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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구태여 헌법이니 국민의 기본권이니 하는 당위를 내세우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하고 존엄하게 살기를 바라며 또 꿈꾼다. 최근 언론에 오르내리는 '장애인 개인예산제'는 행복추구권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 개인예산제란 '장애인 당사자가 받는 복지서비스를 화폐로 환산해 총액 범위 내에서 당사자가 다른 서비스로 바꿔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뜻한다. 그간 기관이나 공급자 중심의 복지서비스 때문에 종종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었다. 서비스 공급과 수요 사이의 불균형으로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하는 경우 등이다.

이는 복지서비스의 질 저하로 이어지기도 했다. 서비스 이용당사자인 장애인에게 생활상 큰 불편과 어려움을 초래했다. 시각장애인인 필자 역시 평생 불편과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다. 이제는 장애인 개인예산제를 시행해 서비스 이용 당사자인 장애인이 직접 복지서비스를 선택하고, 누릴 수 있게 하면 어떨까. 개인예산제가 시행된다면 과연 무엇이 바뀔까. 필자에게 새롭게 열릴 세상을 상상해봤다.

우선 필자는 점자정보단말기를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단말기는 시각장애인들이 점자와 음성을 통해 문서의 출력과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휴대용 정보통신 기기다. 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필자가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 없어서는 안 될 보조기기인 셈이다. 필자는 글을 쓸 때, 서적이나 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할 때가 많다. 하지만 점자정보단말기가 없으니 낭독봉사자의 도움에 의지해야만 한다. 낭독봉사자가 필자를 대신해 인터넷에 자료를 검색하고, 자료를 내게 읽어주는 형식이다.

하지만 점자정보단말기가 있다면 봉사자의 도움 없이도 글을 읽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시간,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이다. 하지만 점자정보단말기의 가격은 500만 원이 훌쩍 넘는다. 대여조차 쉽지 않다. 1년 사용료가 100만 원을 웃도는 수준인데 비장애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각장애인들이 단말기를 구입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필자가 점자정보단말기를 이용하면, 정보 접근권이 보다 향상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세상은 아주 제한적이다. 매일 같은 공간, 익숙해진 길을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비장애인과 소통할 때에도 많은 제약이 따르지만,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없어 글을 쓰는 필자에게는 아주 큰 약점이 된다. 개인예산제가 시행된다면 필자는 국내, 해외여행을 통해 넓은 세상을 이해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도 있다. 이는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장애인 개인예산제 도입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목표라고 생각한다. 장애인 개인예산제는 '장애인이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됐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할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이 침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장애인역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더 나은 수준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또, 문화 접근성이 높아질 것이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서 눈으로 받아들이는 즐거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필자역시 시각장애인이지만 영화, 연극, 뮤지컬 등 각종 문화생활을 다양하게 즐기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음성안내 서비스를 갖춘 문화공연들이 생각보다 꽤나 많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가 이토록 문화생활에 열심인 이유는 따로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비장애인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 때마다 최신영화나 문화정보 등을 나누면서 쉽게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뮤지컬의 경우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각장애인들이 접하기란 쉽지 않다. 관심은 많지만 비용의 한계 때문에 문화 접근성이 제한된다면 이 역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받는 셈이다. 또한 개인예산제 시행으로 문화적 접근성이 높아진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교류가 보다 활성화 되어 격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장애인 스스로 삶을 개척할 기회가 되기를

마지막으로 활동보조인의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현재 여섯 명의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이는 '장애인 활동 지원 제도' 덕분인데, 본 제도는 중증 장애인에게 활동 지원 인력을 제공함으로써 장애인의 사회참여와 자립을 돕고자 만들어졌다. 필자의 활동보조인도 많은 일들을 처리한다.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찾고 기사를 읽어주기도 하며, 내가 읊어주는 소설을 한글 파일에 옮겨 적는 일 등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동과 식사를 보조하기도 한다. 사실 필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인력인 셈이다.

하지만 2017년 현재 활동보조인의 임금은 시간당 7,020원에 불과하다. 현행 최저임금 6,470원에 비하면 500원 가량 높다. 과연 이 7,020원이라는 금액이 활동보조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인가 의문이 든다. 사실 활동보조인의 시급은 9,240원이지만 장애인과 활동보조인을 중개하는 기관에서 수수료 명목으로 활동보조인 시급 중 2,000원 가량을 공제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조인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적 만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공급자 중심의 제도에서 벗어나 장애인이 직접 보조인에게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개인 예산제도가 도입되기까지 많은 난항이 예상된다. 예산의 문제가 가장 크다. 실제로 개인예산제 도입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장애인에게 개인별 예산이 책정될 시, 가격 경쟁이 생겨 복지서비스에 시장의 논리가 도입될 우려가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예산제는 이미 세계적인 흐름이다. 영국, 독일, 스웨덴 등이 이미 본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호주 역시 오는 2018년 전국적으로 개인예산제를 확대할 전망이라고 한다.

호주의 경우 2013년 이미 시범사업을 시행하였는데, 그간 시범사업을 통해 4만 명의 장애인 일자리 확대와 GDP 1.3%의 상승률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연금이나 복지 의존도의 감소로 이어져 사회적 비용이 측면에서도 아주 경제적인 셈이다. 한국도 세계적 흐름에 발맞추어 장애인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복지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갖는 사회로 발돋움하기를 바란다.


태그:#장애인개인예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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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둠 속에서도 색채있는 삶을 살아온 시각장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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