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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웅선,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
 안웅선,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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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웅선 시집의 내밀한 시어를 미주알고주알 따라 읽다보면, 갑충의 껍데기처럼 단단한 서러움이 늘켰다.

잘 지내지?/ 라는 문자를 받곤 하는데// 나는 청력이 귀한 사람이라 빗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수명(壽命)을 긁는다……// - 「섬의 하루」 중에, (14쪽)

관성처럼, 세상에는 어떤 질서가 있는 것처럼, '잘 지내지?'라는 문자를 '응, 잘 지내' 하고 쾌활하게 웃으며 답문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약한 인간의 정신으로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성서의 교리처럼, 불가의 말씀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내 삶의 안락이 일상의 안부에 조차 답을 할 수 없게 한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 청년들의 삶이 그러했다. 대한민국에 사는 수많은 이민호가 구의역에도, 제주도에도, 인천에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꺾였다. 

안웅선은 1984년 순천에서 태어나, 2010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는 안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다. 시집은 전체 3부 구성으로 50편이 수록되어 있다.

「펭귄, 펭귄, 펭귄」 전문 (70~71쪽)
 「펭귄, 펭귄, 펭귄」 전문 (70~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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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양복을 입고/ 좁은 상 앞에 앉아 저려 오는 다리를// 펭귄의 자식들은 모두 눈의 정원에 선다/ 하얀 도화지 위에 무릎을 꿇고 연필로 그림자를 베끼며// 빙하라는 깊이를 생각하면 떠난 사람들이/ 말을 건다 눈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 마술사의 상자 속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 그래도 친구라고// 모두 저린 발을 비비며/ 절벽 절벽 읊조리며 앉아 있는 것인데/ 새벽이면 혼자서만 백발이 되어 버린 느낌이고// 나는 친구가 적고 검은 양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도무지 나를 모르고// 지금에야 나는/ 서곡을 연주하기 시작한 지휘자처럼 온 힘으로 예의 바르다 음악은 적도를 지나 남쪽으로 남쪽으로 사라지며 서늘해져 가는 데 화면은 모두 흑백인 채로// 휘청이며 일어선다// 돌아오는 길마다/ 사람, 손을/ 빌리지 않은 적이 없다// - 「펭귄, 펭귄, 펭귄」 전문 (70~71쪽)

시적 상황은 빈소가 마련된 장례식장이다. 문상객들은 떠난 사람에 대해 한두 말을 섞고, 육개장을, 소주 한 잔을, 김치 한 조각을 집어 먹을 것이다. 화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문상객을 펭귄이라는 은유로 표현했다.

시집의 작품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장은석은, "누군가 나에게 안웅선의 시를 한편만 건네 달라고 요청을 한다면 나는 '펭귄, 펭귄, 펭귄'을 내밀고 싶다"(139쪽)고 했을 정도로 이 시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시에서 드러난 기묘한 분위기에서 삶과 죽음은 대립항이 아니다. 이것은 이 시뿐만 아니라 안웅선 시 전반에 드러난 그의 자세였다. 역사라는 긴 시간의 터널을 관통하다보면 죽음은 오늘 이 시간이 부여한 순서의 다름일 뿐이었다.

먼저와 나중에의 차이일 따름이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관계라는 것을 매듭지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친구라고', '절벽 절벽 읊조리고' 있는 우리네 삶에서, 친구라고 부르는, 삶의 시간과 마음을 섞는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붙잡은 이름들" ('미사' 중에, 22쪽)이라는 실존이며, "운동화 끈을 묶으며"('놀이터로 가기' 중에, 41쪽) 놀러 가기 좋은 공간이며, "내게도 뿔이 굽는 슬픔과 관계하는 방법"('대책 없는 파랑' 중에, 102쪽)을 일러주는 시간이었다.

관계 맺기의 사라짐은 애도하는 과정으로 바뀐다. 뫼비우스 띠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역사에서, 때론 분노와 슬픔이, 애달픔이 뒤섞이기도 한다. 화자는, "세상에서 감정이 모두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사도들' 중에, 100쪽)라고 언술하기도 했다.

감정의 사라짐을 애도의 사라짐으로, 슬픔과 관계 맺지 않음으로, 따라서 붙잡을 수 없는 이름이 된다. 우리는, "검은 양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도무지 나를 모르"고, 나 역시 그들을 모르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내게 익숙한 고인의 한 면이 해체되는 것이다.

그가 살아생전 맺었던 다양한 인적 관계망에서 내가 알고 있었던 것, 검은 양복을 입은 다른 사람이 알고 있었던 것이 모여, '그'라는 온전한 한 사람을 표상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것도 기억의 가공이라면, 왜곡이라면, '그'라고 부르는 친구 역시 모르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지만, "돌아오는 길마다 사람 손을 빌"려 가며 살고 있다. 관계는 결코 소유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관계는 차별이 아니며, 오늘을 사는 시간과 공간에 잠시 서로 간에 손을 빌려 주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공동체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숲에는 계속 비가 내렸고 비 내린 날보다 많은 사람이 목을 매었다// - '내일' 전문, (79쪽).

손을 빌리는 대상은 타인에만 국한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자아'와의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 자신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나를 표상한 고정관념 속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마치 유목민처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무한 반복 될 것 같은 열패감, 멸시에서 버틸 재간을 못 느끼는 것이다. 자신의 구조가 견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합리한 숲의 시스템에서 맞는 비는 더 아플 수밖에 없고, 궁극에는 내리는 비의 숫자보다 더 많은 생이 거꾸러졌다. 어쩌면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의 차이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논리적 오류가 갖는 말장난일 뿐이다.

시집을 덮고, 친구에게 가고 싶어졌다. 아지트를 만들고도 싶어졌다. 마을에 잔치라도 있다면 아이처럼 편육 한 점도, 전 한 접시도 빼서 나눠 먹고 싶어졌다. 모르는 체로, 때론 굳세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안웅선,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 (민음사/2017), 전체 141쪽, 값 9,000원.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

안웅선 지음, 민음사(2017)


태그:#안웅선, #탐험과 소년과 계절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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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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