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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교수신문은 이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았습니다. 촛불, 탄핵 인용, 조기 대선... 연이어 큰 사건을 경험한 2017년 한국 사회는 얼마나 변화했을까요. 내년엔 '파사'를 넘어 '현정'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올해 상황이 달라진 사안들, ‘보도 그 이후’가 알고 싶은 기사들, 사연 속 주인공의 현재가 궁금한 사례들을 모아 '2017 비포 앤 애프터'를 구성했습니다. [편집자말]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를 지어 발표한다. 지난해 말에는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라는 의미의 '군주민수(君舟民水)'가 뽑혔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니, '민심이 천심'임을 갈파하고 있다. 국정 농단에 맞선 광장의 '촛불'을 상징하는 시의적절한 비유다.

올해는 어떤 촌철살인의 경구가 등장하게 될지 궁금했는데, '파사현정(破邪顯正)'이 뽑혔다. 돌아보면 2017년은 누구에게나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을 테지만, 특히 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국사를 공부하고 있는 내게는 낯섦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만약 '올해의 사자성어'를 내게 지어보라면,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말하겠다. '격세지감'.

[하나] 자취 감춘 '박정희 에디션', 국정교과서 

 문명고 신입생들이 2일 오전 왼쪽 가슴에 '국정교과서 철회' 검은리본을 달고 입학식 전에 운동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문명고 신입생들이 지난 3월 2일 오전 왼쪽 가슴에 '국정교과서 철회' 검은리본을 달고 입학식 전에 운동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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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작년 말부터 평지풍파를 일으키며 교육 현장을 뜨겁게 달궜던 한국사 국정교과서 문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국정교과서 문제가 한국사 수업의 핵심적인 학습 내용이 되었을 만큼 교실에 준 충격이 컸다. 당장 교육적 정당성 논쟁부터 수능과의 연계 여부까지 교사들도 아이들도 '멘붕'을 겪어야했다.

교과서가 '정치'에 휘둘리며 수업을 흔들어놓았다. 수업시간 부러 찬반으로 나누어 토론도 진행하고, 주말을 이용해 관내 중고등학교 학생회가 연대해 반대 시위를 벌이는 등 학교 안팎이 온통 어수선했다. 아이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e-북 형태로 사전 제공된 국정교과서의 내용을 분석하고 기존의 검인정교과서와 대조하느라 애를 먹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국정교과서를 두고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 스페셜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며 스스로 답을 찾아갔다. 하지만 교육부의 지속적인 압박과 빠듯한 교과서 채택 일정 등이 겹쳐 일선 학교는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애먼 시간과의 싸움을 벌였다. 시대착오적인 국정교과서 논쟁으로 엄청난 예산과 시간이 낭비되었고, 교사들은 느닷없는 자괴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국정교과서의 '숙주'가 사라진 지금, 아이들은 당시 여러 언론에 나와서 국정교과서의 당위성을 설파하던 자들을 불러내 응당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해방 직후 반민특위가 해산되어 친일 청산이 물 건너간 사실을 상기하며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폐 청산'의 철퇴를 기다리고 있는 '거물급'이 하도 많아 도드라지지 않을 뿐, 그들도 머지않아 국민들이 보는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할 날이 올 것이라며, 아이들을 다독여야 할 정도였다.

[둘] '아웃 오브 안중'이 된 일베

단식농성장에 나타나 핫도그 먹는 남성 일베 회원등이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단식농성장 앞에서 '도시락 나들이' 등 먹거리 집회를 예고한  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단식농성장에 나타난 한 남성이 핫도그를 먹으며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 단식농성장에 나타나 핫도그 먹는 남성 일베 회원등이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단식농성장 앞에서 '도시락 나들이' 등 먹거리 집회를 예고한 지난 2014년 9월 6일, 서울 광화문광장 단식농성장에 나타난 한 남성이 핫도그를 먹으며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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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의 급격한 몰락도 눈에 띈다. 가장 인기 있는 아이들의 '사이버 놀이터'라는 기존의 지위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수시로 접속해 '일베로' 단추를 누르며 낄낄대는 '일베충'이 아니더라도, 일베는 아이들의 하위문화를 사실상 지배하다시피 해왔다. 가히 일베는 아이들끼리의 소통 창구이자 공용어였다.

