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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 나에게 말을 붙이고 /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 '시 읽어주는 남자'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교수)가 읽어주는 한강의 <서시>를 들었다.

광산문예회관에서 열린 신형철 포엠콘서트 '시, 재즈로 읽다'에서였다. 소슬한 초겨울, <서시>는 묻는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 무엇을 후회했는지 /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 끝없이 집착했는지 / 매달리며 /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 때로는 /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

남도에는 시인이 많다. 김영랑(내 마음을 아실 이, 북), 박용철(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황지우(윤상원, 너를 기다리는 동안), 한강(서시), 이날 신 교수는 남도 시인 4명의 시 6개를 이야기하고 사이사이 재즈와 국악을 넣었다. 퓨전 재즈(더블루이어즈), 대금소리(한충은 & Forest)가 시와 만나 어우러진다. 시가 음악을 만나자 의미와 감흥이 더욱 깊어졌다.

왜 시를 읽는가?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 위로받기 위해".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한 말이다. 박완서는 시를 읽어야 할 때가 많았다. "글 쓰다 막힐 때,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우리도 시를 읽고 싶을 때를 자주 만난다. 외롭고 지쳐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을 때, 점쟁이라도 찾고 싶을 때다. 스페인까지 가서 한 달여씩 산티아고 길 걷는 사람들 심정이 이해된다.

'7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는데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아픈 남편 위한 기도드리러, 지금 행복하지 못한 내가 행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려고, 나를 찾기 위해' 산티아고 길을 걷는단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 행복한 미래가 보일까. '부처는 곧 나'라면서 부처를 찾으러 먼 천축까지 가야 하나. 틱낫한 스님은 삶에 지쳐 외롭고 불안한 사람들에게 '명상걷기'를 하면서 시를 되풀이 외우라고 권한다. 걸을 때, 운전할 때, 밥 먹을 때, 청소할 때, 숨 쉴 때마다 시를 되풀이 외우라고 했다. 시가 기도문이 된다. 진짜 시 읽기는 역시 기도처럼 입에서 술술 나오는 암송이다.
 
생각과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 운명이 되듯 암송한 시는 운명이 된다. 기도하듯 암송할 시는 어디에 있나? <서시>는 우리에게 '어느 날 운명이 찾아올 때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눈 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라' 권한다.

'우리'는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무엇을 사랑했는지' 묻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나무관세음보살'을 하루 수천 번씩 외우면서도 막상 걸인관세음보살을 문전에서 내쫓는 게 우리다.

"당신이 마냥 사랑해주시니 기쁘기만 했습니다 언제 내가 이런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당신 일만 생각했습니다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죽음 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시인 이성복의 <거울>을 암송했다. '당신'은 내 운명이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가슴 속이 훈훈해진다.


태그:#신형철, #포엠콘서트, #운명, #암송,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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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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