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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시베리아와 사할린 등 곳곳에 강제이주와 동원이 남긴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그 분들과도 동포의 정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 문재인 대통령의 8.15 광복절 경축사 중에서

사할린 잔류 동포들을 알고 계신가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동쪽과 일본의 홋카이도 북쪽에 위치한 러시아령 사할린. 한겨울에는 영하 40도를 기록하는 혹한의 땅입니다. 이곳에서 살던, 또 지금도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있습니다.

1905년 한반도를 무대로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포츠머스강화조약에 따라 사할린섬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일본명, 미나미카라후토 南樺太)을 차지했습니다. 남사할린에는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들이 유입됐습니다. 특히 일제의 대외침략정책이 본격화된 1938년부터는 강제징용으로 탄광에 끌려온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했습니다. 일본정부는 항구에서 자국민만을 선별해 배를 태워 사할린 남쪽의 홋카이도(일본)로 들여보냈습니다. 당시 대략 4만 3000명으로 추정되는 동포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강제징용의 책임을 저버린 일본정부는 일본인들(또는 일본인과 결혼한 동포들과 그 자녀들)에게만 바닷길을 제공했습니다. 동포들 대다수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남녘 출신이었습니다.

한반도가 미국, 소련의 개입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분단으로 치닫는 상황. 한국정부는 무기력했습니다. 동포들은 정부에 기댈 수 없었습니다. 대야에 물을 받으면 금세 꽁꽁 얼어붙는 사할린에 남아야 했습니다. 일본어에 이어 러시아어를 익혀야 했습니다. 일본인을 대신해 새롭게 등장한 소련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의 자구책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이후 구소련 말엽인 1989년 7월 귀국길논의가 열리기 이전까지 동포들은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한일 양국 적십자사는 '사할린한인지원 공동사업체'를 체결했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가리라'며 무국적자로 남아있던 1세대 동포들의 귀국길이 비로소 열렸습니다. 강제징용으로 직접 책임이 큰 일본, 그리고 한국 정부는 적십자사를 가교로 삼아 동포들의 귀국 및 조국방문을 지원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단 그 대상은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에서 태어난 동포 1세, 또는 같은 시기 이전부터 사할린에서 거주해 온 동포들로 제한됐습니다. 2, 3세들은 귀국이 아닌 일시방문만 가능합니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국민적 관심은 뜨겁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피해자 할머니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극진히 대접하는 등 성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반면 같은 일제 피해자인 사할린 동포 어르신들에 대한 처우는 여전히 차갑기만 합니다. 국민적 관심도 희미합니다. 지금까지 4000명이 넘는 분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재 3000명이 넘는 분들이 생존해 계십니다. 전국 24곳의 임대아파트, 요양시설에서 빠듯하게 생활하고 계십니다. 동포들의 목소리는 사실상 '방치'되고 있습니다.

어느덧 귀국길이 열린 지 30주년(2019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는 달리 사할린 동포들의 사례(영주귀국, 모국방문, 귀국자 사할린 역방문 등)는 한국사회에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거동이 불편하신 동포 어르신들의 요양을 담당하는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을 아는 한국인은 무척 드뭅니다. 총 3편으로 이어질 사할린 동포 기획기사, 우선 동포 어르신의 생생한 말씀을 전하며 시작합니다. 하루빨리 획기적인 개선책이 마련되길 촉구합니다. – 기자말

대설을 앞두고 본격적인 겨울추위가 찾아온 지난 5일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을 찾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노동력 강제동원 등으로 사할린에 거주하게 된 동포 1세대 분들이 여생을 보내고 있는 곳. 노환을 겪는 사할린 동포 1세대 어르신을 책임지고 모시는 국내 유일의 장기요양시설이다. 인천 도시철도 1호선 신연수역 3번 출구에서 내려 인천적십자병원의 언덕을 타고 올라가 표지판을 따라가면 태극기와 적십자기가 나부끼는 회관입구가 나온다.

