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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집착과 광기의 야구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1990년대 최고의 인기 만화 <드래곤볼>의 베지터는 처음 초사이언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한다.

"나도 순수했어. 순수한 '악'이었을 뿐. 난 오로지 강해지는 것만을 원했다."

초사이어인 베지터가 <공포의 외인구단>을 봤다면 감히 저 대사는 쉽게 내뱉지 못했을 거다. 강해지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광기와 집착으로는 베지터가 <공포의 외인구단>을 이기지 못한다. 손가락 하나로 별 하나를 날려버릴 수는 있을지언정, 복수를 위해 자기 손가락을 자르지는 않을 테니까. 손가락 하나, 두 눈 정도는 버릴 수 있는 순수한 집념과 집착, 그리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는 아무리 좋게 봐도 극단의 폭력이다.

<공포의 외인구단> 스틸컷
 <공포의 외인구단> 스틸컷
ⓒ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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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외인구단>은 각자의 결함 때문에 낙오된 선수들이 무인도에서 지옥 훈련으로 새롭게 거듭난 뒤, 꼴찌팀에 통째로 들어가 천재타자 마동탁이 버티는 최강팀을 꺾는 과정이 핵심적인 줄거리다. 이렇게만 보면 죽도록 훈련하는 청춘의 땀방울 같은 흔한 열혈 스포츠 만화 스토리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차라리 전쟁만화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폭력과 파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엄지에 대한 집착으로 야구 승부와 자신의 두 눈까지 버리는 오혜성, 그런 오혜성에게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마동탁, 그런 두 남자의 사랑을 넘어선 집착에 미쳐가는 엄지,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인간 존엄과 육체의 한계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손병호 감독의 행동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하다.

작은 키 때문에 열등감 폭발하는 최경도, 검은 피부로 차별 받던 하국상, 재일조선인으로 차별받아온 외팔이 최관 등등의 집착과 집념도 광기에 가깝다. 권력욕과 출세욕으로 가득 찬 박광도 감독이 그나마 가장 평범해 보일 정도다.

1983년 출판된 이 만화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80년대 하이틴 스타 최재성이 주인공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고 안성기가 손병호 감독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덕에 이 영화는 1986년 한국영화 흥행순위 1위를 기록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순수하다. 강함에 대한 순수한 동경, 첫사랑에 대한 순수한 사랑, 순수한 승부욕. 하지만 그들의 순수는 폭력과 맞닿아 있다. 원래 순수함에 대한 지나친 강박은 폭력의 다른 얼굴이다. 순수한 아리아인의 국가를 꿈꿨던 나치가 바로 순수성의 폭력을 증명한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가장 유명한 이 대사는 영화판 OST에서 가수 정수라가 부른 타이틀곡 '난 너에게'의 가사이기도 하다. 오혜성이 엄지에게 말한 이 대사는 순수한 사랑과 집착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오혜성에게는, 그리고 외인구단의 등장인물들에게는 '네가 기뻐하는 일'보다 '뭐든지'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폭력이 되는 과정이 대개 그러하듯 '너'보다는 '나'에 집중하게 되기 마련이고, 좀 더 선명하게 자신의 순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다 보면 점점 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경향을 띠기 마련이다. 이렇게 자라난 폭력은 결국 자기 자신까지 잡아먹게 된다.

비극적인 <공포의 외인구단>의 비극적인 결말은 폭력의 결과가 어떠한지 보여준다. 오혜성은 엄지가 남편 마동탁의 승리를 바라자 두 눈을 잃으면서까지 죽기 살기로 패배를 만들고, 손병호 감독은 패배의 충격에 심장마비로 죽는다. 이 과정을 지켜본 엄지는 끝내 실성한다.

풋풋하고 서툰 소년 소녀들의 야구만화를 빙자한 연애만화 <H2>

"중2때까지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 쓸 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이미 첫사랑 진행 중."

