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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수 Expo(여수세계박람회)가 열린 이후에 한 해에 천만 명 이상이 여수를 찾는다. 이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오동도를 구경하고, 연인이나 가까운 지인들끼리 레일 바이크를 타고 아름다운 여수와 다도해를 즐긴다. 방송에서는 '여수 밤바다'가 흘러나오면서 관광객들을 더 유혹한다.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 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아 아 아 아 아 어 어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이 거리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레일 바이크를 타는 여행객들이 오동도가 약 70년 전에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된 장소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제주국제공항 활주로에 70년 전에 학살된 민간인들이 묻혀 있는 지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필자도 전에는 해방정국에서 여순지역이 비극적인 장소였다는 사실을 책 등을 통해서 알았지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교조 통일위에서 여수지역사회연구소장이 광주에 와서 강연을 하였다. 강연 끝자락에 다른 데는 답사를 다니면서 여수는 왜 오지 않느냐 하여 개인이라도 가고 싶었다. 작년 말에 여수 지역을 답사하기 위해서 자료를 검토하고 갔는데 허리 병이 도져서 포기하였다. 이러던 차에 교육청에서 답사를 간다고 하여 통일위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하기로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세계 패권 전략에 의해 분단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미국은 한반도 38선 이남을 패전국 일본과 동등하게 취급하여 점령군으로 진군하였다. 우리 독립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위대하고 혁혁한 항일독립투쟁이 있었지만, 우리 손으로 일제를 몰아내지 못한 결과였다. 한반도를 반공 전진기지로 만들기 위해서 당시 민중들의 80%가량 지지를 받고 있던 독립운동세력을 궤멸시키면서 일제 매국노들을 그대로 기용하였다.

민중들은 미 군정의 정책 실패로 극심한 민생고와 일제 경찰의 민정 경찰로의 변신 등을 보면서 항쟁을 일으킨다. 민중들은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우면서 1948년 4.3항쟁에 돌입하였다.

이 일대는 일제가 수상비행장,막사,격납고를 만들어서 여수에 14연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 일제 해군 수상비행장 이 일대는 일제가 수상비행장,막사,격납고를 만들어서 여수에 14연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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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구부러진 지형때문에 인구부라 한다. 1948년 10월 24일 진압군과 봉기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격전지이다. 이 전투 후 토벌대에 의한 여수시내는 3일간 불바다가 되었다. 손가락 총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한다.
▲ 인구부전투지 왼쪽으로 구부러진 지형때문에 인구부라 한다. 1948년 10월 24일 진압군과 봉기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격전지이다. 이 전투 후 토벌대에 의한 여수시내는 3일간 불바다가 되었다. 손가락 총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한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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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여순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14연대를 제주도로 출동시켜 초토화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제14연대가 출병을 거부하면서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한다.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 <동아일보> 1948년 11월 30일 자

봉기군과 지방좌익은 1948년10월 20일 오후 3시경 중앙동 로터리광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인민대회를 열었다. 여기에서인민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6개항의 결정서를 채택하였다.1.인민위원회의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5.친일파,민족반역자 등을 철처히 소탕한다.6.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 중앙동 인민대회장소 봉기군과 지방좌익은 1948년10월 20일 오후 3시경 중앙동 로터리광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인민대회를 열었다. 여기에서인민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6개항의 결정서를 채택하였다.1.인민위원회의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5.친일파,민족반역자 등을 철처히 소탕한다.6.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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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학살을 거부한다'와 '미군 즉시 철수' 주장은 여순항쟁의 발발원인이었다. 군대에 의한 여순항쟁에 정부와 군대는 책임 전가를 위해서 여수 봉기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신망이 높았던 송욱 교장을 지목했다. 나중에는 이승만이 정적 제거를 위해서 최초의 조작사건인 '혁명의용군 사건'을 만들어서 여순항쟁을 주도한 조직으로 엮는다.

여순항쟁은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김지회 사령관을 중심으로 군인이 봉기하고 여기에 민중들이 호응하여 일어난 항쟁이다. 대략 인명 피해가 1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넓게는 1948년 10월 19일부터 시작된 여순항쟁은 군경 토벌작전이 진행된 1950년 5월까지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37개 시·군 지역에서 피해가 발생했다.

군경이 주둔하면 10월28일부터는 여수와인근 읍면 지역에서 끌려온 혐의자를 팬티만 입힌 채 10명씩 포승줄로 묶어 12월 중순까지 수용하였다. 부산 5연대장이었던 김종원은 혐의자를 재판없이 즉결처분을 자행하였는데, 권총이나 일본도로 목을 치는 광란적인 학살만행을 자행하였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인 김종원은 거창양민학살을 주도하였다.
▲ 종산국민학교 군경이 주둔하면 10월28일부터는 여수와인근 읍면 지역에서 끌려온 혐의자를 팬티만 입힌 채 10명씩 포승줄로 묶어 12월 중순까지 수용하였다. 부산 5연대장이었던 김종원은 혐의자를 재판없이 즉결처분을 자행하였는데, 권총이나 일본도로 목을 치는 광란적인 학살만행을 자행하였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인 김종원은 거창양민학살을 주도하였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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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가담한 군인들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로 입산하여 항쟁을 이어갔다. 산을 근거지로 항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밤에 인근 마을에 내려가서 저녁 등을 해결하였다. 그러면 다음 날 군경이 와서 저녁을 해주고 협조하였다고 무고하게 주민들을 학살하기를 이어갔다.

만성리학살지와함께 알려진 이 곳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을 붙인 곳이다.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중 125명이 총살되고 불태워 졌다. 묘비의 설명은 지워져서 지금은 아무 글씨도 없다.
▲ 만성리형제묘 만성리학살지와함께 알려진 이 곳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을 붙인 곳이다.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중 125명이 총살되고 불태워 졌다. 묘비의 설명은 지워져서 지금은 아무 글씨도 없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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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천석지기 딸인 19살 백순례가 대를 잇기 위해서 오빠를 대신해서 죽으러 가면서 불렀다는 <산동애가>가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산동면을 포함해서 산마을 그리고 전남 동부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산동애가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 보지 못한 채로
화엄사 종소리에 병든 다리 절며 절며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 놓고
열아홉 꽃봉오리 피기도 전에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야 간다

여순항쟁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민중들을 탄압하는 시발적인 항쟁이다. 특히 전라남도 동부지역은 여순항쟁의 영향이 아직도 크다.

14연대가 출동을 거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도민 3만 명이 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우리 군대가 국토방위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지켰다면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때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했을까?

덧붙이는 글 | 해방정국에서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을 위해서 희생당하신 분들을 돌아보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계기를 찾고자 한다.



태그:#14연대 주둔지, #중앙동 인민대회장소, #김종원과종산국민학교, #만성리형제묘, #인구부 전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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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 몸담으면서 교사.교육활동은 현장단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에서도 변혁이 되어야만 참교육에 이른다고 봅니다.그래서 짧은 소견을 대중적인 전자공간을 담보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전달하고 합니다. 저서로 [자본론노트],[청소년을위한백두선생경제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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