회관은 적십자병원과 아파트 단지, 낮은 야산에 둘러싸여 있다. 건물 바깥에는 어르신들이 앉아서 쉴 수 있도록 정자와 벤치가 놓여있다. 건물 뒤쪽으로는 야산으로 통하는 산책길이 있다. 치매를 겪어 회관을 찾아오시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 최근 들어서는 바깥나들이를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산책길 바로 옆에는 회관 내부에서 화재 발생 등 사고가 생기면 어르신들이 빠르게 탈출할 수 있도록 설치된 '구조용 미끄럼틀'이 눈에 띈다.

회관을 찾아 동포 1세대 강정순 할머니의 말씀을 들었다. 어르신들이 생활하시는 회관 1층 4인 1실, 강 할머니의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회관 노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강 할머니는 1932년생으로 올해 86세. 무척 정정하셨다. "점심 안 드셨지?" 강 할머니는 감, 사과, 여러 과자 등을 준비해 기자를 기다리고 계셨다.

강 할머니는 본격적인 말씀을 이렇게 시작했다. "일본 사람들만 다 데리고 나가고. 한국 사람들만 남아서. 한국 사람들만 임자 없는 사람 되어서" 아래는 강 할머니의 말씀을 정리해 축약한 인터뷰 내용이다.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입구?
▲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입구?
ⓒ 박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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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상황 시 회관 2층에 기거하는 동포 어르신을 탈출시키기 위한 구조용 미끄럼틀
▲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긴급상황 시 회관 2층에 기거하는 동포 어르신을 탈출시키기 위한 구조용 미끄럼틀
ⓒ 박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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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존함과 연세는 어떻게 되시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회관은 1999년 처음 문을 열었는데, 어르신은 언제부터 이곳에서 거주하고 계신지요? 또 한국에는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셨나요?
"이름은 강정순이고 86세(1932년생)입니다. 2006년 6월 30일부터. (거주하고 있어요) 비행기로, 일본으로 해서 왔을 거예요. 빨리 왔으니까. 한 3시간 반 (걸렸죠). 그전에는 북한으로 해서 왔지만 북한이 막혔으니까."

– 일제 패망 이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을 제외하고 일본인만 선별해 일본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조선인들 대다수가 일제의 강제동원 정책에 의해 사할린으로 건너오게 됐음에도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 건데요. 당시 동포들이 처한 상황은 어땠나요?
"사할린에는 1942년도에 들어가서 그땐 일본 사람들하고 같이 있었으니까. 일본 사람들하고 2년 반 같이 살다가 러시아 사람들이 쳐들어오니까. 해방되니까. 일본 사람들은 다 데리고 가 버리고. 한국 사람들은 다 두고 가 버리고. 한국에선 못 배웠어요. 일본학교 가니까 글도 뭣도 몰랐는데. 또 러시아 사람들하고 살면서 우리가 임자 없는 땅에서 어떻게 살았겠어. 얼마나 춥습니까. 난로에 불 때우고 둘러앉아서 끓여먹고. 주방 들어가지도 못해요 추워서. 물 떨어지면 얼어요. 물 떨어지면 걸레가 안 닦아지고 얼어서. 그런 데서 살았지. 뭐가 있겠어요. 바깥으로 물 뜨러가야지. 먹을 것도 없으니까 남의 집 가서 일해주고 감자 같은 것도 가져와서 삶아도 먹고 구워도 먹고. 또 우리 어머니가 영화관에서 청소해서 월급 받아서 그렇게 살고. 아버지와 오빠는 일본사람들이 1944년에 징용해서 큐슈(九州)로 데려가 버렸으니까.