이따금 일베의 사진을 사용해 물의를 빚은 몇몇 지상파의 방송사고도 일베의 숨은 위력을 보여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특정인에 대한 폄훼, 사회적 약자를 향한 비하와 욕설 등 이른바 '일베 짓'이 부도덕한 범죄 행위라는 걸 잘 알지만, 단지 재미있다는 이유로 적잖은 아이들이 일베를 기웃거려왔다. 심지어 자신이 '일베충'이라는 걸 굳이 숨기지 않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여전히 일베는 온갖 '배설물'을 토해내며 존재를 과시하고 있으나, 요즘 아이들끼리의 대화에서는 좀처럼 끼지 못한다. 한 아이는 요즘에도 일베에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느냐며 되레 반문할 정도가 됐다. 그는 이어 이명박 정권 당시 전성기를 구가한 일베는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그 운명을 같이했다고 분석했다.

물론, 일베가 정권과 한통속이기 때문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는 않았다. 더 재미있는 사이트가 여기저기 많아진 탓도 있고, 더러는 '관심 종자'라는 세간의 혹평에 스스로 발을 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베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아이들은 기성 언론과 검색 포털의 일베 관련 보도 태도의 변화에 우선 주목했다.

일베가 극성인 건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지만, 방송과 신문, 특히 포털에서 일베를 잘 다루질 않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줄어들었다는 분석이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포털마다 허구한 날 일베 관련 기사가 실렸고, 종종 모자이크 처리를 한 혐오 사진까지 덧붙여 놓아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곤 했다. 언뜻 포털과 일베가 별반 다르지 않게 여겨질 정도라고 말했다.

'일베 짓'으로는 더 이상 친구들로부터 관심을 끌지 못한다. 과거 장난삼아 그랬던 것처럼 '일베충'이라며 놀려댔다간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만큼, 아이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금기어가 된 듯한 분위기다. 포털이 눈치껏 권력의 향배에 따라 춤을 춰온 것 아니냐고 반문하며, 포털과 SNS 등에 떠돌아다니는 온갖 뉴스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됐다는 한 아이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셋] 부록으로 취급되던 5.18, 달라진 위상

가을답사 주제로 정한 5.18 5.18이 동아리 답사지로 결정된 건 동아리가 생긴 이래 처음이었다. 그만큼 문재인 대통령의 5.18 기념사의 영향이 컸다.
▲ 가을답사 주제로 정한 5.18 5.18이 동아리 답사지로 결정된 건 동아리가 생긴 이래 처음이었다. 그만큼 문재인 대통령의 5.18 기념사의 영향이 컸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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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가장 큰 변화는 누가 뭐래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지금껏 아이들은 5.18을 두고 날짜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5.16 군사정변과도 헛갈려 할 만큼 무지했다. 국가 기념일인 데다 당시 희생자들이 묻힌 곳이 국립묘지로 승격된 지 이미 오래지만, 심지어 광주에 사는 아이들조차 5.18의 의미를 쉽사리 가슴에 새기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5.18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뿌리이기 이전에 정부와 시민단체 간 '갈등의 아이콘'처럼 각인되어온 탓이다. 해마다 치러지는 5.18 기념식은 그들의 기억 속에 고성과 몸싸움, 분열과 파행 등 부정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TV나 인터넷에서 그런 모습만 늘 봐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5.18 기념식이 정작 5.18의 역사적 의미를 왜곡하고 폄훼해온 셈이다.

하긴 지난 10년은 5.18의 상징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도 목 놓아 부를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이명박과 박근혜로 이어지는 두 보수 정권은 5.18이 부각되는 걸 꺼렸고, 언론 역시 정권의 충실한 개가 되어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왔다. 10년 전이면 고등학생들이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이니, 거칠게 말해서, 지금의 아이들은 5.18을 제대로 배우기 힘들었던 세대다.

