 말했듯이 김길용하고 나하고는 나이가 대여섯살 차이야.

김길용이 국제PJ파를 만들어서 느닷없이 '내가 만든 파인데 형님이 두목 하쇼' 하면서 자기가 임명할 것도 아니고. 그런 거는 있을 수도 없고. 경찰에서 국제PJ파를 엄청 관리했을테고,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입건되고 조사받지 않았겠나? 국제PJ파가 어디 가서 축구시합을 한 적이 있다는데, 내가 (두목이나 조직원이면) 이런 데 어울려 다니든지, 아니면 그들을 찾아 교도소 면회라도 한번 가봤든지, 이런 거 하나라도 찾아야지. 전혀 없었어."

- 국제PJ파와 어울린 적도 없다?
"내가 국제PJ파 사람들하고 어울렸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안맞아. 우리가 돌아다닐 때 김길용이는 막둥이였어. 광주 지역은 서울의 구만도 못할 만큼 적잖아. 그러니 서로 아는 체하고, 또 사람이란 게 다 뿌리가 있잖아. 기자도 <오마이뉴스>에 있응께 <오마이뉴스> 사람들을 잘 알제 다른 언론사 사람들을 잘 알진 않을 거 아녀? <오마이뉴스>를 나오더라도 <오마이뉴스> 선배제 <오마이뉴스> 하고 관련이 없는 거는 아니잖아.

그런 것처럼 국제PJ파는 나와는 관계가 없는 파지만 거기 몇 사람들을 알 뿐이여. 두목인 김길용이나 부두목 등은 과거에 어울린 막둥이들이여. 그 사람들은 마음을 안잡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럼 내가 옛날에 걔들을 알고 지낸 게 죄냐 이거여."

- 보통 검·경이 조폭 계보를 작성하면서 아지트로 삼던 상점, 가게, 자주 출몰하는 지역의 상호를 따서 조폭 이름을 만드는데, 국제PJ파도 검경이 자의적으로 붙인 이름인가?
"자의적으로 붙인 거여."

- 그런데 당시 검찰에선 국제PJ파를 서방파의 재건이라고 봤다.
"서방파의 재건이 아니여. 홍준표가 공소장에서 그렇게 어벌쩡하게 쓴 거야. 김태촌 이름도 하나 넣으면 좋을 거 같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 김태촌과 어울린 적은 있어. 하지만 나는 김태촌 직계가 아니여. 직계파는 백○○이여. 그들은 자기들이 서방파라는 것을 부인 안하고 오히려 좋아해. 나는 그 사람들을 싫어한 사람이여. 우리가 같이 어울릴 때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있고 싫어한 선배가 있듯이. 내가 좋아하는 선배는 김태촌 말고 따로 있었어. 내가 놀 때는 서방파가 아니었어.

내가 그땐 시민회관 앞에서 놀았어. 대인시장 앞에 영미제과도 있었고. 우리가 학교에서 나와서 시내에 나오면 거기를 좀 왔다갔다 했어. 그래서 '시민파'라고 했어. 시민파가 없어지면서 (조직이) 유명무실화됐어. 선배들도 맘 잡고, 나도 맘 잡고. 그렇게 없어져부렀어.

굳이 뿌리를 찾자면 서방파도 시민파 계열이여. 이미 없어진 시민파 계열. 김태촌도 시민파에서 놀았고, 나도 시민파에서 놀았고. (국제PJ파 두목인) 김길용이도 시민파의 막둥이였고. 그런디 다 없어져부렀어. 경찰이 광주에서는 김길용한테는 '국제PJ파'라고, 김태촌한테는 서울에서 '서방파'라고 이름을 붙어준 거야. 시민파가 있었으면 김태촌은 시민파라고 했을 거여."

덧붙이는 글 | 인터뷰 7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여운환, #홍준표, #국제PJ파, #시민파, #서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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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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