내가 5남매 중 가운덴데. 오빠도 그때 일본사람들이 군대 데려가서 남매 세 명이 남아있었지. 동생 둘 저 그리고 어머니. 우리가 어렸으니까 어머니가 시골 가서 일해주고 감자 갈아서 떡 해가지고 팔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남았는데. 동생이 좀 크니까 러시아학교 가니까 한국 사람 대학 안 붙여주잖아요. 동생 1명은 북한으로 나갔어요. 북한 사람들이 와서 좋다고 선전하는 바람에 동생은 북한 가 버리고. 그땐 신발도 없었고 눈이 와도. 이런 잠바가 어떻게 있겠어요. 아무것도 없이. 장화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게타(일본식 나막신) 신고 다니고. 점점 러시아 사람들 오는데 그 사람들도 해방 후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누비저고리 하나만 입고 왔어요. 고생 많이 했어요. 빵 같은 거 팔면 아침부터 줄 서. 쌀은 없었고. 보리, 기장쌀 그런 거 1kg씩 주면 사먹겠다고 줄 서서. 그것도 떨어지면 집으로 돌아가야 돼. 그때 배 많이 곯았어요. 그렇게 살았지."

강정순 할머니가 가족과 찍은 사진을 들고 있다.? 강 할머니는 밝게 웃어보였지만 때때로 그리운 가족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훔치시기도 했다.
▲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강정순 할머니가 가족과 찍은 사진을 들고 있다.? 강 할머니는 밝게 웃어보였지만 때때로 그리운 가족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훔치시기도 했다.
ⓒ 박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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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도에 사할린에 들어가셨다고 했는데 그 이전엔 어디에 계셨는지?
"전라남도 순천이 고향인데. 아버지는 일본 큐슈 탄광에서 일하고. 어머니가 마음이 아프게 되고 일 못하게 되니까. 아버지 초청 받고 일본 들어갔지. 일본 들어가니까. 집은 대강 지어가지고는 한 집에 방 하나 딱 주면서 4명이서 살라고. 온 식구가 요 하나 깔고 같이 잤어요. (일본으로) 들어가니까 아버지가 또 오빠랑 큐슈로 징용되어버리고. 그다음에 전쟁 나니까. 아버지와 오빠는 사할린에 오지 못하고. 일본 사람들이 자기나라 가라니까 한국으로 나오시고. 그런데 그땐 소식이 없었죠. 길이 막혔으니까. 사할린 사람들은 불바다 됐으니까 다 죽었다고 소문나서. 우리 아버지는 한국(전라남도 순천) 오셔가지고 다른 여자 데리고 살고. 오빠는 우리가 다 죽었다니까 자살해 버리고."

– 구소련 정부는 한동안 일본인학교를 조선학교로 전환시키는 등 한동안 동포들의 민족교육을 인정했는데요. 교육상황이 어땠나요?
"조선학교 열었는데. 조선글 배워야지 러시아글 배워야지 하니까. 조선글은 한국 못 가니까 배워서 쓸 데 없다 그러니까 러시아글만 배운 거야. 지금 거기 있는 애들은 글도 모르고 한국말 잘 못해요. 그냥 그대로 (조선학교를) 놔뒀으면 되는 건데 없애버려서. 아들이랑은 조금 배웠으니까 하지만. 다른 애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 할머니의 학생시절은 어땠나요?
"한국 있을 땐 학교 마당에도 못 가봤지. 그 동네 구장인지 하는 사람들 보면 얼마나 부러웠어요. 돈 있어야 가지? 야학이라고 조금 열었다가 닫아버리면 못 가고. (1942년도에) 사할린 왔으니까 일본학교 가야하는데 9월 달에 오니까 많이 늦었죠. 8살에 가야 되는데. 늦게 들어가서 일본학교 들어가서 일본말 조금 배우고. 러시아 사람들 오니까 늦었지. 결혼 하고 나니까 아이들 보니까 학교도 못 가고 야학도 못 가고. 자기 이름자나 쓰고 배운 것도 유식한 말은 못 하고. 보통 때 쓰는 말 약간 배웠고 그렇게 말하죠. 저는 한국말 많이 하지만. 러시아말, 일본말 잘 못해요. 짧아요."

