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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 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3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끔찍한 악몽을 꿨다. 퇴근하려 뒷문을 열었는데 복도 대신 교실이 나왔다. 시계는 오전 아홉 시를 가리키고, 아침 방송이 요란하다. 피로감은 그대로인데 하루가 반복되고 있었다. 뒷걸음질 치며 밖으로 도망가지만 눈부신 햇살 쏟아지는 교실이 끝없이 이어졌다. 새하얀 섬광에 질려 숨을 헐떡이며 일어났다. 편안함 밤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모른다. 학교에서 꿈 얘기를 하며 밤이 필요하다 했더니, 애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밤에는 혼자 머리 못 감아요."

채연이는 눈감는 사이 귀신이 정수리에 손 올릴까 봐 불안하다. 분명 낯선 감촉을 느꼈다고 주먹 꽉 쥐며 말했다. 창백한 표정 연기에 실소가 터졌다. 한편 심각한 얼굴로 경청하는 애들은 장난이 아니었다. "이십 년만 지나 봐라, 귀신이 무섭나 카드값이 무섭지" 하며 서가 구석에서 <그날, 어둠이 찾아왔어>를 집어 올렸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형광등을 껐다. 라즐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좋은 날이었다.

라즐로
 라즐로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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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즐로는 어둠이 무서운 꼬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겁이 나 손전등을 챙긴다. 어둠은 언제나 라즐로 곁에 있었다. 태양이 떠 있는 동안 어둠은 옷장에 숨거나, 샤워 커튼 뒤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지하실에서 지냈다. 싸늘하고 습기 찬 곳.

"너희 집에도 어둠이 살고 있지. 지! 하! 실! 같은 데서 말이야."

음절을 뚝뚝 끊으며 위협하듯 읽자 마음 여린 녀석들이 부르르 떨었다. 우리 반 애들도 어둠과 살았다. 가현이네는 부엌 쪽 화장실에 새까만 암흑이 살고, 지후네는 연탄보일러 언저리에 으스스한 밤이 숨죽이고 있었다. 보희는 불 끈 방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속으로 숫자를 세며 얼른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라즐로도 밤에 숫자를 셀까?

라즐로는 아침마다 지하실을 살짝 들여다본다. "안녕, 어둠아."하고 먼저 어둠을 찾아간다면, 어둠이 방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어둠이 찾아왔다.

"라즐로."

라즐로는 손전등을 놓지 않는다.
 라즐로는 손전등을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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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부르는 소리에 라즐로는 몸을 일으켰다. 금발 소년은 손전등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비춘다. 복도로 통하는 문과 샤워 커튼 뒤편을 노란 빛줄기로 들춰보지만 어둠은 "아니. 아래층"이라 대답할 따름이다.

"저기 가면 좀비가 목 깨물 것 같아."

갑자기 다한이가 목 조르는 흉내를 냈다. 애들이 과장스럽게 웃었다. 건율이는 억지로 키득거리며,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동자로 주변을 살폈다. 다들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난데없이 좀비가 왜 나와?"
"유튜브에서 '아기 좀비' 봤는데 물리면 처음에 괜찮아도 나중에 좀비 돼요."

아이들은 공포심에 짓눌리면 어디선가 본 장면을 아무 데나 대입시켜 버린다. 다한이 눈에는 라즐로가 아기 좀비로 보인다. 라즐로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지만 자꾸 생각이 좀비로 간다. 아니라고 설명해줘도 어쩔 수 없다. 자신이 믿는 세계가 현실이라고 우기고 싶은 열 살이다.

"가까이 와."

어둠이 말했다. 라즐로는 이제껏 밤에 어두운 지하실에 가는 건 생각지도 않았다. 지하실로 연결되는 길은 온통 새까맣고, 머리 위 지붕은 삐거덕거린다. 라즐로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어렵게 발걸음을 뗀다. 손전등을 환히 밝히고 계단을 내려온다.

"더 가까이."
"맨 아래 서랍."

어둠의 목소리는 컴컴한 지하실 안 서랍에서 흘러나왔다. 수납장은 굳게 닫혀있고, 근처는 암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책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영문판 표현이 간결하다. 절제된 문장으로 으스스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
 영문판 표현이 간결하다. 절제된 문장으로 으스스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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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라면 서랍을 열 건가요? 아니면 돌아갈 건가요?"

수연이가 질린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애초 지하실 같이 위험한 장소에는 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불길한 곳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며 당장 돌아가는 게 옳다는 입장이었다.

"전기톱 사이코패스가 숨어 있을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전기톱 사이코패스다. 아기 좀비랑 같은 증상이다. 겁에 질린 어린이는 가공의 대상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데려온다. 우웨에엥! 전기톱 모터 돌아가는 굉음이 들리는 양 귀를 막는다. 공포심은 스멀스멀 스며드는 안개와 같아서 상상만으로 오싹한 기운이 들게 한다. 여론이 급격히 기울어 반 아이들 절반이 서랍을 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혹시 열 수 있는 사람?"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순간에 시후 손이 올라왔다. 이목이 집중되자 홍당무가 된 시후가 스마트폰을 스윽 꺼냈다.

"이것만 있으면 된다고."

시후 왈, 저녁 골목길을 걷는데 바스락 거리며 뭐가 지나가더란다. 심장이 쪼그라들며 도망갈까 했는데, 용기 내어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보니 생쥐였다. 며칠 뒤 또 신원 미상의 존재가 휙 스쳐갔다. 지난번 기억이 나 불빛을 비추니 갈색 무늬 고양이었다. 두어 번 그러고 나니 오히려 밤 산책길이 기다려진다며 한껏 설렜다.

어둠이 누군가에게는 공포지만, 어떤 이에게는 설렘이 된다. 만약 시후가 플래시를 켜지 않고 그대로 달아났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미소 띠며 밤길을 논할 수 없었으리라. 두려움에 휩싸여 도망치는 자는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다.

겁먹고 소리 지르고 싶을 때, 깊게 숨 내쉬고 눈을 크게 떠보자. 우리를 벌벌 떨게 하는 대상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진짜 사납거나 괴상한 것들이 튀어나오면 어떡하냐고? 그건 그때 가서 맞서거나, 신고하면서 대처하면 된다. 눈 꼭 감고 안절부절못하는 것보다 훨씬 현명한 행동이다.

어둠만 그런 게 아니다. 어른이 된 후에도 온갖 소문, 미신, 괴담에 휘둘린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뉴스에 북한 얘기만 뜨면 전쟁 난다고 호들갑 떨고, 누구 뽑으면 나라 망한다는 친구 말에 묻지 마 투표를 한다. 공포는 부정확한 정보에서 발생한다. 그러니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확인 안 하는 습관'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끝으로, 겁쟁이 소년 라즐로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어둠의 속살을 뚫고 내려갔을까 아님 뒤돌아섰을까. 답은 손에 있다. 라즐로는 맨손으로 깊이 잠들었다. 맨손에 얽힌 사연은 부디 직접 확인 해보길 바란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돋보인다. 어둠을 두려워 말자.
 어둠이 있기에 빛이 돋보인다. 어둠을 두려워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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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어둠이 찾아왔어

레모니 스니켓 글, 존 클라센 그림, 김경연 옮김, 문학동네어린이(2013)


태그:#레모니스니켓, #존클라센, #그날어둠이찾아왔어, #문학동네,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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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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