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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의 결혼식이었다. 둘째 아이가 젖병을 안 물고 모유 수유만 고집하고 있어서 3시간 동안만 외출할 수 있는 신데렐라 신세였다. 그렇지만 친구의 새출발을 짧게나마 응원해주고 싶었다. 이제 100일 갓 지난 아기 엄마가 그렇듯, 화장, 머리, 옷, 어느 하나 신경 써서 준비하기 힘들었다. 대충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만 차려 입고 출발했다.

결혼식에 큰딸과 함께 가길 잘했다. 덕분에 자신감, 안정감 상승!
 결혼식에 큰딸과 함께 가길 잘했다. 덕분에 자신감, 안정감 상승!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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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결혼식장은 만남의 장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도 많았다. 내가 일찍 결혼한 이유로, 대부분의 친구들은 미혼의 아가씨였다.

'나와 같은 나이인데 다들 여전히 이쁘구나. 날씬하고. 곱게 화장할 시간도 넉넉했겠지?'

청승맞게 부러워졌다. 부러움은 1초만. 사람들 북적이는 결혼식장으로 데려온 큰 아이를 건사해야 했기에, 정신 팔 여력도 없었다.

"다혜야, 고등학생 때보다 표정도 훨씬 안정적이고, 목소리에 자신감도 묻어나. 부럽다. 많이 좋아졌어. 비결이 뭐야?"

예상치 못한 칭찬에 당황했다. 내가? 너희를 부러워 할 사람은 난데? 아가씨들이 아줌마를 부러워하면 어떡하니. 마땅한 대꾸를 찾지 못해 동문서답해버렸다.

"아줌마라서 그래, 아줌마~ 하하하!"

강렬했던 문답을 마치고, 언제 한 번 만나자는 지키지 못 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큰 딸이 잠들었다. 결혼식 가서 맛있는거 먹겠다고 새벽부터 일어나더니. 잠든 아이의 모습에 평화롭게 웃음이 샜다.

차창 밖 풍경을 보면서 친구의 칭찬을 다시 되새겨봤다. 안정적, 자신감.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어린 딸이 보는 앞에서 오랜만에 보는 동창들에게 소심하고 싶지 않고, 불안해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더욱 싫었다. 아이와 함께 갔기에, 더 자신감 있게 행동했고, 편안하게 대화하려 애썼다.

아줌마라서 자신감과 안정감을 얻은 게 맞구나. 나도, <아이 셋 키우는 남자>(사람이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쓴 권귀헌 작가처럼 두 딸을 육아(育兒)하면서 육아(育我)했구나. 아이들 덕분에 조금은 컸구나 싶었다.

아이 셋 키우는 남자 표지
 아이 셋 키우는 남자 표지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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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는 육아(育我)는 아내가 첫째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던진 수많은 질문과 끝없는 고민, 스스로 찾은 답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 그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책임감.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얻으며 시작된 육아(育我)가 아닐까요.' - 294쪽.

작가가 고백하는 '자신을 기르게 해 준 육아'는 진실인 것 같다. 300여 쪽에 달하는 '아이 셋 기르는 남자'의 매 에피소드마다 작가의 성찰이 묻어났다. 아이들에게 인사 예절을 가르치면서 인간 관계에 대해 사유하고, 큰 아이 교실에 가서 그림책 읽어 주면서 서로의 성장과 깊이를 체험한 것, 맛있는 밥, 사탕, 치즈를 찾는 삼형제를 보면서 어른인 작가가 매력적인 목표, 포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고민한 것.

작가는 육아의 나날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다. 생각했고 자신을 발전시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했기에 더 진지하고 솔직하게 고민했다. 힘들다고 투정만 할 수 있는 육아기를 성장의 기회로 삼았다. 작가는 그 비결을 '글쓰기'라고 말한다.

'저도 여느 아빠들처럼 아이를 보는 게 버겁고 때로는 귀찮은 평범한 아빠입니다. 다만 조금 다른 것이 있으면 육아를 하면서 글을 썼다는 것입니다.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충무공의 난중일기처럼 저는 전쟁 같은 육아 중에도 어제보다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육중일기를 썼습니다.' - 319쪽.