– 사할린에서의 생활은?
"일도 하고 월급도 받고 그러니까 살기 좋아졌어요. 한국사람들은 부지런하잖아요. 땅을 파서 감자 같은 것도 심고. 자기 땅이 없고 그 땐 (소련이) 공산주의니까 국가 땅이니까. 뭐 좀 심어서 팔러 나가면 러시아사람들이 참 좋아해요. 사 먹는 거 좋아해요. 조금씩 팔아서 돈 가지고 사먹고. 인종차별은 어느 나라나 다 있잖아요? 북한에서 사할린으로 와서 선전 한다고. 가고 싶으면 북한으로 가고 들어오고 싶으면 사할린으로 들어와도 괜찮고. 마음대로 하라니까 동생이나 청년들이 좋다고 다 북한으로 나갔잖아요. 해방 후에 그렇지 뭐. 북한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건설한다고 일만 잔뜩 시키고. 내가 71년도 북한에 갔다 왔어요. 동생이 북한에 나가있으니까 10년 만에. 선전하느라고 잘 해줬지 뭐. 좋은 호텔에서 재워주고 하니. 동생은 김책공대 나왔어요."

– 환경이 무척이나 다른 사할린, 한국 등에서 거주하셨는데요. 고향이란 말을 들으시면 마음이 복잡하실 것 같습니다. 조상의 고향은 한국의 전라남도 순천이지만, 사할린에서 오랫동안 거주해 오셨으니까요. 본인이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면 어디일까요?
"사할린이라고 반대 못하지.(할 수도 있죠) 거기서도 60년 넘게 살았으니까. 지금도 러시아 보면. 러시아 사람들이 인정 있어요. 거기는 버스 타도 노인들, 아녀자들이 짐 들고 타면 꼭 자리 비켜줘요. 내가 북한 남동생집 갔을 때 조그마한 버스밖에 없었어요. 한 여자가 (짐) 이고 아기 업고 버스 타는데. 사할린 같으면 남자들이 자리 비켜주는데 여기는 안 비켜주고. 전 얼마나 고향이 그립던지. 우린 다른 나라 사람이니까 언제 쫓겨날지 몰라서 그리웠었는데. 1991년도 7월에 관광 나오니까 우리 한국이 이렇게 잘 사는지 몰랐다. 들어와 보니까 내가 5월 달이니까 꽃이 만발하지 얼마나 좋던지. 우리 고향에 큰할머니가 살아 계시니까 한 달 동안 갔다 왔지."

– 사할린에서는 명절나기 등을 하면서 우리네 전통문화를 이어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할린에 거주하셨는데 특히 어떤 문화가 기억에 남으세요?
"거기선 양력 많이 쇠요. 음력보단 양력 많이 쇠요. 음력 쇠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지금은 괜찮게 사니까 두부도 하고 묵도 하고 빵도 하고 별 거 다하고. 손님들 해 주시고. 손님들한테 접대하고 지금은 많이 살기 좋아졌어 사할린도. 어려웠을 때는 없으니까 할 생각도 안하고. 엿도 달여 먹고 조금 살기 좋아지니까. 오늘은 이 집에서 내일은 저 집에서. 김치도 하고 장도 담그고 한국 사람들 다 해먹었어요. 한국음식 안 먹으면 못살잖아. 러시아 사람들도 한국 아줌마들이 내다파니까 맛을 들여서. 김치, 가자미식해, 고사리나물, 당근채도 잘 사먹고. 무섭다고 하더니 지금은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잘 먹어요.

