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바다가재구이
 바다가재구이
ⓒ 심혜진

관련사진보기


"네가 전화하라고 했잖아."

내 앞에 앉은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입사동기로 나와 마음이 잘 맞아 친하게 지냈다. 무슨 일인지, 대뜸 내게 바닷가재를 사주겠다고 했다. 14년 전 당시엔 '랍스타(로브스터로 읽음)' 음식점이 한창 유행이었다. 바닷가재 요리를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아 이유도 묻지 않고 따라나선 터였다.

새빨간 바닷가재 한 마리가 커다란 접시에 통째로 나왔다. 직원이 우리 눈앞에서 가위와 집게로 살을 발라 앞 접시에 덜어줬다. 큼직한 살덩이를 입안에 넣으니 짭조름하고 달큼한 바닷가재 향이 입안에 확 퍼졌다. 식감도 탱글탱글하면서 어찌나 부드러운지! '이렇게 맛있는 걸 그동안 남들만 먹었단 말이지!' 너무 맛있어서 약이 오를 지경이었다.

내가 바닷가재에 몰두해 있는 동안 언니는 아까부터 그 남자 얘길 하고 있었다. 언니가 한 달 전 소개팅에서 만난 연하남이다. 언니는 그와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내게 전하며 상담을 청했다. 나도 연애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 상담자로 적절하진 않았지만 언니의 이제 막 시작한, 달곰한 연애담을 듣는 것이 설레고 재밌어서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얼마 전 언니가 그와 다퉜다. 그와 통화하던 중 화가 난 언니가 "다신 연락하지 마!"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언니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에게 전화가 오길 기다렸다. 3일째 되던 날, 언니는 "답답해서 못 참겠다"며 먼저 연락을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극구 말렸다. "기 싸움에서 지면 안 돼. 절대로 먼저 전화하지 마! 알았지?" 언니는 힘없이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다짐한 지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언니는, 내가 그 남자에게 먼저 연락을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다가 전화를 받아서 기억을 못 하나 보다. 어젯밤에 전화했을 때 네가 그렇게 말했어. 아무튼 화해했고 주말에 만나기로 했어. 네 말을 듣길 잘했어. 고마워."

나는 핸드폰을 열어 통화기록을 확인했다. 분명히 언니와 통화한 기록이 있었다. 잠결에 전화를 받고 기억을 못 하다니, 처음 있는 일이다.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잘 됐다니 다행이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당시 엄마는 친구들과 여행계를 붓고 있었다. 그런데 계주가 최근 연락을 피하는 듯, 소식이 뜸하다고 했다. 자꾸 계주에게 전화를 하면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할까봐 연락도 못 하고 속만 끙끙 앓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출근 준비하는 내게 엄마가 밝은 표정으로 "같이 계하는 친구에게 어젯밤 전화가 왔는데, 계주한테 먼저 연락을 해서 이야기해보겠다고 하더라"며 좋아했었다. 그런데 지금 엄마 표정이 너무 안 좋다.

"왜요, 계주 잠수 탔대요?"
"아니 그게, 나도 궁금해서 친구한테 전화를 해봤지. 근데 글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거야. 나한테 전화를 안 했대. 분명히 어제 잘 때 전화가 왔고 통화를 했거든.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어..."

엄마는 귀신에라도 홀린 듯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퍼뜩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엄마가 잠이 든 걸 보고 난 씻으러 화장실에 갔었다. 그때 핸드폰을 엄마 옆에 두고 나왔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내가 씻는 사이 언니에게 걸려온 전화를 잠결에 받았고, 둘이 통화를 한 거였다.

그 언니는 정확히 여섯 달 후 그 연하남과 결혼을 했다. 속도위반이었다. 본의 아니게 중매를 한 엄마도 곗돈의 무사함에 안도했다. 어쨌든 해피엔딩. 아! 그날 전화를 받은 건 내가 아니었다는 말은 아직 비밀이다. 어쨌든 바닷가재는 참 맛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바다가재구이, #단짠단짠그림요리, #요리에세이, #그림에세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