야구 만화 대사를 가사로 차용한 노래라면 역시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을 빠뜨릴 수 없다.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난 첫사랑의 '고백'은 <H2>의 대사로 시작한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한국 야구 만화의 고전이라면 <H2>는 일본 야구 만화의 전설이다. 1992년에 연재를 시작한 이 만화는 아다찌 미쯔루의 전작 <TOUCH>와 함께 폭발적으로 꾸준히 사랑받는 만화로 약 50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중학교 단짝이면서 각각 최고의 투수와 타자였던 히로와 히데오는, 둘의 대결을 보고 싶었던 신의 장난과도 같은 어이없는 사건으로 각기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명문 야구부에 들어간 히데오와 야구부가 없는 학교에서 새롭게 야구부를 만들어가는 히로, 이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열정적인 야구 승부를 펼치며 풋풋하고 서툰 사랑의 실타래를 뒤죽박죽 꼬아가는 것이 이 야구만화를 빙자한 청춘연애 만화의 주된 스토리다.

<H2>는 <공포의 외인구단>과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들이 플레이 하나하나에 집착과 광기가 서려있다면 <H2>의 주인공들에게 야구는 무척 진지하고 사뭇 비장한 일이지만, 시합이 끝나면 친구들과 야채부침 먹으면서 바로 잊어버릴 수 있는 그저 공놀이일 뿐이기도 하다.

강해지기 위해 목숨까지 걸고 좋아하는 상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외인구단의 등장인물들이라면, 좋아하는 야구를 실컷 한다면 대학 입시 재수 정도는 해도 괜찮은 것이 <H2>의 소년 소녀들이다. 압도적인 실력을 갖고 있음에도 더 완벽한 승리를 위해 상대팀 주축 선수에게 몸에 맞는 볼을 던지는 히로따 정도가 그나마 집착이 무엇인지 보여주지만 그조차도 <공포의 외인구단>에는 명함 한 장 내밀지도 못할 수준이다.

물론 <H2>에서도 사람이 죽고, 주인공들은 실연에 아파하고, 좌절을 겪는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살면서 겪는 보통의 일들일 따름이다. 주인공들은 응당 겪어야 할 슬픔을 겪고, 충분히 아파하면서 그 과정을 지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H2>에서의 죽음과 실패에는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지 않다.

폭력의 시대를 거쳐 온 한국 야구

던지고, 치고, 받는 룰은 똑같은데 이렇게나 정반대의 세계관을 두 만화가 보여주는 까닭은 역시나 만화 또한 그 작품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H2>가 연재되던 1990년대 일본 사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이 탄생한 한국의 1980년대는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폭력이 사회를 짓누르던 때였다. 외인구단 선수들의 지옥 훈련을 보면서 삼청교육대를 떠올리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더욱 웃픈 건 삼청교육대가 아니라 프로야구에서조차도 <공포의 외인구단>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는 거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선수들의 정신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동계 훈련 때 꽁꽁 언 강물 얼음을 깨고 옷을 홀딱 벗고 들어가 있는 냉수 목욕 사진이 스포츠 신문을 장식하고는 했다. 물론 손병호 감독처럼 선수들에게 채찍질을 하는 지도자는 없었겠지만, 감독이나 고참 선수가 다른 선수들을 구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곤 했다.

한국 야구는 이제 서서히 <공포의 외인구단> 시대를 벗어나고 있지만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 프로야구 선수들 사이에서는 폭력이나 얼차려가 거의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마야구에서는 선배가 후배를 때리는 일이 아직도 많다. 최근에도 수억대의 계약금을 받는 초특급 유망주가 고교 야구부 후배를 폭행한 사실이 알려져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H2>에 소오세이라는 이름의 고등학교가 잠시 등장한다. 공부로는 명문인데 야구로는 신통치 않았는지 처음 진출한 감자원에서 30대0, 기록적인 패배를 당하고 놀림감이 되는 학교다. 하지만 소오세이의 학생들은 야구와 공부를 병행한다. 때문에 그들의 패배는 창피한 일이 아니게 된다.

나는 한 명의 야구팬으로서 한국 야구가 패배를 창피해하기보다 낮은 경기력을 더욱 창피하게 여기기를 바란다. 낮은 경기력보다는 폭력을 더 부끄러워하는 문화가 되기를 바란다. <H2>의 소년 소녀들처럼 좋아하는 야구를 실컷 하고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야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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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외인구단 애장판 6~10 박스 세트 2 - 전5권

이현세 지음, 학산문화사(만화)(2009)


공포의 외인구단 애장판 1~5 박스 세트 1 - 전5권

이현세 지음, 학산문화사(만화)(2009)


태그:#공포의외인구단, #H2,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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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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