사할린에선 눈이 왔다 하면. 문을 바깥으로 내지 안 그러면 못 나가니까. 나올 때면 구멍 내 가지고 다니고. 가지러 못 나가니까 미리 안으로 가져다 놓고. 사할린처럼 눈 많은 나라(지역)도 없어요. 눈싸움은 명절 돌아오면 애들은 하지요. 학교에서 하고. 어른들은 그런 거 안 하지. 자빠지기는 얼마나 자빠져요 미끄러워서. 저도 넘어져서 허리 나갔잖아요. 넘어지고 가다가 또 넘어지고. (내가) 조그마니까 바람이 불면 넘어지고. 바람이 불면 앉았다가 안 불 때면 걸어가고 그렇게 살았죠."

왼쪽은 예수를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 독실한 신자인 강 할머니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오른쪽은 사할린을 형상화한 그림.
▲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왼쪽은 예수를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 독실한 신자인 강 할머니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오른쪽은 사할린을 형상화한 그림.
ⓒ 박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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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할린에서 한국으로 떠나기 전, 상황을 말씀해주신다면?
"아들이 같이 농사하다 하늘나라 가버리니까 저 혼자서 못하잖아요. 가망이 없다 생각하니까. 밤에도 마음 놓고 못 자겠고. 그 전엔 아들이랑 같이 다녔는데. 도둑이 많잖아요. 잘 못사니까 없는 사람들이. 소련도 잘 못사니까 나쁜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저녁에 오면 무서워서 잠도 바로 못 자고. 제가 집에서 살다가 넘어졌어요. 생각하니까. 그 땐 저 혼자 살았죠. '야 여기서 내가 넘어져 죽어도 모르겠다' 아들(하바로프스크에 사는 큰아들)이 저한테 전화하면 뭐 합니까. 볼 일 보러 갔다 생각하지 넘어져 죽는다는 거 알겠어요?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 가자. 내가 한국을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좋은 기회다 가자. 나는 요양원으로 가겠다고. 내가 아프면 아들 고생시키니까 한국 가서 죽겠다고. '인천으로 가겠다' 하니까. '할머니 거기 하늘에 별 따기요. 자리 없어요'라고 들었지. 2005년도 8월 26일 (한국으로 영주귀국을) 가라는 날짜가 나왔단 말이에요. 며느리한테 농사도 다 맡겨 버리고. 며느리도 섭섭했겠지. 남편도 없고 도와줘야 하는데 오겠다니까. 며느리는 '어머니 가시겠다면 가시오. 가서 좀 쉬시오.' 했지. 그러니까 왔지. 그땐 간다 하면 배웅한다고 나와서. 아프지 말라 잘 살라고. 어떤 사람은 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한국 온다니까 좋아서. 아픈 부모 모시고 일 안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겠어? 잘했죠 뭐."

– 사할린에 남아계신 가족, 이웃친지들이 보고 싶으시겠어요.
"둘째아들이 하늘나라 가버리고 없고. 둘째며느리가 (사할린에서) 딸 데리고 사는데. 연금 받고 먹으면서 사니까 생활은 하고 있어요. 아프지만 말아달라 기도하고 있어요. 큰 아들은 하바로프스크 가서 여자하고 살고 있고. 딸(둘째며느리)이 한국으로 와서 있다 갔어요. (회관에선 같이 지낼 수 없어서)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사할린으로) 돌아갔어요. 자기 집으로 갔어요. 우리 큰며느리도 부산 살고 있고. 동생도 인천 논현동 살고 있고. 형제가 5명인데 2명밖에 안 남았죠. 손녀들도 이리저리 시집가서 살고 있고. 괜찮아요. 작년엔 한국에서도 사할린 친척 있는 데 다녀오라고 비행기표도 주셔가지고 다녀오고. 아들이 세 명인데 둘은 가 버리고 큰아들만 남고. 전화할 수 있어요. 전화비가 비싸기 때문에 자주 못합니다. 안부만 잘 있다고 전하면 됐죠."