그렇듯 아이들의 닫혀있던 눈과 귀를 순간 열어젖힌 일대 사건이 있었다. 37주년 5.18 기념식에 직접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의 감동적인 기념사가 그것이다. 몇몇 아이들은 5.18 정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건 처음이었다며, 13분짜리 기념사를 수차례 반복해서 들었다고 했다. 또, 기념사 영상 파일을 다운로드해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뒀다며 자랑하는 아이도 있었다.

5.18에 태어나 당시 아버지를 여읜 유족에게 대통령이 예고도 없이 다가가 안아주는 모습을 보고 뭉클했다는 한 아이는, 5.18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 의무감이 생겼노라고 어른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이번 대통령의 '기념비적' 기념사는 목석같던 아이들의 눈과 귀는 물론 가슴까지 뜨겁게 만들었다. 머지않아 헌법 전문에도 실린다고 하니, 5.18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것이다.

생후 3일 만에 아버지 잃은 김소형씨, 위로하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당시 생후 3일 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씨를 위로하고 있다.
▲ 생후 3일 만에 아버지 잃은 김소형씨, 위로하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당시 생후 3일 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씨를 위로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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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답사 동아리 아이들도 단박에 5.18 사적지를 가을 정기답사지로 정했다. 사실 아이들 스스로 5.18 사적지를 직접 가보고 싶다고 말한 건 동아리 활동이 시작된 뒤 처음 있는 일이다. '내 고장'이라 외려 관심이 덜한 탓도 있지만, 그보단 5.18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17년 동안 광주에 살면서도 망월동 국립묘지를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아이도 있었다.

헬기의 탄흔이 발견된 전일빌딩을 답사한 후, 모둠별로 5.18 사적지를 찾아가는 미션을 수행하도록 했다. 걷고, 묻고, 사진을 찍으며 5.18 당시의 현장을 경험하도록 동선을 짰다. 5.18 사적지를 도는 518번 버스를 타고 5.18 당시 희생된 시신 수습이 진행되고 있는 옛 교도소 터도 경유하도록 했다. 미션을 마치면 망월동 국립묘지에 모여 함께 참배하는 일정이다.

5.18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은 현대사를 알아야겠다는 욕구로 불이 옮겨붙었다. 지금껏 현대사는 교과서 맨 뒤의 '부록'쯤으로 치부되어, 아이들은 물론, 심지어 교사들조차 낯설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올 들어 방과 후 수업에 현대사 과목이 별도로 개설되었고, 수강 신청자가 폭주했다. 그래선지 정규수업 시간에는 졸아도 방과 후 수업 때 조는 아이는 없다.

분수대에서 바라본 옛 도청의 모습 옛 도청의 복원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건물의 왼쪽 철골 구조물은 아시아문화전당을 건립하면서 훼손된 부분이다.
▲ 분수대에서 바라본 옛 도청의 모습 옛 도청의 복원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건물의 왼쪽 철골 구조물은 아시아문화전당을 건립하면서 훼손된 부분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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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에 내년부턴 아예 정규수업의 방식을 바꿔볼까 싶기도 하다. 목차에 적힌 대로 선사시대부터 공부할 게 아니라, 교과서를 재구성해 최근의 현대사부터 시작해 인과관계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가르친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그러자면 진도와 모의고사 시험범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는데, 교사로서 현재의 교육 과정 아래에서는 나름의 결기가 필요하다.

요컨대, 2017년은 지난 10년 동안 권력에 억눌려온 역사교육에 숨통이 트인 한 해였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겨우내 광장을 메운 '촛불'이 가져다준 빛나는 성과다. 비록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만, 바야흐로 '비정상의 정상화' 노정에 이제 막 들어섰다. 한국사 교사로서, 참으로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격세지감'의 희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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