어제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 '육중일기'를 썼다. 진정성 묻어나는 글들에서 나도 고된 육아를 더욱 빛나게 할 실마리를 얻었다. 평범한 하루를 진주알처럼 반짝이는 보석으로 만들 수 있는 아주 귀한 실마리였다.

재미있는가, 궁금해지는가, 의미있는가

권귀헌 작가 블로그의 여러 댓글들을 읽다가, 귀한 조언을 얻었다. 한 블로거가 글을 퇴고할 때 작가님께서 염두해두시는 바가 있는지 물었다. 작가는 흔쾌히 가르쳐줬는데, 그게 바로 '재미있는지, 궁금해지는지, 의미있는지'다.

<아이 셋 키우는 남자>, 이 책이 딱 그렇다. 재밌다. 읽다보면 궁금해진다. 마지막에 깨달음을 얻어 간다. 매 에피소드마다 교훈을 주지만, 아이 둘을 키운 지 얼마 안 된 '초보 애 둘 엄마'로서 가장 와닿은 메시지는 '품어야 할 때는 온전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도 사람인데!' 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았다. 피곤하면 짜증내고, '나도 딸들처럼 심장 동동 뛰는 연약한 인간일 뿐이야'라며 정당화시킬 때도 많았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속성 뒤에 숨어서, 어른으로,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품는 사랑'을 간과했다.

'힘들 때 행동이 진짜가 아닐까요. 편할 때는 누구나 배려하고 사랑하고 양보할 수 있습니다...(중략)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해야 진정한 어른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 46쪽.

도망칠 구석이 사라졌다. 못난 내 모습에 뒷걸음질치다가, 이 문장을 읽고 더 도망갈 수 없게 되었다. 힘들 때 행동이 진짜라는 말. 특히 아이들 재울 때, 나의 본성을 드러낸다. 하루 중 제일 피곤할 때라서 그렇다.

어른답지 못하게 아이들에게 짜증내고 화내고, 뒷통수 긁적이면서 헤헤 웃으면 대체로 일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알게 되었으면 행동해야지. 당장 바뀌지 않겠지만 마음에 새기고 조금씩이라도 성숙해져야겠다. 사람됨의 원칙을 고수하는 작가의 성찰에 오랜만에 마음이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품어야 할 때는 온전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문제이지만 부모 편하자고 아이들의 성장을 가로막아서도 안 됩니다.' - 51쪽.

'그러나 인생의 퍼즐을 내 의지대로 맞춰가겠다고 무게 중심을 잡은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낯선 세상에서 이제는 총이 아닌 펜을 들어야 한다는 기대감과 설렘이 훨씬 더 컸던 거죠.' - 183쪽.

작가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군인이었다. 17년의 긴 군생활을 접고 전업 작가로 들어섰다. 이동이 잦은 군인의 특성상 '가족'이었으나 한솥밥을 먹는 '식구'는 아니었기에 과감한 결정을 했다. 전역 후, 집에서 세 아들을 돌보며 글을 썼다. 총이 아닌 펜을 들게 된 작가, 식구를 되찾은 그의 결단 덕분에 나는 귀한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척박한 대한민국의 출판 시장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가치를 지켜내는 기대감과 설렘이 있었다는 권귀헌 작가. 지금도 혈기왕성한 세 아들의 밥을 해 먹이며 글감을 다듬고 있을 그와 둘째 아이를 포대기로 안고 재우며 서평을 쓰는 나를 오버랩하며 대한민국 부모들 모두를 응원합니다.

큰 아이가 그린 어린이집 친구. 나도 딸이 자라는 속도만큼 맞춰서 같이 커야지.
 큰 아이가 그린 어린이집 친구. 나도 딸이 자라는 속도만큼 맞춰서 같이 커야지.
ⓒ 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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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셋 키우는 남자

권귀헌 지음, 리오북스(2017)


태그:#아이셋키우는남자, #권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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