– 사할린에 계셨을 때 러시아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셨는지?
"제가 바지공장에서 15년 일했는데요. 러시아 사람들이 한두 명 있으니까 한국 사람들끼리 말하죠. 러시아 사람들하고 같이 일해야 말 배우겠는데, 어디 가도 한국 사람이라 더 말 못 배웠어요. 그래서 제가 유식한 (러시아)말은 못 하잖아요. 대강 배운 말만 하지. 러시아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않아서."

– 회관으로 온 뒤 괴로운 일이 있다면?
"회관에 와서는 아프면 아무래도 괴롭죠. 아프면 괴로워서 병원에 입원하고. 다 죽어가는 사람들 휠체어로 데려가서 입원시키고. 며칠 있으면 또 나오고. 여기는 사람이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보통 90살 넘은 할머니들인데. 데려가면 살려놓고 하니까. 먹여주고 하니까 어떻게 죽어요. 그래도 여기서 많이 돌아가셨어요. 심지어 청소하다 자빠져가지고 무릎뼈 수술 해가지고. 연세도 많으니까 다리에 힘도 없으니까 자빠지면 다치고 그렇죠."

회관 1층에 위치한 어르신들의 휴게공간.
▲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회관 1층에 위치한 어르신들의 휴게공간.
ⓒ 박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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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략전쟁 시기 일제는 노동력이 부족한 사할린에 조선인들을 동원했습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부터는 사할린 동포가 일본의 남서부 큐슈 탄광으로 끌려가는 2차징용 사태도 있었는데요. 오늘날 일본정부는 일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과거사는 해결됐다'고 합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일본 가니까 한국 사람들은 곡괭이 메고 판단 말이오. 위에서 무너지면 50~60명 다 죽는단 말이야. 그런 위험한 일은 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사람들 시켰단 말이에요. 징용을 시킨 거지. 노동자들이 글도 모르지 말도 모르지. 먹는 거는 시시하게 조금씩 주고. 큐슈 데려가서 탄광에서 일했잖아요. 큐슈는 징용으로 갔지. 일본사람들이 한국사람들 나쁜 일, 위험한 일 시켰으니. 죽으라면 죽는대로 살았지 자유롭게 살았어요? 그 사람들이. 해방 후에 한국으로 내보니까 징용으로 일한 사람들한테 돈 하나도 안 물어주잖아. 아쉬우면 어떡하오. 우리가 뭐 할 수 있어? 힘으로 어떡하겠어? 세상 돌아가는 대로 살아야지. 그거 가지고 파고 파서 한국 사람들하고 일본 사람들하고 전쟁하면 좋겠어? 평화롭게 같이 친하게 지내는 게 낫지. 저 사람들이 전쟁하자면 어떡하겠어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 현재, 건강이나 생활은 어떠세요?
"건강은 괜찮아요. 아직은 걸어 다닐 수 있고. 감사할 뿐이죠. 그런데 여기서 다 좋은데 한 가지 문제는 뭔가 하면. 자녀들이 왔다 가면, 사할린 사람 놀러 오면 하룻밤(도) 여기서 안 재워줘요. 밤 10시에 오면 호텔 가야되니까. 안 재워주니까 그게 문제예요. 이번에 딸(며느리)이 왔을 때 하룻밤도 안 재워준다고 해서. (말이 안 통하니까) 제가 친척집에 데리고 다니면서 여기서 재우고 저기서 재우고.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그게 정말 섭섭해요. 구청에서 안 된다 하니까. 호텔 같은 데 가서 자는 거 보다 여기서 자면 좋지 않겠어요. 절대로 여기서 자면 안 된다니 불편합니다."

후속기사로 이어집니다.
②문 대통령 약속에도…사할린 귀국동포들의 겨울은 매섭다 (인터뷰)
③사할린 동포들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듣자 (현황과 전망
)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주권방송>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사할린, #동포,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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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정세, 일본의 동향에 큰 관심을 두며 주시하고 있습니다. 적폐를 깨부수는 민중중심의 가치가 이땅의 통일, 살맛나는 세상을 가능케 하리라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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