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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다운 스케일을 자랑하는 병마용박물관

고태규의 실크로드 문명기행
17.12.16 13:04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화청지에서 병마용(兵馬俑)박물관은 5킬로쯤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버스 요금은 3위안, 소요시간은 약 15분 걸린다. 버스정류장에서 2위안을 주고 석류 하나를 사서 먹었다. 정말 맛이 좋았다. 잘 익어서 씹으면 빨간 과일즙이 줄줄 흐른다. 왜 양귀비가 석류를 좋아했는지 알 거 같다. 그래서인지 화청지에는 석류나무가 많다.

병마용은 자료로 너무 자주 봐서 그런지 신선한 느낌은 없었지만 그 규모의 방대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스타일대로 거창하고 웅장한 것은 인정해주어야 한다. 화청지도 그렇고, 법문사도 그렇고, 요즘 새로 조성하는 관광단지도 아주 세련되게 잘 만들고 있다. 돈의 힘과 역사와 문화의 저력이 합쳐져서 나타나는 찬란한 중국의 새로운 문명이다. 위키백과는 병마용갱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중국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에 있는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는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장수, 병사, 말, 전차 등의 모형이 있는 갱도이다. 병마용갱은 진시황제의 장례에 사용된 테라코타이다. 병사, 말 등을 인육을 사용하여 등신대로 제작하여 구워 만들었다.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지금까지 4개의 갱도가 발견되었다.

병사는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이 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다. 병마용은 전사, 전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된 4개의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 개의 전차, 520 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

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가 있어 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한 것이다. 다리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로 같은 틀을 사용하여 대량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조립을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을 맞춘 뒤 다음 과정으로 넘겨주는 생산 공정에 따른 조립 라인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기와의 생산과 같은 일상 생활용품의 제작에서도 이러한 생산 라인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병마용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등신대로 제작되었으며, 얼굴 부위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병마용의 존재는 진시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엔하위키 미러(리그베다 미러) 백과사전에 의하면, 병마용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모라는 설도 있다. 고고건축학자인 천징위안은 <병마용의 진상>이라는 책을 통해 60여 개의 근거를 제시하며 병마용의 실제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할머니로, 강력한 섭정을 펼쳐 '2천 년 전의 서태후'라고 불리는 '진나라 선태후'라고 주장했다. 천징위안은 일반 사병들도 갖췄던 투구를 진시황제의 친위 군단이 착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의상 역시 빨간색과 보라색이 주조를 이루는 것은 검은 색을 숭상하도록 법령으로 공포할 만큼 검은색을 선호했던 진시황제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시황제가 6국을 통일한 직후 화폐와 문자, 도량형을 통일시키면서 용이한 전술 운용을 위해 전차의 너비도 통일했는데,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차량들의 바퀴 너비가 일정치 않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용맹무쌍하기로 이름났던 당시 진나라 병사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무사용들은 수염을 기른 늙은이 형상에 우울하고 기운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점도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학설은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에게 반박당하고 있다. 병마용갱에서 발견된 무기에 쓰인 명문에 여불위의 이름이나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에 설치한 관청의 이름이 새겨진 점, 병마용갱의 바닥에 깔린 벽돌이 진시황릉 곁에서 나온 다른 배장갱의 벽돌과 동일한 점, 병마용갱 외에도 위에서 설명한 많은 배장갱이 진시황릉 곁에 있다는 점 등이 병마용갱은 역시 진시황릉의 부속 시설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또한 천징위안이 주장한 투구 문제는 진시황릉의 다른 배장갱인 개갑갱에서는 돌조각으로 만든 모형 갑옷과 함께 투구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병마용들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 전투 준비태세를 갖춘 상태를 모형화한 것이므로 투구를 아직 쓰지 않은 것으로 형상화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아직까지는 정설이다. 천징위안이 선태후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병마용갱 바로 옆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대형 무덤 또한 선태후 시대 무덤 구조와는 다르고, 오히려 위에 나온 진시황의 자녀 무덤으로 추정되는 배장묘와 구조가 거의 같다는 점도 천징위안의 설이 그저 설로 그치게 하는 정황 증거다.  

그 병마용갱의 주인이 누구든지 과거의 영웅들은 한 결 같이 사후를 걱정했나 보다. 생전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그랬고,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들이 그랬고, 중국의 왕들이 그랬다. 그들은 한 결 같이 후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덤을 도굴하지 못하도록 거대하고 특수한 무덤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비밀리에 만들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비밀이 어디에 있겠는가. 기원전 2천 년대에 건설된 파라오들의 무덤들은 기원전 1천 년대에 이미 대부분 도굴되어 버렸고, 아케메네스 왕들의 무덤은 침략군들에게 파괴되었고, 진시황제의 무덤도 약 2천년이 지나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도굴 여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인간은 누구나 영생불사하고 싶지만 뜻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과거 영웅들은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박물관에서 나오는 길에 목이 말라서 하나에 5위안짜리 석류를 또 하나 사먹었다. 그런데 10위안이나 주었다. 내가 돈을 잘못 준 것이다. 먹고 나서 5위안을 돌려달라고 하니까 자기가 하나에 10위안짜리를 주었단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고급 석류를 가리킨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어디나 저런 장사치는 있게 마련이니까 포기하고 돌아섰다. 

시안 역으로 돌아와서 역 광장을 구경했다. 기차표를 사는 사람과 보따리를 몇 개씩 들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중국에 사람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기차역이나 버스정류장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광장에서 저렇게 땅바닥에 짐을 놓고 자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역 대합실에 들어가서 기다리지 왜 밖에서 저 땡볕을 다 받으면서 생고생을 하고 있을까? 이런 저런 의문이 많았지만 내가 중국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2013년 9월 6일 금요일, 맑음)  


태그:#병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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